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수의 열린경제] 10년내 반도체 재기 ...美, 넌 계획이 있었구나

2021-05-11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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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수 서정대 교수] 




2019년 1월 3일자 타임지에 ‘미국은 어떻게 혁신의 경쟁력을 잃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필자는 월터 이삭슨 튜레인 대학 교수. 이 글은 경쟁력에 빨간불이 켜진 미국 경제의 실상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삭슨 교수의 진단은 이랬다. 지난 50년 동안 미국 경제가 활기를 띤 것은 컴퓨터, 마이크로칩 그리고 인터넷, 이 세 가지의 혁신에 따른 것이고, 이는 정부와 대학, 민간기업 간의 ‘삼각(三角) 동맹’이 연구개발을 공동으로 추진해온 결과다. 예컨대 최초의 컴퓨터는 국방부의 자금 지원, 펜실베이니아 대학과 하버드 대학의 제작 그리고 IBM과 유니백 같은 기업의 상업화로 세상에 선을 보였다.

하지만 이 삼각 동맹에 큰 균열이 생겼고 이게 미국 경제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됐다. 무엇보다 연구개발에 대한 연방 정부의 지원이 크게 줄어들었다. 1976년에만 해도 국내총생산(GDP)의 1.2%였던 것이 2016년에는 0.8%로 급감했다. 실제로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연방 정부의 대학 연구 활동에 대한 지원은 13%나 감축됐고, 트럼프 행정부도 이를 추가로 삭감했다. 민간기업의 연구개발 투자에도 문제가 생겼다. 절대 금액이 늘긴 했지만, 제품 개발과 직결된 연구에만 초점이 맞춰졌을 뿐 기초과학 연구는 소홀히 취급됐다. 단기 투자자들이 수익률 제고를 압박하자 기업들은 오히려 연구소 문을 닫기까지 했다. 미국이 이렇듯 ‘자해 행위’를 하는 사이 중국은 미국의 ‘과거 모델’을 그대로 모방했다. 정부가 연구개발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고, ‘정부+기업+대학’의 삼각 동맹을 가동했다. 인공지능 스타트업에 대한 자금 지원이나 딥 러닝 논문 등 실적에서 중국이 미국을 추월한 건 이같이 엇갈린 양국의 정책 탓이라는 지적이다.

