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으로 우리는 사람과의 거리두기에 집중했다. 크게 의식은 못 했지만, 거리두기를 한 게 또 있다. 바로 지폐와 동전이다. 비대면 결제를 주로 하다 보니 현금 쓸 일이 크게 줄어들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현금이 코로나19를 전파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생겼다는 점이다. 실제로 바이러스가 지폐나 주화에서 수일간 생존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까지 했다. 중앙은행에 비상이 걸렸다. 한국은행과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중국 인민은행 등은 일정 기간 지폐를 보관하고 소독이나 살균을 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 같은 유명 관광지는 아예 현금을 받지 않기도 했다. 이래저래 모습을 감춰가는 현금 사용이 팬데믹 기간에 급격하게 감소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디지털화폐(CBDC)를 발행하는 방안에 대한 논의가 활기를 띠고 있다. 아예 현금을 없애고 ‘가상의 돈’을 만들자는 얘기이다. 중앙은행이 주체가 되는 일이어서 ‘빅이슈’이긴 하다. 하지만 아주 새로운 혁신이라고 보기 어려운 점도 있다. 이미 ‘○○페이’ 등을 포함해 우리는 일상에서 디지털 결제에 익숙해져 있다. CBDC는 경제의 디지털화 과정에 뒤늦게 승차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뜻 보면 모든 게 디지털화하는 세상인데,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문제는 CBDC 논의가 다층적(多層的) 측면이 있고, 장점과 더불어 리스크도 적지 않다는 데 있다. 왜 CBDC가 필요한지, 그리고 해외와 차별화된 ‘한국적 CBDC’는 무엇인지에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이렇듯 각국이 CBDC에 발을 담그고는 있지만, 그 속내는 각기 다른 게 현실이다. 가장 대표적이고 표면적인 CBDC 발행의 이유는 현금 사용의 급감이다. 소비자들이 현금 대신 디지털 통화를 선호하고 있으니 중앙은행도 이를 수용하자는 것이다. 대표적인 국가는 스웨덴이다. 스웨덴은 현금 결제 비중이 13.0%(2018년)에 그치고 있다. 현금 결제를 거부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등 ‘현금 없는 사회’를 향해 빠르게 나아가고 있다. 스웨덴 정부는 이를 반영해 2017년부터 디지털 화폐 발행을 위한 ‘e-크로나’ 프로젝트를 실시해 오다가 최근 이를 내년 2월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금액 기준으로 현금 이용 비중은 2017년의 20.3%에서 2019년에는 17.4%로 더욱 낮아졌다. 개인이 지갑 속에 가지고 다니는 현금도 2019년에 5만3000원으로 2년 전보다 2만7000원이나 줄어들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던져본다. 현금 사용이 크게 줄어든 것은 CBDC 도입의 필요충분조건인가? 답은 ‘신중한 접근이 필요함’이다. 한은이 발표한 ‘2019년 지급수단 및 모바일 금융서비스 이용행태 조사 결과’를 보면 60, 70대가 현금을 상대적으로 많이 쓰고, 특히 70대 이상은 현금 사용이 압도적이다. 이들 고령층은 디지털 통화가 나오면 피해가 우려되는 연령층이다. 디지털 활용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은행 계좌가 없는 사람들에게 중앙은행이 직접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금융 포용’이 CBDC의 장점으로 지적되곤 한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 국민이 계좌를 가지고 있는 한국적 상황에선 현실적이지 않다. 오히려 ‘디지털 디바이드’가 더 이슈가 될 수 있다.
