미국과 중국 간 갈등이 커지며 중국 기업들이 하나둘씩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를 떠나는 가운데 동남아 기업들이 이들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을 것이라는 뉴욕 증권거래소들의 기대가 만연하다. 기업들 역시 세계시장으로 진출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모습이다. 한편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기준금리 인상은 이들 기업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중국 최대 차량공유업체 디디추싱은 지난해 12월 IPO 이후 약 반 년 만에 뉴욕 증시 상장 폐지를 결정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미국 증시에 상장된 모든 기업들에 회계 조사를 의무화하는 등의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결정하자 미국에 민감한 자료가 유출될 수 있다며 중국 당국이 압박을 가한 영향이다. 이에 당시 데이비드 뢰빙거 TCW 이머징마켓리서치팀 이사는 미국과 중국 간 긴장 상태가 계속되는 가운데 2024년까지 대부분의 중국 기업들이 미국 주식시장에서 퇴출될 것이라고 CNBC에 전망하기도 했다.
아직 동남아시아 기업들의 IPO 규모나 건수는 중국 기업들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지만 가능성은 있다. 딜로직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기업들이 2021년 한 해 동안 IPO를 통해 154억 달러를 조달했다며 이는 지난 2020년에 비해 두 배 이상 많은 수준이라고 밝혔다고 닛케이아시아는 14일 보도했다. 중국에 비하면 절반 수준이다. 2021년 7월 초까지 미국 증시에 상장한 중국 기업들은 34건의 IPO를 통해 125억 달러를 모금한 것으로 금융정보제공업체 레피니티브 자료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동남아로부터 대규모 IPO를 유치해 지난해와 같은 성장률을 기록할 수 있다면, 중국 기업들의 IPO 규모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나타나고 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올해 IPO 대어들이 뉴욕 증시 상장을 노리며 시동을 걸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역대 최대 합병으로 관심을 모았던 고토(GoTo) 그룹, 베트남 최대 대기업 빈그룹에서 분사한 빈패스트 등이 올해 뉴욕 증시에서 IPO를 진행하는 주요 동남아시아 업체가 될 전망이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정부들이 국내 주식시장을 뒷받침하고자 IPO 유치에 열을 올리는 상황에서 이러한 기업들 대부분은 자국 IPO 이후 미국에서 IPO를 진행할 것이라고 로이터는 지난 10일 설명했다. 로이터는 이러한 결정이 "정치적·재정적으로 합리적"이라고 평가했다.
인도네시아 차량공유·결제업체 고젝과 전자상거래업체 토코피디아 간 합병을 통해 이뤄진 고토그룹은 올해 내에 인도네시아와 미국에서 IPO를 진행할 예정이다. 블룸버그는 지난해 고토그룹이 11월 11일 IPO를 앞두고 기업 가치를 250억~300억 달러까지 올리기 위해 약 13억 달러 이상을 조달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금융감독청(OJK)은 고토그룹 IPO를 앞두고 기업들의 국내 IPO를 유치하기 위해 다수가 의결권을 가지고 있는 기업들의 상장 규정을 지난해 12월 7일 발표하기도 했다. OJK는 "이러한 규정은 혁신적인 기업들을 수용해 금융시장을 심화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인도네시아 증권거래소 역시 OJK 발표 후 약 2주 만에 기술 기업들의 상장 조건을 완화했다. 닛케이아시아·로이터 등 외신은 이러한 조치가 고토그룹의 IPO를 주시하면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베트남 최대 대기업 빈그룹에서 분사한 미국·유럽 시장을 대상으로 한 전기차 제조업체 빈패스트 역시 올해 하반기에 미국 주식시장에서 IPO를 진행할 예정이다. 블룸버그는 소식통을 인용해 빈패스트는 적어도 30억 달러 이상을 조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레 티 투 투이 빈패스트 부회장은 지난해 11월 IPO 후 빈패스트의 가치가 250억~600억 달러가 될 것으로 예상한 바 있다. 빈패스트는 올해 상반기에 전기차에 대한 사전주문을 받고, 2024년 말까지 미국 내 공장을 건설할 예정이다. 앞서 빈그룹은 "미국 증시 IPO를 위해 빈패스트의 베트남 사업 지분을 소유할 모회사를 싱가포르에 설립했다"라고 지난해 12월 4일 로이터에 밝히기도 했다. 베트남 정부의 IPO 관련 규제를 지키기 위한 조치로 추정된다.
가장 최근에는 싱가포르의 핀테크 스타트업 파인랩스가 이르면 올해 상반기에 미국 상장을 진행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블룸버그는 지난 10일 이 문제에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유명 투자업체 블랙록과 금융거래업체 마스터카드 등의 지원을 받는 파인랩스가 미국 상장 준비를 위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관련 서류를 제공했다고 밝혔다. 파인랩스는 약 5억 달러의 자금 조달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IPO를 통해 기업 가치는 약 55억~70억 달러가 될 수 있다고 전망되고 있다.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가 거래를 담당할 것으로 알려졌다.
동남아시아와 유사하게 많은 인구와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는 인도 역시 뉴욕 주식거래소 관계자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온라인 강의 서비스업체 바이주스(Byju's)는 인도 당국이 해외에 직접 상장하는 것을 막고 있어 SPAC와 합병해 약 40억 달러를 조달하고 480억 달러 이상의 기업가치를 목표로 하고 있다. 로이터는 인도 당국이 인도 기업들도 이러한 방식을 택할 수 있다고 우려하며 해외에 직접 상장하는 것을 허용하고, 3년 내에 인도 증시에서도 상장하도록 하는 안 등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인도에서 이미 상장한 IT업체인 코포지(Coforge)는 이미 지난해 11월 미국 SEC에 IPO를 위한 서류를 제출했다.
한편, 미국 연준이 40년래 고점으로 치솟은 인플레이션을 우려하며 긴축 정책으로 돌아설 수 있다는 점은 우려할 만한 요인이라고 닛케이아시아는 14일 지적했다. 금리가 높아지면 더 안정적인 수익을 원하는 투자자들이 기술주에서 등을 돌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 IPO를 노리는 동남아시아 기업들이 대부분 기술기업이라는 점에서 이는 우려할 만한 요인이라고 밝혔다. 제프리 할리 오안다 수석시장분석가는 "연준이 통화 정책을 정상화하고, 기준금리를 인상하는 과정에서 기술주는 압박을 받을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