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론과 얼나신관(神觀)의 혁명
기독교에서 정립해온 신관(神觀)은 무엇인가. 논란이 없지 않지만, 기독교 신관은 유일신관(唯一神觀), 삼신관(三神觀), 삼위신관(三位神觀)으로 나눠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삼위일체론으로 정리되는 삼위신관부터 보자. 성부(聖父)인 하느님과, 성자(聖子)인 예수, 그리고 하느님의 영(靈)인 성령을 가리키는 3위(位)를 각각 인정하면서 저마다 여호와 하느님으로 보는 관점이다. 삼신관은 이 세 가지 존재를 인정하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의 성령이며 성자일 뿐으로 사실은 한 존재라고 본다. 유일신관은, 성자와 성령의 별도 존재를 부인하며 오직 하느님만이 존재한다고 믿는 관점이다. 기독교는 유일신의 관점에서 삼위일체의 신의 관점으로 교리를 정비해왔다고 할 수 있다.
구약에서는 하느님을 '유일신'으로만 표현하고 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느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 6:4)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느님이시라”(왕하 19:15)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나와 함께한 자 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사 44:24)
'오직(唯) 하나(一)인 여호와(神)'에서, 유일신 사상이 정립된다. 그런데 '하나'의 참뜻은 무엇인가. '하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에하드(ehad)와 야히드(yahid)가 있다. 야히드는 '유일한(only)' 하나를 의미하지만, 에하드는 '서로 같은(同)' 존재로서의' 하나를 의미한다. '우린 하나다'라고 할 때의 '하나'다. 동일한 존재, 서로 통하는 존재, 운명을 같이하는 존재가 바로 '하나'다. 그런데, 오직 하나인 여호와를 말하는 히브리어는 '에하드'였다. 즉 성자인 인간과 그가 받은 하느님의 성령까지도 포함할 수 있는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삼위일체론은 이런 근거로 힘을 얻는다.
삼위일체론이 신관의 핵심으로 등장하는 것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에서였다. 예수는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이지만, 성령을 받은 인간으로 하느님과 동위(同位)를 지니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그가 전달한 복음은 바로 하느님의 복음 그 자체이며, 그를 일으킨 성령 또한 하느님과 다를 수 없다. 즉 '삼위일체' 기독교 신관은, 인간에게 다가온 신 즉 예수에 관한 관점을 체계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계는 예수가 신격을 지닌다는 점을 교리화(敎理化)하기 위해 삼위일체론을 채택했지만, 류영모는 이 관점의 빈틈을 발견한다. 예수라는 존재는 인간의 육신과 성령을 지니고 있으며, 예수의 신성(神性)은 오직 성령에서만 발휘되는 것임을 놓친 것이다. 예수의 몸과 성령을 분리해서 생각해야 신관(神觀)이 엄밀해질 수 있다. 예수는 성령을 지닌 인간, 즉 '얼(성령)+나(인간)'의 차원이 하느님과 동위인 존재다. 하느님과 '하느님+얼'과 '하느님+얼+나'로 확장하는 것이 삼위일체의 참된 양상이다.
기존의 기독교 교리는, 예수의 '몸+나(인간)'에 대한 투철한 관점을 지니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다. 류영모의 '얼나신관'은 이런 점에서 정밀하며 혁신적이다. 예수가, 몸나와 얼나라는 양가적(兩價的) 존재성을 지녔다는 것이 왜 중요하냐면 그 존재 조건은 모든 인간이 신에게서 부여받을 수 있는 구원과 귀일(歸一)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전한 복음은, 모든 인간은 예수와 같이 '얼나'로 거듭날 수 있다는 신의 사랑의 편지이기 때문이다. 다석은 삼위일체 신관을 '얼나 신관'으로 새롭게 조명했다. 하느님은 얼나이며, 예수도 얼나이며 성령도 얼나이다.
