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수의 열린경제] 팬데믹의 교훈 '기업가형 국가'에 답이 있다

2021-02-16 20:23
  • 글자크기 설정

[최남수 서정대 교수]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한파(寒波)’. 아무래도 어두운 소식이 많을 때이다. 다행인 것은 도전적인 기업가 정신이 주눅 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최근 통계인 2020년 3분기 창업기업 동향을 보면 새로 문을 연 기업 수가 34만3128개다. 1년 전보다 13.3%가 늘어났다. 경제의 디지털·비대면화에 따라 정보통신업과 도·소매업의 창업이 크게 늘어났다. 제조업 창업도 7분기 만에 증가세로 돌아섰다. 미국도 상황은 마찬가지. 더 이코노미스트지는 최근 보도에서 미국에서의 창업이 데이터 처리 등 IT산업을 중심으로 기록적인 수준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려는 기업가의 촉수는 분주하게 가동되고 있는 것이다.
불황은 ‘동면의 시간’이 아니다. 경제의 새 살이 돋아나는 혁신의 시기이다. 1930년대 대공황으로 가보자. 당시 미국의 생산성은 의외로 매년 1.8%라는 ‘준수한 속도’로 늘어났다. 앨런 그린스펀 전 FRB 의장은 저서 ‘미국 자본주의 역사’에서 엄청난 혁신의 힘이 작용한 덕분이라고 진단한다. 실제로 전화기에서부터 비행기에 이르는 기술적 진보가 이때 일어났다. S-42 비행정이 샌프란시스코에서 호놀룰루까지 3800㎞를 최초로 단번에 주파한 게 1935년이다. 이 시기에 현대적 편의점인 세븐일레븐이 선을 보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듀폰이 나일론을 발명한 것을 비롯해 저밀도 폴리에틸렌, 스티로폼 등 신규 화학제품이 잇따라 개발됐다. 상황이 힘든 만큼 상상력의 힘도 커졌다. 1930년대에 제작된 할리우드 영화는 5000여편에 이른다. ‘백설공주’, ‘오즈의 마법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걸작이 경기침체에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와 휴식의 시간을 주었다. 대규모 재정지출의 활약상이 돋보인 상황 속에서 민간의 활력도 새로운 미래의 싹을 틔워가는 때였다.

이는 팬데믹 위기 속의 경제에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 정부와 민간의 공조와 역할 분담에 대해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전례 없는 바이러스 확산으로 경제의 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가 ‘소방수’로 강력하고 빠르게 등판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취약계층과 소상공인에게 자금을 긴급 수혈하고, 위기에 처한 산업에 ‘자금 파이프라인’을 열어주는 등의 응급조치는 경제의 두 축인 수요와 공급이 붕괴하는 것을 막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이다. ‘큰 정부’가 전면에 나서는 게 정답인 시기이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의 경제 현장은 그렇다고 정부가 경제를 지나치게 압도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자생적으로 숨통을 틔워가고 있는 민간의 혁신이 상승 기류를 탈 수 있도록 정부가 한쪽으로 비켜설 줄도 알고, 이를 측면 지원하는 ‘2선의 역할’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지난해 경제 성적표를 들여다보자. 의미 있는 흐름을 읽을 수 있다. 2020년 실질 경제성장률은 –1.0%. 감소 폭이 훨씬 컸던 다른 나라에 비해 양호한 수준이다. 한국 경제의 선방은 일차적으로는 대규모 재정 투입으로 정부 소비가 5.0% 늘어난 데 힘입은 것이다. 더 중요한 요인이 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기업의 설비투자가 경제 위기의 와중에서도 6.8%나 확대된 게 성장률 급락에 제동을 건 안전판 역할을 했다. 투자는 2018년부터 2년 연속 감소세를 지속했지만, 오히려 팬데믹 충격이 강타한 지난해에 증가세로 돌아섰다. 지난해 경제 성장 내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성장률이 민·관(民官)의 합작품이라는 점을 얘기해주고 있다. 정부가 많은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민간기업의 투자 확대라는 ‘맞장구’가 없었다면 이룰 수 없는 성장률이었다.

결국 ‘큰 정부’의 시대도 민간의 활력이라는 ‘공명(共鳴)’이 울려야 지속가능한 것이다. 더구나 정부가 경기를 떠받치는 것은 무제한 가능하지 않다. 재정지출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과 국가신인도에 대한 영향 등 제약 조건 아래서 운용될 수밖에 없다. 또 언젠가는 재정 건전성을 향해 ‘회군’해야 하는 순간도 다가오게 돼 있다. 지금부터는 경기 회복의 바통을 재정에서 민간으로 넘기기 위한 정책적 노력이 긴요한 이유이다. 이런 점에서 연초에 세계은행이 2021년 경기 전망을 하면서 던진 화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데이비드 맬패스 세계은행 총재는 “팬데믹 영향을 극복하고 투자 확대를 유도하기 위해 각국 정부는 적극적으로 기업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부가 투자 지향적인 개혁을 하지 않는다면 경기 회복은 더딜 것이라는 게 세계은행의 경고이다. 이제부터는 기업이 움직일 수 있게 여건을 혁신하라는 주문이다.