CBDC 발행을 추진하는 또 다른 동기를 보여주고 있는 국가는 중국이다. 중국 당국은 먼저 알리페이 등 민간의 디지털 통화가 시장을 주도해 가고 있는 데 대해 견제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 큰 자극은 외부에서 왔다. 때는 2019년 6월. 세계적으로 27억명이 넘는 사용자를 보유한 페이스북이 가상화폐인 ‘리브라’를 발행하겠다고 발표해 각국 중앙은행이 발칵 뒤집혔다. 이 계획대로라면 페이스북 이용자들은 블록체인을 통해 중앙은행이나 상업은행 등 중개 기관을 거치지 않고 리브라를 이용해 자유롭게 해외송금이나 결제를 할 수 있게 될 터였다. 이렇게 되면, 중앙은행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 대규모 자금이 국제적으로 이동하는 게 가능해져 통화정책의 유효성과 통화 주권에 큰 구멍이 생기게 된다. 당시 트럼프 행정부는 페이스북의 계획에 강하게 제동을 걸고 나왔다. 리브라 발행계획은 중단됐다. 페이스북은 최근 규제당국의 우려를 어느 정도 해소한 새로운 가상화폐인 ‘디엠’의 발행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중국으로선 ‘리브라’로 인한 통화 주권 훼손 가능성이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디지털 화폐시장에서 통화 패권을 미국에 내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CBDC 발행을 준비하기 위한 보폭을 빨리 가져간 이유이다. 중국은 내친김에 디지털 위안화의 국제화를 위한 움직임도 본격화하고 있다. 중국은 최근 국제은행 간 금융통신협회(SWIFT)와 디지털 화폐 유통을 위한 합작법인을 설립했다. 의미가 작지 않은 ‘사건’이다. SWIFT는 국제 외환거래에 대한 정보를 은행들과 공유하는 기관이다. 미국 은행들이 국제 결제를 중개해 미국 금융지배력의 핵심축으로 작동해온 기구이다. 중국이 SWIFT와 손잡았다는 것은 달러 패권의 안마당을 들여다본 것이나 다름없다. 중국이 이처럼 빠르게 움직여 가자 느긋하던 미국의 입장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 미국은 종전에는 CBDC는 빨리하는 것보다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하다며 관망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이 ‘화폐 전쟁’을 걸어오는 조짐이 본격화되자 ‘적극 대응’으로 선회하고 있다. 재닛 옐런 재무부 장관은 “중앙은행이 CBDC를 들여다보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긍정적 입장을 나타냈다. 제롬 파월 FRB 의장은 한 발 더 나아가 “디지털 달러 발행은 우선 순위가 높은 일”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미국의 정책 변화는 중국의 공세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것이다.
앞으로 미·중 디지털 화폐 경쟁은 어떻게 진행될까. 앞서가는 중국이 달러 패권에 도전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이는 디지털 위안화에 대한 과대평가라고 생각한다. 디지털 화폐는 국제 거래가 훨씬 용이해서 위안화의 외환시장 거래 비중은 현 수준인 4% 선보다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패권에 근접하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통화 패권은 정책의 속도만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투명하고 신뢰도 높은 통화정책, 화폐가치의 안정, 자본시장의 개방과 내외국인 투자자의 동동 대우 등 제도적 인프라를 갖추는 게 긴요하다. 중국은 이런 점에서 미국에 절대적 열세이다. 아직은 해야 할 숙제가 많다.
한국 입장에서 디지털 원화 발행의 필요성을 가장 크게 느끼게 하는 요인 중 하나는 바로 디지털 달러화와 디지털 위안화의 발행 가능성이다. 국내에서 이들 외국 디지털 통화의 보유가 늘어나면 이는 곧 자금의 해외 유출을 가져와 국내 금융 시스템과 통화정책에 경고음을 울리게 될 것이다. 결국 이에 대한 대응은 대응대로 해나가면서 디지털 원화를 시장에 내놓는 게 불가피한 선택이 될 것이다. 더 적극적 입장에서 보면 디지털 원화를 활용해 그동안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해온 원화의 국제화를 추진할 수 있는 계기로도 삼을 수 있을 것이다.
CBDC 발행은 이점과 문제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빅테크 기업에 집중되고 있는 디지털 결제 시장에서 경쟁을 촉발하고, 재난지원금 같은 재정지출을 금융기관을 거치지 않고 수혜자에게 직접 빠르게 지급할 수 있는 것 등이 장점이다. 반면 디지털 화폐는 프라이버시와 개인 재산권 침해, 은행의 자금 중개기능 약화 등 문제점을 가져올 수 있다. 개인이 한국은행에 계좌를 갖는 식으로 일이 진행되면, 한은이 마음만 먹으면 자금거래를 들여다볼 수 있는 ‘빅브러더’가 될 수 있다. 현금이 사라진 상태에서 마이너스 금리가 부과될 경우, 예금 인출로 이를 피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져 재산권 침해를 둘러싼 분쟁도 예상된다. 특히 은행예금이 한은으로 쏠려 은행의 자금 중개 기능이 취약해질 우려가 있다.
종합하면, 우리 입장에서 CBDC 발행은 충분한 연구 검토와 준비는 하되 서두를 일은 아닌 것같다. 현금 수요가 일정 부분 지속되고 있는 데다 민간의 디지털 화폐가 신뢰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 등 해외의 움직임이 가장 큰 압박 요인인 만큼 추이를 지켜보며 차분하게 대처해 나가야 한다. 국내적으로는 디지털 취약 계층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상당 기간 현금 사용을 병행하고, 프라이버시와 재산권 보장, 금융시장 안정 등을 위한 철저한 대비책이 마련돼야 한다. 무엇보다 왜 CBDC가 필요한지, 그리고 한국만의 차별화된 디지털 화폐는 무엇인지에 대해 충분한 논의 과정을 거치고 이를 통해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게 중요한 선행조건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