기존의 기독교 교리는, 예수의 '몸+나(인간)'에 대한 투철한 관점을 지니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다. 류영모의 '얼나신관'은 이런 점에서 정밀하며 혁신적이다. 예수가, 몸나와 얼나라는 양가적(兩價的) 존재성을 지녔다는 것이 왜 중요하냐면 그 존재 조건은 모든 인간이 신에게서 부여받을 수 있는 구원과 귀일(歸一)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전한 복음은, 모든 인간은 예수와 같이 '얼나'로 거듭날 수 있다는 신의 사랑의 편지이기 때문이다. 다석은 삼위일체 신관을 '얼나 신관'으로 새롭게 조명했다. 하느님은 얼나이며, 예수도 얼나이며 성령도 얼나이다.
신의 존재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류영모는 '무유(無有, 없이계심)신학'으로 신의 존재에 대한 2천년 논란의 가닥을 잡았다. 그러나 또 다른 의문이 다가선다. 신이 존재함을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심연으로 던지는 로고스의 돌팔매질이었고 신의 존재에 대한 줄기찬 회의(懷疑)의 일단이었다.
류영모는 어떻게 풀어나갔을까.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과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같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다. 신이 켕긴 것이다. 없다는 마음도 켕기는 것이며 있다는 마음도 켕기는 것이다. 왜 이런 마음이 어딘가를 내내 기웃거리고 있는지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 죽으면 아무것도 없고 그냥 사라질 뿐이라는 그 마음도, 그 없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눈이 있다. 지금도 있고 지금까지도 있었고 나중에도 있다. 그는 이런 비유를 쓰기도 했다. 신은 '사랑'의 원형이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는 것은, 남자에게 여자가 보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며 여자에게 남자가 보이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다. 남자 속에 이미 여자의 무엇이 있기에 그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여자 속에 남자의 무엇이 있기에 그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한번도 이성을 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이미 그 마음에는 이성을 알고 있는 나의 접수창구가 있다. 인간은 생명을 잇는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이미 마음속에 그 '지향'을 지니고 있다.
누가 그것을 넣어준 것인가. 누가 이성을 그리워하도록 한 것인가. 이성을 그리워 하는 내 안의 디폴트의 정체는 무엇인가. 우린 그게 당연히 나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하는 것도 아니며 나의 전부도 아니다. 그런데 그게 사랑이란 감정을 자아내고, 인간을 뒤흔든다. 이성의 이데아를 지니고 이성을 향한 지속적 관심과 에너지를 지닌다. 밖에 있는 어떤 대상을 향한, 안의 이 조응능력과 관계의지는 대체 어떻게 외삽된 것인가. 그건 알기 어렵지만, 그게 있다는 것은 안다. 그게 결코 없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안다. 신은, '나'라고 할 수 없지만 신과의 접속을 담당하는 자신 안의 '영적인 지향(설명되지 않는 움직임이라서 이렇게 표현했다)'이 있다. 이 지향이 신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류영모는 이 점을 포착해 논증했다.
"하느님이 계시느냐고 물으면 나는 없다고 말한다. 하느님을 아느냐고 물으면 나는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이 머리를 하늘로 두고 산다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또 사람의 마음이 하나를 그린다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 내 몸에 선천적인 본능인 육욕이 있는 것이 이성이 있다는 증거이듯이, 내 맘에 하나를 그리는 신망(信望)이 있는 것은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바라고 그리는 전체의 거룩한 님을 나는 하느님이라고 한다." [다석어록]
하느님은 누구인가
기독교가 동양으로 건너오면서, 신은 불가피하게 신원 조회의 과정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유태인이라는 특정 민족의 신, 혹은 서구인이라는 특정지역 사람들의 신을, 그 신의 존재조차 낯선 동양인이 '신인(神人)' 사이의 '하나'라는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그 하느님'이 '우리 하느님'일 수 있느냐는 의문이었다.
기독교가 세계화 과정을 거치면서, '신'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 신과의 결합을 목표로 하는 인간 대상은 확장되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신은 보다 보편적인 인간무리 즉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신앙적 결속 관계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포함되어 있는 삼위일체론의 동일체인 '하나'는, 동양인에게도 똑같은 자리를 내줘야 하는 상황이 된 셈이다. 새로운 신을 만난, 새로운 신앙인들은 신에게 질문했다. 하느님 당신은 누구시며, 당신에게 우리는 무엇이냐고.