이와 관련해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1933년의 마지막 날에 뉴욕타임스에 실은 칼럼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조언한 내용을 되새겨 봐야 한다. 케인스는 이 공개서한에서 경제 개혁조치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경기 회복을 저해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그 개혁이 산업계의 자신감에 상처를 입히고, 기존의 행동 동기마저 꺾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대표적인 진보적 경제학자인 케인스가 경기를 되살리기 위해 기업의 의욕을 부추길 것을 강하게 권고한 말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해 ‘큰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할까? ‘기업가형 국가’를 그 방향으로 제시해본다. 이 말은 2013년에 마리아나 마추카토 영국 석세스 대학 교수가 내놓은 개념인데, 이를 확대 해석한 방안을 제안해보려 한다. 팬데믹 위기 탈출을 위해 우선적으로 가시화됐으면 하는 ‘기업가형 국가’의 모습은 투자 활성화를 위한 규제 혁신이다. 기업의 반발 속에서 경제개혁 입법을 강행한 만큼 이제는 투자 촉진을 위한 규제 혁파에 나섰으면 한다. 이는 경기도 살리고 새로운 일자리도 만들면서 궁극적으로 재정지출을 줄일 수 있는 ‘일석삼조(一石三鳥)’의 선순환을 가져올 수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평가한 규제 완화의 정도에서 우리나라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보다 더 낮은 순위에 머물고 있다는 점은 곰곰이 되돌아봐야 할 한국 경제의 현주소이다. 한국은행은 산업 평균 기준으로 규제 완화를 10% 하게 되면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이 0.3% 포인트 확대된다고 분석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상품시장 규제가 OECD 국가 중 높은 수준인 만큼 진입 장벽을 완화하는 규제 개혁을 고려해야 한다는 게 한은의 의견이다. 무엇보다 기업의 기를 살리는 분위기 전환이 중요하다.

다음으로 정부는 민간의 혁신을 선도할 수 있다. 마추카토 교수가 그린 ‘기업가형 국가’의 전형이다. 정부는 상대적으로 단기 관점을 가진 기업보다 위험이 큰 혁신 투자에 나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민간이 떠안으려 하지 않는 위험을 감수하고 시장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미국에서 철도에서 나노기술, 제약에 이르기까지 초기에 과감하게 이뤄진 기업가적 투자의 시발점은 국가였다. 특히 인터넷, GPS, 터치스크린 디스플레이, 시리(애플의 음성인식 서비스), 음성 작동 개인 단말기 등 스마트한 기술은 모두 미국 정부의 지원으로 개발됐다. 예컨대 인터넷은 미국 국방부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PRA)이 발명하고 상업화했다. 최근 우리 정부도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을 축으로 한 한국형 뉴딜을 추진하면서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이 같은 정책을 통해 선도적인 기술이 개발되고 이게 민간으로 확산되는 ‘민·관 기업가형 공조모델’이 가동되길 기대해본다.

기업가형 국가는 정부가 기업에 몇 발짝 다가서는 몸짓이다. 기업은 어떻게 변해야 할까? 사회와 잘 소통하고 상생하는 ‘기업 시민’을 그 답으로 제시해본다. 기업 시민은 말 그대로 기업도 사회의 구성원인 ‘시민’처럼 사회를 향해 법적·윤리적·경제적 책임을 다하는 개념이다. 요즘 국내외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와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단기적 주주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을 기업의 목적으로 보는 주주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양극화 심화 등 폐해로 인해 공감대를 잃은 상태이다. 이제 기업은 고객, 근로자, 거래 기업, 지역사회 등 이해관계자를 중시하는 경영을 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최근 ESG가 강조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ESG는 글로벌 비즈니스의 ‘드레스코드’가 될 전망이다. 환경을 훼손하고, 이해관계자의 권익을 외면하고, 지배구조가 불투명한 기업은 글로벌 무대에 서기 어렵거나 많은 불이익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투자자들이 기피하고, 자금조달 금리가 올라가고, 기업가치가 떨어지는 등 비용을 치르게 될 것이다. ESG는 종전의 CSR(사회적 책임활동)처럼 평판 개선을 위해 하는 ‘선택 사양’이 아니라 기업이 생존하고 성장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돼가고 있다.

팬데믹 이전과 이후는 본질적으로 다른 세상이다. 과거의 틀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만큼 오래된 사고와 행동의 관성을 끊어내야 한다. 발상의 대전환을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기업가형 국가와 기업 시민의 새로운 ‘접속’은 한국 경제가 위기를 돌파하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신 민·관 공조시대’를 열어가는 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