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 많은 아이, 자기 이름을 이렇게 풀어내는 김호이(20)는 밝고 맑다. 여기에 끈기와 열정까지 갖췄다. 궁금한 사람 만나서 얘기하는 걸 너무나 좋아하고, 그 사람에게 인터뷰를 하자고 될 때까지 청한다. 그리고 인터뷰 기사를 쓴다.
그는 ‘김호이의 사람들’이라는 인터뷰 전문 콘텐츠 회사 대표다. 아주경제신문 객원 기자 타이틀도 갖고 있다. 중·고교 시절부터 인터뷰 전문 청소년 기자로 이름을 알렸다.
그가 쓴 인터뷰 기사와 유튜브 등 관련 콘텐츠를 꼼꼼히 살펴봤다. 또 놀랐고 한편으론 아쉬웠다. 만나기 쉽지 않은 유명 인사 인터뷰를 8년 동안 무려 300여명이나 해냈다는 데 매우 놀랐다. 다만 이 소중한 인터뷰이(인터뷰 대상자)들을 좀 더 파고 들었으면, 기사에 이런저런 부분을 추가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등등의 아쉬움이 남았다.
"몇 가지 조언을 해도 되겠느냐"고 먼저 정중히 물었고, 흔쾌히 좋다는 답을 들었다. 여러 얘기를 나눠보니 정작 내가 코치를 해주는 것 이상으로 배우는 게 많았다. 인터뷰어(인터뷰를 진행하는 사람) 말고 인터뷰이가 돼보라고 인터뷰를 청했고 즉답을 받았다. 9월 초부터 열흘가량 직접 만나거나 SNS, 전화 등으로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를 만나봤거나 유튜브 동영상으로 본 사람들은 처음에 말투가 너무 어린아이 같아 ‘뭔가 다르다’고 느낀다. 그래서 우회적으로 대학 3학년(극동대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이면 고민할 법한 군대 얘길 꺼냈다. “군대 언제 가요?”, 김 대표는 “저 군대 안 가요. 면제예요. 저 어릴 적 뇌수막염 걸려서 5급 받았거든요”라고 답했다. 궁금증이 풀렸다.
“어릴 때 놀림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이런 제 핸디캡이 되레 인터뷰할 때는 도움이 되더라고요. 많은 분들이 개성 있는 말투라고 말씀해주시거든요, 하하하”
2014년 당시 중학교 2학년 김호이 학생은 첫 인터뷰를 했고 이후 7년 동안 900명 넘는 인물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는 섭외 작업을 했다. 이 중 301명은 실제 인터뷰에 성공했다. 21세 청년이 인터뷰 전문가로 성장해온, 성장 중인 ‘미래 완료 진행형’ 스토리를 들어봤다.
-언제 ‘인터뷰’라는 인생 화두를 만났나요.
"중학교 1학년 기술 과목 선생님께서 ‘특허청 청소년발명기자단’을 알려주셨고, 그때 시작한 청소년 기자가 제 인생의 첫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중2 때인 2014년 박용호 당시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장을 인터뷰한 게 제1호 인터뷰였습니다(김 대표가 보내준 인터뷰이 리스트 엑셀 파일에는 박용호 센터장이 1번, 가장 최근 인물인 2020도쿄패럴림픽 탁구 금메달리스트 주영대 선수가 301번이다).
그때 이후 대전, 대구, 부산 등 전국 각지를 혼자서 다녔어요."
-중학생이 혼자서 인터뷰를 했다고요?
"부모님이 위험하다고 안 된다고 하셨지만 사람을 만나는 게 너무 재밌어서 계속 취재를 다녔습니다. 제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세상에 알리는 걸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죠. 인터뷰 관련 회사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고교(미래산업과학고 발명경영과) 2학년이던 2017년 정식으로 <김호이의 사람들>이라는 인터뷰 전문 콘텐츠 회사를 창업했습니다(아주경제신문은 ‘김호이의 사람들’과 콘텐츠 공급 협약을 맺고 있다).
-말투가 너무 어린아이 같다는 말 듣지 않아요?
"제가 세 살 때 뇌수막염으로 많이 아팠어요. 그래서 보통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죠. 친구들이 많이 놀리기도 했고요. 그런 사람들의 편견에 맞서는 것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인터뷰를 섭외하고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개성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진솔하고 순수한 말투라는 칭찬도 듣고요. 심각한 질문도 제가 하면 해맑게 들려서 그런가 봐요. 하하."
-조심스럽게 물어볼 수밖에 없는데, 장애가 조금 있는 줄 알았습니다.
"장애는 없어요, 저 장애인 아니랍니다."
-인터뷰 섭외하는 게 참 어렵죠.