이 질문은, 서구를 떠난 낯선 곳에서 신앙의 본질을 심문하는 것이 되었다.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식 기독교'를 창안하여, 일본과 예수를 병치하는 두 개의 J(Jesus & Japan) 사상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 땅에서도 조선 기독교라는 개념을 두고 논쟁을 벌인 바 있다. 어쩌면 어이없어 보이는 이 문제의식 속에는, '인격신(人格神)'으로 형상화되어온 서구 종교사가 숨어있기도 하다. 류영모는, '인격신 하느님'을 철저히 타파했다. 거기에 그는 절대무(絶對無)라고 할 수 있는 '허공(虛空)'을 호출했다. 그는 허공을 하느님이라고 단언했다.
이 질문은, 서구를 떠난 낯선 곳에서 신앙의 본질을 심문하는 것이 되었다.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식 기독교'를 창안하여, 일본과 예수를 병치하는 두 개의 J(Jesus & Japan) 사상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 땅에서도 조선 기독교라는 개념을 두고 논쟁을 벌인 바 있다. 어쩌면 어이없어 보이는 이 문제의식 속에는, '인격신(人格神)'으로 형상화되어온 서구 종교사가 숨어있기도 하다. 류영모는, '인격신 하느님'을 철저히 타파했다. 거기에 그는 절대무(絶對無)라고 할 수 있는 '허공(虛空)'을 호출했다. 그는 허공을 하느님이라고 단언했다.
허공신관(虛空神觀)은, 서구 기독교의 본질을 돌이키며 신의 주소부터 새롭게 재정립하려는 혁명적 사유다. 이 점을 읽어야, 류영모 사상의 줄기를 제대로 살필 수 있다. 서구 기독교에서는 대체로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구체적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류영모는, 그 질문이 생략되는 바람에 기독교의 신이 고대 유럽의 인격신(人格神) 신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런 신관이 신에게 세상의 문제에 관한 해법을 제시하게 하는 기복(祈福)으로 빠졌다고 보았다. 종교 세속화의 원인이, 신에 대한 '뚜렷한 존재 인식' 부재에서 왔다는 것을 통찰했다.
류영모의 허공신관
허공은 허(虛)와 공(空)으로 이뤄진 말이며, 여러 가지 다른 의미로 쓰여 오해가 많은 말이기도 하다. 허공 자체는 인간이 존재하는 대지 위의 빈 공간을 말하는 것으로, '하늘'이란 말과 겹치는 점이 있다. 우주라는 말로도 쓰인다. 그러나 반드시 그것만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며, 다양한 빈 곳을 가리킨다. 공(空)과 허(虛)의 의미는 상당한 유사성이 보인다. 두 낱말은 모두, 채워져 있는 상태를 전제하면서 이를 부정한다. 즉 비어있음은 비어있지 않은 것에 대한 상대적 개념이다. 공(空)과 대립되는 말로 충(充)이나 만(滿)을 상정하기도 하나, 사실은 비어있음의 반대가 가득 차 있을 필요는 없다. 비어있지 않은 모든 상태가, 비어있음에 대립된다고 할 수 있다. 공과 대립되는 말은 정확하게는 비공(非空)이다. 공(空,비움)과 만(滿, 채움) 사이에는 우주만물의 대부분을 이루는 중간 과정이 다 들어있다. 공(空)은 실상의 개념이 아니라 관념을 가리키는 말일 수 있다. 가상적으로 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허(虛) 또한 공(空)과 비슷해 보이지만, 허는 공보다 덜 철저히 비운 듯한 뉘앙스가 있다. 허는 주로 실(實)과 대립하는데, 이때 허는 명목뿐인 겉을 말하고 실은 명목에 걸맞은 속을 지닌 것을 의미한다.
공(空)의 본질에 대해 정확히 표현한 사람은 바로 부처다. 지금 꽉 차 있어서, 있음으로 보이는 것을 부처는 색(色)이라고 했다. 상대세계의 모든 존재는 색이다. 색은 모든 물질을 말한다. 그런데 색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공(空)이다. 텅 빈 것과 다름없다. 왜 그런가. 색으로 되어 있는 것은, 물질들이 잠정적으로 결합해있기 때문이다. 시간이나 상황이나 공간에 따라 해체될 수 있고 그 형상과 빛깔과 특징이 사라질 수 있다. 왜 그런가. 모든 물질은 그것 자체가 본래의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잠시 모여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본무자성(本無自性)이라고 했다. 본질적으로 그 스스로가 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언제든지 흩어져 공(空)이 될 수 있는 존재다. 이것이 부처의 공관(空觀)이다.
