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수의 열린경제] ‘사업보국(事業報國) 2.0’, 질적성장과 지속가능경영으로 시선이 바뀌었다

2021-04-13 18:07
  • 글자크기 설정

[최남수 서정대 교수] 



지난 3월 31일에 열린 제48회 상공의 날 기념식은 정부와 기업의 ‘공통 인식’이 확인된 자리였다. 이날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성장을 불평등, 환경, 안전 등보다 앞세워 왔던 것을 바꿔야 한다며 기업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를 중시하는 따뜻한 자본주의, 이해관계자를 끌어안는 새로운 자본주의, 그리고 지속가능발전을 구체적인 변화의 방향으로 제시했다. 이날 기념식에 앞서 있은 환담에서 대한상의 회장인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문 대통령에게 “경제 회복을 위해 다양하게 기업의 의견을 수렴해 나가겠다”면서 “사업보국을 기업가 정신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이 한국 경제의 대전환을 위해 기업이 큰 역할을 해줄 것을 주문했다면, 최 회장은 기업이 사업을 통해 나라에 보답하는 책임과 역할을 다할 것을 다짐한 것이다.

이날 최 회장의 발언으로 사업보국이라는 기업의 소명이 모처럼 귀환했다. 사업보국이 처음 공식화된 것은 삼성그룹의 창업이념이 담긴 1973년의 ‘삼성 제2차 경영 5개년 계획’이었다. 삼성의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은 사업보국과 인재제일, 합리추구를 그룹의 경영이념으로 제시했다. 이병철 회장은 1987년 한 매체에 기고한 글에서 사업보국에 대한 자신을 생각을 이렇게 정리했다. “인간 사회에 있어서 최고의 미덕은 봉사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경영하는 기업의 사명도 의심할 여지없이 국가, 국민, 그리고 인류에 대하여 봉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에 앞서 1984년에 삼성인력개발원이 펴낸 ‘삼성 이해’는 좀 더 구체적인 얘기를 하고 있다. “기업이 사업 활동을 하는 데는 여러 종류의 관계 분야가 있다. 원료를 구입하는 구입처를 비롯해서 자금을 제공해 주는 주주와 은행, 제품을 사 주는 일반 수요자와 단골 고객, 이 밖에도 지역사회 등 수많은 상대들과 갖가지 형태의 관계를 지니면서 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많은 관계자들을 희생시키면서 자기만의 발전을 꾀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

기업의 목적은 가능한 한 돈을 많이 벌어 주주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내용의 밀튼 프리드먼 독트린이 발표된 게 1970년인데,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기업인이 있었다는 게 흥미롭다. 어쨌든 사업보국을 소환한 최태원 회장 입장에서는 부친인 고 최종현 회장도 실천한 이 정신의 맥을 되살리고 본인이 강조해온 기업의 사회적 가치 창출을 한국 기업이 지향해야 할 새 좌표로 제시하고자 하는 의욕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업보국을 재가동하기 위해서는 한국 기업을 바라보는 사회의 냉정한 시선을 직시해야 한다.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기업인 에델만이 2020년 11월에 한국을 포함한 27개국에서 3만3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1 신뢰지수’ 조사 결과를 보자. 먼저 기업 전반의 신뢰도. 글로벌 평균은 61%이고, 1위는 82%를 기록한 인도이다. 한국은 불과 47%로 맨 뒤에서 셋째에 머물렀다. 에델만은 기업이 불신을 받는 나라로 한국, 일본, 러시아 3개국을 들었다. 또 다른 조사 결과는 더욱 심각하다. 근로자들에게 고용주에 대한 신뢰도를 물었더니 한국은 58%로 27개국 중 꼴찌였다. 글로벌 평균은 76%이고, 1위는 인도네시아(92%)이다. 에델만은 27개국 고용주의 신뢰도를 신뢰·중립·불신으로 분류했는데, 26개국은 모두 ‘신뢰’로 평가된 데 비해 한국만 유일하게 ‘중립’ 판정을 받았다. 조사 대상 고용주는 기업·NGO·정부·미디어인데, 기업 고용주에 대한 평가를 상당 부분 반영하고 있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한국 기업은 왜 이런 평가를 받게 된 것일까? 기업인으로서는 억울한 느낌도 있을 것이다.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고, 해외 시장을 누비고,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냈는데 평가가 너무 박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낙수효과가 사라지면서 기업의 성장이 국민 전반의 삶의 풍요로 연결되지 않고, 양극화가 심화되고, 정경유착 등 부정적 사례가 끊이지 않으면서 기업을 보는 곱지 않은 시선이 형성된 것이다. 기업은 사업보국을 해왔다고 할지 모르지만, 기업 내외부의 시선은 그렇지 않은 상태이다.