"10명을 섭외하면 9명은 일단 거절하죠. 저는 거절을 당하면 “100번의 요청 중 한번은 해주겠지”라는 생각으로 계속 시도합니다. 만약 한번 거절을 당했다고 포기했더라면 아마 지금과 같은 인터뷰는 할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요청을 하는 편이에요."
-쉽게 말해 ‘들이대 정신’이군요.
"하하 맞습니다, 들이대! SNS 댓글을 통해서 요청을 하기도 하고 그분이 소속되어 있는 모든 곳에 연락을 해서 인터뷰 요청을 해요. 왜냐면 한 곳만 연락을 했을 때 돌아오는 답변이 없을 수도 있고, 답변이 다를 수도 있거든요. 어떤 곳에서는 어렵다고 했는데 또 다른 곳에서는 인터뷰에 응해주겠다는 답변을 받을 때도 있어요. 그리고 제일 좋은 건 인터뷰를 하고 싶은 당사자에게 직접 요청을 하는 거예요."
-인터뷰 작업이 코로나 이전과 이후 달라진 게 있나요.
"코로나 이전에는 강연이나 사인회에 가서 현장에서 직접 인터뷰 요청을 했었는데 요즘에는 행사가 별로 없어서 주로 이메일이나 전화, SNS를 통해서 요청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강연이나 사인회가 열리면 최대한 가고 있고요."
-사람 만나고 인터뷰하는 게 재밌다. 어릴 때 이런 생각은 할 수 있지만 회사를 차리는 건 먹고사는 문제잖아요. 어떻게 창업을 하게 됐나요.
"아직 제가 먹고살 형편이 안 되는데요 하하. 제가 중학생 때 유명인을 인터뷰하려고 하니깐 다들 “그분들이 너 만나 주겠어? 절대 안 만나줘”라고 했어요. 그런데 실제로 인터뷰에 성공해 만나본 유명인들은 뭐든 안 되는 이유보다는 되는 이유를 많이 알려주더라고요. 내가 한 인터뷰를 통해 사람들에게 안 되는 이유보다 되는 이유를 알려주고 싶습니다. 창업도 마찬가지였어요. 안 되는 이유는 없었답니다."
-요즘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 인터뷰 재밌게 읽었어요. 언제부터 준비한 건지? 김연경 선수는 2년 전부터 접촉했다고 했잖아요.
"김연경 선수 같은 경우에는 단체로 화상 인터뷰를 했는데요, 김연경 선수가 첫 질문자로 저를 지목해서 너무 영광이었어요. 기자들이 많아 질문 못 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시작 전부터 손을 들고 있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인터뷰이는 누군가요.
"가수이자 해밀학교 이사장이신 인순이님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초등학생 때부터 인순이님의 ‘거위의 꿈’을 좋아했는데요, 페이스북 댓글로 인터뷰 요청을 드렸는데 답글로 “내가 인터뷰 해주면 넌 뭘 해주겠냐”고 하시면서 이사장으로 계신 해밀학교에서 토크콘서트를 해줄 수 있냐고 하시는 거예요. 저로서는 영광이었죠. 강원도 홍천 해밀학교로 가서 토크콘서트도 하고 인터뷰도 하고 지금까지도 인연을 이어나가고 있어요. 굉장히 감사한 분이에요."
-인터뷰 자체가 힘들었던 인물은요.
"제가 악동뮤지션을 굉장히 좋아해요. 중학생 때 오디션프로그램에 나올 때부터 봤었는데 인터뷰를 너무 하고 싶었는데 “고등학생과는 인터뷰 어렵다”고 거절당했어요. 그래서 ‘악동뮤지션과 인터뷰가 안되면 부모님을 인터뷰 해보자’는 생각에 아버님이신 이성근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3년 만에 인터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이름 앞에 붙었으면 하는 수식어가 있나요.
"한국의 오프라 윈프리? 하하. 꼭 세계적인 인터뷰어가 되고 싶어요."
-자신의 일에 만족도는 몇 점 줄 수 있나요.
"어, 이 질문 제가 인터뷰 할 때 자주 하는 질문이에요. 저는 5점 만점에 5점이요. 힘들 때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제가 만나고 싶은 분들께 궁금한 걸 여쭤보고 그 질문에 대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잖아요. 그래서 굉장히 매력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요."
-또래 친구, 이 시대 청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
"행복을 나중으로 미루지 마세요. 우리는 행복을 대학 가서, 취업해서, 결혼해서, 애 낳아서, 애 다 키우고 나서, 노후 준비해서 등으로 항상 미뤄요. 근데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거든요. 죽어서 행복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행복은 아이스크림 같아서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녹아버린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좋아하는 일이 있거나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일단 해봤으면 좋겠어요, 후회하지 않게."
2000년 10월 생, 아직 만 20세 청년인 김호이 대표는 2018년 책을 냈다. 제목은 <인생은 호이처럼>. 호기심 많은 아이, 호이 대표의 미래 인생도 '호이처럼' 계속 되길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