상대세계에서 무(無)를 발견한 사람은 노자다. 그는 유무상생(有無相生)을 말했다. 상대세계(물질세계)는 철저히 대립쌍의 세계라고 했다. 그릇 속의 비어있는 곳을 무(無)라고 하고, 그릇의 실체를 이루는 것을 유(有)라고 볼 때, 그릇의 실체는 비어있는 곳 때문에 유용성을 지닌다. 비어있는 곳이 없다면 그릇은 소용이 없다. 그릇의 실체가 없으면, 그릇이 있다고 할 수 없다. 빈 곳과 실체가 모두 있어야 그릇이 있는 셈이다. 유무는 상생하는 것이 진리다. 그는 무(無)가 없는 것이 아니며, 유용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런 동양적인 사유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공[一切皆空]이며 모든 무(無)는 유(有)와 상생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공(空)과 무(無)는 상대세계를 이루는 요소로 인식되었다. 이런 관점은 상대세계의 인식과 관점을 넓혀놓았지만, 상대세계 바깥의 진짜 공과 무에 대한 생각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류영모는 이들과 달리, 상대세계의 대립쌍으로 존재하지 않는 절대세계의 허공과 무를 가리켰다. 대립쌍으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방식은 '차원(次元)'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상대세계와는 다른 차원으로 존재하는 절대세계의 무를 그는 '절대무(絶對無)'라고 불렀다. 상대세계의 시공(時空)관념을 따르지 않는 '단일허공'이라고도 했다. 류영모는 허공을 '빈탕한데'라는 인상적인 용어로 규정했다. 단순히 허공을 공간이나 시간으로 인식한 것을 표현한 말이 아니라, 인간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위치개념처럼 여겨지는 낱말이다. 그가 표현한 '제계(저기그곳)'와도 통하는 말이다.
신의 존재성은 절대허공으로 표현되며, 상대세계와는 다른 '차원'이다. 우리가 그 차원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상대세계에 실체로 존재할 수 없는 '점(點)'을 인식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점은 '긋'이며 단일허공이다. 단일허공은 상대세계까지 포함한다. 그것을 면밀히 규명할 수 없으나, 신의 인간아들로 온 예수가 그것을 입증했고 신의 메신저인 예수를 통해 모든 인간이 신과 접속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 받았다. 그 접속할 수 있는 기호가 바로 '얼나'다. 얼나는 단일허공이 상대세계로 틈입한, 신의 얼굴이다. 신은 허공 자체이다. 이것이 류영모의 '허공신관'이다. 신은, 차원이 다른 '빈탕한데'에 존재한다. 상대세계를 벗어난 절대세계를 이토록 뚜렷하게 그려낸 신학자는 지금껏 어느 누구도 없었다.
집필 = 이상국 논설실장
감수 및 자문 =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류영모의 허공신관
허공은 허(虛)와 공(空)으로 이뤄진 말이며, 여러 가지 다른 의미로 쓰여 오해가 많은 말이기도 하다. 허공 자체는 인간이 존재하는 대지 위의 빈 공간을 말하는 것으로, '하늘'이란 말과 겹치는 점이 있다. 우주라는 말로도 쓰인다. 그러나 반드시 그것만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며, 다양한 빈 곳을 가리킨다. 공(空)과 허(虛)의 의미는 상당한 유사성이 보인다. 두 낱말은 모두, 채워져 있는 상태를 전제하면서 이를 부정한다. 즉 비어있음은 비어있지 않은 것에 대한 상대적 개념이다. 공(空)과 대립되는 말로 충(充)이나 만(滿)을 상정하기도 하나, 사실은 비어있음의 반대가 가득 차 있을 필요는 없다. 비어있지 않은 모든 상태가, 비어있음에 대립된다고 할 수 있다. 공과 대립되는 말은 정확하게는 비공(非空)이다. 공(空,비움)과 만(滿, 채움) 사이에는 우주만물의 대부분을 이루는 중간 과정이 다 들어있다. 공(空)은 실상의 개념이 아니라 관념을 가리키는 말일 수 있다. 가상적으로 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허(虛) 또한 공(空)과 비슷해 보이지만, 허는 공보다 덜 철저히 비운 듯한 뉘앙스가 있다. 허는 주로 실(實)과 대립하는데, 이때 허는 명목뿐인 겉을 말하고 실은 명목에 걸맞은 속을 지닌 것을 의미한다.
