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을 위한 행진곡은 계속되리...故백기완 선생 일대기

2021-02-15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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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옥중 작시 작품이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농민·민주화 운동에 투신...'달동네' 등 창시하기도

온통 추모 물결...외국에 퍼지는 '임을 위한 행진곡'

"앞서서 나가니 산 자는 따르라('임을 위한 행진곡' 중에서)"

집회 등의 현장에서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은 지난 1981년 처음 소개됐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주제로 하는 노래극에 삽입된 이후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국 민주화운동을 대표하는 민중가요로 자리잡았다. 가사의 뼈대를 만든 이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다. 일찌감치 농민·통일·민주화운동 등에 투신한 백 소장은 이 곡이 흘러나오는 현장에 대부분 함께 하면서 민중을 위로했다. 백 소장이 향년 89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는 소식에 아쉬움과 슬픔의 추모가 이어지는 이유다.
 

지난 2012년 1월 서울 갈월동 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인권보호센터)에서 열린 고 박종철 열사 25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사진=연합뉴스]


◆민족운동 지도자로 늘 현장에 있었던 '큰 선생님'

'임을 위한 행진곡'의 원작은 '묏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이다. 백 소장이 YM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서대문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1980년 12월 지은 장편시다. 1979년 벌어진 YMCA 위장결혼식 사건은 유신헌법에 따른 간선제를 저지하기 위해 결혼식을 위장해 진행한 집회다. 40대 중반이던 백 선생은 이 사건으로 모진 고문을 당해 건강을 크게 잃으면서도 재야 운동의 든든한 버팀목임을 과시했다.

1932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에서 태어난 백 소장은 1950년대부터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64년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계기로 통일민주화운동의 싹을 틔웠고, 1974년에는 유신헌법 반대를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해 긴급조치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후 YMCA 위장결혼식 사건과 1986년 `부천 권인숙양 성고문 폭로 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잇따라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다. 

현장의 '큰 선생님'으로서 백 소장이 적극 활동한 데는 집안의 영향을 상당 부분 받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백 소장의 조부는 3.1 운동 당시 수천장의 태극기를 제작, 배포하는 등 민족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독립군에 군자금을 대주다가 일경에 발각돼 고문 끝에 옥사하기도 했다. 백 소장의 부친은 기자출신으로 청년운동을 주도하면서 가난한 농민들을 돌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987년 12월 동교동에서 김대중 평민당 후보와 회담에 앞서 악수하는 당시 백기완 후보 모습 [사진=연합뉴스]


백 소장은 백범 김구 선생과도 깊은 인연을 맺는다. 백범이 1898년 치하포 사건(황해도 치하포 지역에서 일본인을 살해한 사건)으로 수감됐다가 탈옥했을 당시 백 소장의 조부가 백범을 피신시키고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 서울에서 백범을 만난 이후 백 소장은 백범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백 소장은 1972년 백범사상연구소를 설립해 '백범어록' 등을 출간했다. 

민중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은 백 소장은 정치 활동에도 적극 나선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처음 치르는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는 재야운동권 대표자로 독자 입후보했지만 야권 후보 단일화 등을 촉구하면서 중도 사퇴했다.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재야운동권의 독자 후보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1984년 통일문제연구소를 설립해 민주화운동 관련 책자를 발간했고 스스로도 작가로 활동했다.

◆달동네·동아리·새내기...언어 독립 꿈꾼 인도주의자 

백 소장은 파란만장했던 20세기를 거쳐 비교적 최근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했다. 2017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집회 등에도 자주 모습을 비쳤다. 젊은시절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순우리말 찾기 운동도 더욱 활발하게 이어왔다. '달동네'(산등성이나 산비탈 따위의 높은 곳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 '동아리'(같은 뜻을 가지고 모여서 한패를 이룬 무리·'써클'의 대체어), '새내기'(대학이나 직장 등에 새로 갓 들어온 사람) 등이 백 소장의 노력으로 자리 잡은 우리말이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백 소장이 순우리말로 지은 '갯비나리'라는 시는 2019년 창악음악극 '쪽빛의 노래'를 제작하는 데 일조했다. 국립국어원과 진행한 생전 인터뷰를 통해 백 소장은 "우리말의 심미성을 강조하기보다 우리말을 꼭 써야 하는 이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수천년동안 사용해온 우리말은 곧 인류의 문화와 문명이어서 우리말이 사라지면 문화와 문명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한국 민주화 역사의 산 증인으로서 여든이 넘은 나이로도 왕성한 활동을 벌였지만 시간과 세월은 더 이상 백 소장의 편이 아니었다. 지난 2018년 4월 심장병 수술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후 폐렴 증상 등이 겹쳐 투병 생활을 이어오다 지난 2월 15일 새벽 4시께 영면에 든 것이다.
 

15일 향년 89세를 일기로 별세한 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의 생전 모습 [사진=연합뉴스]


추모 물결도 이어지고 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이정미 전 정의당 대표, 이재명 경기도지사 등이 페이스북 등을 통해 추모의 뜻을 전했다. 김원웅 광복회장,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예비후보 등은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빈소를 찾아 조문하기도 했다. 

백 소장의 손에서 잉태된 '임을 위한 행진곡'은 한국뿐만 아니라 홍콩, 캄보디아, 태국 등 외국에서도 종종 울려퍼지고 있다. 한국에 파견됐다가 귀국한 이주노동자들을 통해 각국 노동운동 현장에 퍼지면서다. 지난 2019년 홍콩 민주화시위 현장에서 현지어로 번안된 데 이어 최근 군부 쿠데타에 맞서 총궐기에 나선 미얀마 시위현장에서도 이 곡이 흘러나오는 장면이 공개되기도 했다.

한국 민주사회화 운동의 대표자는 이제 별이 됐지만 임을 위한 행진곡은 앞으로도 민중들을 위로하면 전 세계에 울려퍼질 전망이다. 백 소장의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실에 차려졌다. 발인은 19일 오전 7시다.
 

[그래픽=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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