이는 결국 과거의 ‘사업보국 1.0’과 앞으로의 ‘사업보국 2.0’이 본질적으로 달라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경제개발 초기에서 중진국으로 오는 과정에서는 성장이 ‘지상과제’로 여겨졌던 만큼 환경 훼손과 인권 침해 등 부정적 측면들이 심각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특히 외환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가 강제 수입되면서 기업은 자본시장의 요구대로 성장을 하고 이익만 많이 내면 된다는 사고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한국 경제가 선진국 그룹에 속한 지금, 성장을 바라보는 시선이 크게 바뀌고 있다. ‘세계행복보고서 2020’은 이와 관련해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이 보고서는 경제개발 수준이 낮은 단계에서는 성장 자체가 국민의 행복도를 높이지만, 국가가 부유해질수록 불평등을 해소하고 환경의 질을 개선하는 등 지속가능한 성장을 하지 않으면 행복도는 정체된다고 진단하고 있다. 다시 말해, 빠른 성장보다는 미래의 성장 잠재력을 훼손하지 않는 건강한 성장이 국민의 행복을 증진한다는 얘기다. 세계경제포럼(WEF)의 클라우스 슈밥 회장도 저서 <위대한 리셋>에서 같은 관점의 주장을 펴고 있다. 슈밥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저성장이 ‘뉴노멀’로 자리잡을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성장에 집착하는 게 유용한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특히 세계 지도자들이 시민과 지구의 행복에 더 집중하고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동안 경제 번영의 지표로서 국내총생산(GDP)에 과도하게 의존한 결과 자연과 사회자원 고갈이라는 문제가 발생했는데, 이제는 이를 치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과거의 ‘사업보국 1.0’은 양적 성장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기업이 추구해야 할 ‘사업보국 2.0’은 질적인 성장과 경영이 될 것이다. 재무적 가치와 같은 비중으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지속가능경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객, 근로자, 거래기업, 지역사회 등 이해관계자를 존중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와 가치사슬 전반에서 환경과 사회, 지배구조를 개선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ESG 경영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유엔이 2015년에 채택한 17개 항목의 지속가능개발목표(SDGs)이다. 맑은 물과 위생, 청정에너지, 불평등 완화, 지속가능한 도시, 책임 있는 소비와 생산, 기후변화 대응, 해양생태계 보존 등이 여기에 포함돼 있다. SDGs는 유엔이 2030년까지 달성하기로 한 의제로 해마다 고위 포럼에서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글로벌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SDGs는 기업 입장에서 보면 사회적 가치 창출이 재무적 가치 못지않게 중요하게 부각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뜻한다. 딜로이트 컨설팅은 “SDGs는 과거 수십년간에 걸쳐 글로벌 자본주의 속에서 구축돼온 현대 기업경영모델의 근간을 뒤흔드는 변화의 요구”라고 규정하고 있다. 특히 SDGs의 개별 항목들은 달성 수준이 높아질수록 삶에 대한 주관적인 만족도도 같이 높이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떨까?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2018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GDP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3개국 중 여섯째로 많고, 근로자 10만 명당 사고 사망자 수는 5.09명으로 넷째로 높다. 반면에 재생 에너지 사용 비율은 가장 낮다. 이 수치는 ‘사업보국 2.0’의 실행을 위해 기업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앞으로 기업들은 SDGs 등에 반영된 사회적 가치 창출을 본업과 분리된, 리스크나 평판을 관리하는 정도로 여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전사 차원의 전략에 적극적으로 포함시켜 생산과 경영 전반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접근이 필수적이다. 사회적 가치가 기업의 존재 목적, 사업, 제품, 서비스에 녹아들 때 건전한 성장 동력이 제대로 작동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지속가능경영을 모범적으로 실행에 옮긴 역할모델 기업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등산 장비와 기능성 의류 제조기업인 파타고니아가 대표적이다. 파타고니아는 환경 문제 해결을 사업 전반에서 제일 우선시하며 견실한 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우량기업이다. 재활용 페트병에서 추출한 섬유로 재킷을 만들고, 유기농 천연섬유와 독성이 적은 염료 등을 써서 의류를 제조하고 있다. 또 보상판매 프로그램을 통해 의류를 되사들인 다음 세탁과 수선을 거쳐 재판매함으로써 제품의 사용 기간을 늘려 자원을 절약하고 있다. 필립스도 빼놓을 수 없는 기업이다. 필립스는 전구 판매량을 극대화하는 종전의 전략을 지양하고 조명의 설치·보수·운영 등 포괄적 서비스를 제공, 제품의 수명을 연장하는 것을 새로운 사업으로 채택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사회와 호흡을 같이하는 ‘사업보국 2.0’을 지향해야 하는 한국 기업들은 이본 슈나드 파타고니아 CEO가 들려주는 경영철학을 경청하고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끝없는 성장을 필요로 하고 자연 파괴에 대해 책임져야 마땅한 자본주의 모델이 반드시 대체돼야 한다고 믿는다. 파타고니아와 2000명의 직원은 옳은 일을 해서 세상에 유익하면서도 수익성이 있는 기업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전 세계 기업들에 입증해 보일 수단과 의지를 갖고 있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