공(空)의 본질에 대해 정확히 표현한 사람은 바로 부처다. 지금 꽉 차 있어서, 있음으로 보이는 것을 부처는 색(色)이라고 했다. 상대세계의 모든 존재는 색이다. 색은 모든 물질을 말한다. 그런데 색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공(空)이다. 텅 빈 것과 다름없다. 왜 그런가. 색으로 되어 있는 것은, 물질들이 잠정적으로 결합해있기 때문이다. 시간이나 상황이나 공간에 따라 해체될 수 있고 그 형상과 빛깔과 특징이 사라질 수 있다. 왜 그런가. 모든 물질은 그것 자체가 본래의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잠시 모여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본무자성(本無自性)이라고 했다. 본질적으로 그 스스로가 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언제든지 흩어져 공(空)이 될 수 있는 존재다. 이것이 부처의 공관(空觀)이다.
상대세계에서 무(無)를 발견한 사람은 노자다. 그는 유무상생(有無相生)을 말했다. 상대세계(물질세계)는 철저히 대립쌍의 세계라고 했다. 그릇 속의 비어있는 곳을 무(無)라고 하고, 그릇의 실체를 이루는 것을 유(有)라고 볼 때, 그릇의 실체는 비어있는 곳 때문에 유용성을 지닌다. 비어있는 곳이 없다면 그릇은 소용이 없다. 그릇의 실체가 없으면, 그릇이 있다고 할 수 없다. 빈 곳과 실체가 모두 있어야 그릇이 있는 셈이다. 유무는 상생하는 것이 진리다. 그는 무(無)가 없는 것이 아니며, 유용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런 동양적인 사유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공[一切皆空]이며 모든 무(無)는 유(有)와 상생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공(空)과 무(無)는 상대세계를 이루는 요소로 인식되었다. 이런 관점은 상대세계의 인식과 관점을 넓혀놓았지만, 상대세계 바깥의 진짜 공과 무에 대한 생각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류영모는 이들과 달리, 상대세계의 대립쌍으로 존재하지 않는 절대세계의 허공과 무를 가리켰다. 대립쌍으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방식은 '차원(次元)'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상대세계와는 다른 차원으로 존재하는 절대세계의 무를 그는 '절대무(絶對無)'라고 불렀다. 상대세계의 시공(時空)관념을 따르지 않는 '단일허공'이라고도 했다. 류영모는 허공을 '빈탕한데'라는 인상적인 용어로 규정했다. 단순히 허공을 공간이나 시간으로 인식한 것을 표현한 말이 아니라, 인간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위치개념처럼 여겨지는 낱말이다. 그가 표현한 '제계(저기그곳)'와도 통하는 말이다.
신의 존재성은 절대허공으로 표현되며, 상대세계와는 다른 '차원'이다. 우리가 그 차원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상대세계에 실체로 존재할 수 없는 '점(點)'을 인식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점은 '긋'이며 단일허공이다. 단일허공은 상대세계까지 포함한다. 그것을 면밀히 규명할 수 없으나, 신의 인간아들로 온 예수가 그것을 입증했고 신의 메신저인 예수를 통해 모든 인간이 신과 접속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 받았다. 그 접속할 수 있는 기호가 바로 '얼나'다. 얼나는 단일허공이 상대세계로 틈입한, 신의 얼굴이다. 신은 허공 자체이다. 이것이 류영모의 '허공신관'이다. 신은, 차원이 다른 '빈탕한데'에 존재한다. 상대세계를 벗어난 절대세계를 이토록 뚜렷하게 그려낸 신학자는 지금껏 어느 누구도 없었다.
집필 = 이상국 논설실장
감수 및 자문 =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