그 결과 한때 글로벌 무대를 주름잡았던 미국 제조업은 내림세를 거듭했다. 성장률(실질 부가가치 기준)이 1990년대의 4.9%에서 지난 20년 동안에는 1.4%로 뚝 떨어졌다. 제조업의 무역적자 폭은 최근 10년 동안 두 배로 급증했다. 최근 핫이슈가 되고 있는 미국 반도체 산업은
제조업의 쇠퇴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컨설팅기업인 매켄지는 지적하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 설계에서는 여전히 세계 선두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차세대 반도체 생산에서는 다른 나라에 뒤처져 있다. 현재 글로벌 반도체 생산량에서 미국의 점유율은 불과 12%에 그치고 있다. 1990년의 37%에서 크게 낮아진 수준이다. 미 반도체 산업의 위상 추락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최근 미국은 반도체 문제에 대해 다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2조 달러 규모의 인프라 투자 방안을 마련하면서 반도체 연구와 생산에 500억 달러를 배정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바이든은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삼성 등 외국 반도체 기업에 미국에 대한 투자 확대를 압박했다. 미 의회도 행정부의 움직임에 보조를 맞췄다. 민주·공화 양당은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기 위한 법안 ‘칩스 포 아메리카(CHIPS for American Act)’를 통과시켰다. 이 법은 향후 5~10년 동안 반도체 제조와 연구개발을 지원하고 장비 구매에 대해 세액공제 혜택을 주는 등 다양한 ‘긴급수혈’ 방안을 담고 있다.
미국이 이같이 ‘거국적’으로 반도체 구하기에 나선 것은 당장은 차량용 반도체의 품귀 현상 탓으로 보인다. 현재 차량용 반도체는 자동차 수요가 예상보다 빠르게 회복되면서 재고가 소진됐다. 이 때문에 자동차 생산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하지만 잘 알려져 있듯이 더 중요한 요인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견제 의지이다. 미국은 반도체를 이젠 경제는 물론 국가안보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자원으로 보고 있다. 미국이 현 상황에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2030년에 미국의 반도체 생산 점유율은 10%로 더 떨어지는 반면 중국의 점유율은 24%로 상승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사물인터넷, 5G, 자율주행차 등으로 가시화될 초연결의 세계에서 ‘산업의 쌀’ 또는 ‘21세기 석유’로 불리는 반도체 패권을 중국이 쥐게 되는 상황은 미국에는 바로 안보 위협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지난달에 나온 미 의회의 조사 보고서는 이 같은 두려움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 보고서는 “중국의 국가 주도 반도체 정책이 성공적으로 시행되면 미국은 기술 리더십을 상실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으로 많은 하원의원과 정책 당국자들이 우려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점에 눈을 돌려야 한다. 현재 미국 정부가 본격화하고 있는 ‘친 반도체 산업’ 정책은 발등의 불로 떨어진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응급대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 정부는 이미 수년 전부터 세밀한 분석과 진단을 통해 반도체 산업의 장기 리더십을 회복하기 위한 중장기 대책을 수립해왔다. 트럼프 행정부의 화웨이 규제 등 대중(對中) 강공이 언뜻 돌출행위로 보이기도 했지만, 그 이면에는 이 정책이 가동되고 있었다. 바이든 행정부가 같은 맥락의 정책 기조를 이어가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와 관련, 2017년 1월에 대통령 과학기술자문위원회(에릭 슈밋 알파벳 회장 등 재계 및 학계 인사 참여)가 백악관에 제출한 반도체 산업 관련 보고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 정책에 청사진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는 미 반도체 산업의 실지회복(失地回復)을 위해 미국이 세 가지 정책을 추진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첫째는 중국에 대한 강력한 견제이다. 이 위원회는 미 행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나 미·중 양국 간 협의체를 통해 중국이 약속한 공정하고 투명한 산업정책을 준수하도록 압박할 것을 권고했다. 동맹국과 연대해 대중 수출 및 투자 규제를 시행하는 방안도 제시됐다. 이는 현재 미국의 정책으로 그대로 가시화되고 있다. 두 번째 정책 제안은 미국 내 반도체 기업을 위한 환경 개선이다. 국내외 인재의 유치 지원, 연구개발 투자 확대, 설비투자에 대한 세액공제 확대 등을 위한 세법개정, 공장 설립 허가 기간 단축 등 세세한 정책이 망라돼 있다. 이번에 미 의회에서 통과된 ‘칩 포 아메리카법’이 이 같은 제안을 상당 부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제안은 더 근본적이다. 과학기술자문위는 데이터 처리 속도를 개선하는 현재의 경쟁은 한계에 직면할 것이라고 보고, 첨단소재과학과 우주기술 등 새로운 영역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문샷 싱킹(moonshot thinking)’을 통해 미국이 초격차의 반도체 리더십을 확보할 것을 주문했다. 또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10년 앞을 내다보는 안목으로 관련 정책을 추진하고 정부와 기업, 학계 간의 협업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보면, 미국은 그동안 반도체 경쟁력의 약화를 가져온 연구개발 투자 감소와 ‘삼각 동맹’ 균열 문제를 해결하는 게 반도체 재기(再起)를 가져오는 길임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실제로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의 공급체인 안전 확보에 대한 행정명령에서 “미국은 항상 반도체 개발의 리더였지만 수년 동안 낮은 수준의 투자를 함으로써 경쟁력을 해쳤다”고 자인했다. 결국 최근 바이든 행정부의 반도체 정책은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단기적 대책이나 중국을 견제하는 데만 초점을 맞춘 정책이 아니다. 10년 앞을 내다보는 장기적 관점에서 주도면밀하게 추진돼온, ‘반도체 르네상스 복원’을 위한 포석이다. 앞으로도 추가 대책이 이어지는 등 관련 정책이 오랜 기간 계속될 전망이다. 미국 반도체 협회(SIA)는 최근 향후 10년 동안 미국 정부의 지원이 지속적으로 이뤄지면 지난 30년 동안 이어져 온 반도체 산업의 하강 추세가 상승세로 반전될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을 내놓았다. 정부와 민간에서 한목소리로 “우린 다 계획이 있다”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반도체는 각기 다른 이유로 각국의 안보 이슈로 떠올랐다. 미국은 향후 글로벌 경제패권을 좌우할 4차 산업혁명 경주에서 반도체가 산업의 ‘혈맥’이 될 것으로 보고 반도체를 국가안보 차원에서 대응하고 나섰다. 반도체 강국의 자리를 노리던 중국은 기술과 장비에 대한 해외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본격화된 미국의 ‘일격’에 초비상이 걸렸다. 우리는 어떤가? 수출의 20%를 차지하는 반도체는 한국 경제에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자칫 대형 리스크를 가져올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는 역설적 상황. 우리에게도 반도체가 경제 안보 이슈인 이유이다. 이런 점에서 당정이 반도체 특별법을 포함해 파격적인 지원 방안에 대한 검토에 들어간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미국이 ‘동맹 연대’를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반도체 장기전’의 깃발을 든 만큼 서두르는 것보다는 포괄적이고 정교한 대책이 마련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정부와 정치권, 민간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한국 경제의 안정적 순항을 위한 중장기적인 반도체 산업정책을 마련했으면 한다. 이 같은 ‘도상 계획’이 세워진 이후 관련 입법이 속도감 있게 이뤄지는 게 좋을 듯하다. 무엇보다 우리도 미국의 경우처럼 정부와 기업, 학계의 ‘삼각 동맹’을 구축하는 등 국가적 총력체제가 가동돼야 할 것이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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