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로 이끄는 뜻이 한글에 있다 하셨죠

2021-02-17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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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⑤ 이정배 교수 <上>

고층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선 서울에서 인사동 삼청동 부암동 같은 곳은 그나마 옛 모습을 간직한 동네다. 한양도성 성곽이 지나가고 사소문(四小門) 중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이 자리 잡고 있다. 부암동에는 김환기 미술관, 윤동주 문학관, 석파정 서울미술관, 젓가락 갤러리 ‘저집’ 등 문화 명소가 많다. 고풍스런 동네에 눈발이 날리니 분위기가 더 살아나는 것 같다. 윤동주 문학관 옆에 차를 세우는데 이정배 교수가 우산을 들고 마중 나와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교수의 집은 문학관에서 멀지 않았다. 대문에서 안채로 이르는 가파른 돌계단이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 교수 집 2층 창밖으로 부암동의 푸근한 설경(雪景)이 액자 그림 처럼 내다보였다. 이 모습을 놓치기 아까운 듯 인턴기자가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 교수가 고창의 윤정현 신부가 보낸 것이라며 곶감을 내놓았다. 고영재 부근 야산의 감을 따서 깎고 말려 보낸 정성이 대단하다. 릴레이 인터뷰 1호가 3호에게 보낸 곶감이다.
다석은 수를 좋아하고 셈을 즐겼다. ‘호암(문일평)이 52세(1만8545일)로 가시니 나보다 627일 먼저 나시었다.’(다석이 쓴 추도문) 다석은 이런 식으로 숫자 기록을 많이 남겼다.
-윤정현 신부, 이 교수 그리고 인터뷰어가 공교롭게도 모두 1955년생 양띠입니다. 다석이 지금 살아있으면 132세였을 텐데요. 55년생인 우리 나이의 딱 두 배가 132네요. 다석도 숫자 계산을 하다가 기묘한 우연을 발견하면 즐거워했습니다.
“다석을 공부하는 우리가 지금 다석 나이의 절반, 그러니까 다석의 허리춤 정도에 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다석은 ‘나만 따르라’ ‘추종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길 삼아, 다리 삼아 한 번 건너라’고 했습니다. ‘나의 허리춤을 잡고 씨름하라’는 의미로 새기고 싶습니다.
-2020년, 작년이 정년이었군요. 정년 4년 반을 앞두고 학교를 떠났더군요.
“31살에 교수로 부임해 30년을 재직했기에 남들 할 만큼 충분히 일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학내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학생들 편에서 학교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지요. 교수직 사퇴를 배수진으로 치고 학교 당국과 씨름하고 갈등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누군가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세월호가 주는 충격이 컸습니다. 강단 신학자로만 학교에 머무는 것이 제 양심에 허락지 않았죠. 국가와 교회 공동체의 문제에 우리가 뛰어들어서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겸사겸사 몇 가지 이유가 겹쳐 일찍 나오게 되었습니다.”
 

다석의 묘소는 둘째 아들 자상이 꾸리던 강원도 평창의 농장 인근에 있다. 다석은 화장을 하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아들들이 듣지 않고 묘소에 모셨다. 다석 부부 합장묘를 참배한 이정배 이은선 교수 부부. [사진=이정배 교수 제공]



그의 저서 <빈탕한데 맞혀놀이>의 도입부에 자전적 이야기들이 들어있다. 서울에서 사업을 일구었다가 실패한 아버지가 고향으로 가기 싫어 처가가 있는 충북 보은으로 이사 갔다. 그렇지만 자식들은 서울로 보냈다. 누나는 이화여대에 다녔다. 그는 영락교회 재단인 대광 중고교에 다니다 기독교를 접했고, 누나와 친구들의 영향으로 감리교신학대학에 들어갔다.
“저희 집안은 전통적 유교 집안입니다. 아버님은 제사를 지내면서 울기까지 할 정도로 조상들에게 죄의식 같은 것을 가지고 살아가던 분이었지요. 나는 그런 배경에서 대광중고교를 다니면서 기독교를 알게 돼 감리교 신학대학에 갔어요. 김리교 신학대학 학생들 중에 목사 장로의 아들 딸이 많았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자녀는 나를 포함해 몇 사람 없었던 것 같았어요. 생각만큼 학교 공부가 재미없었습니다. 학교를 떠날 생각을 하던 차에 대학 3학년 무렵 스위스 바젤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변선환 교수를 만났죠.
그 당시 나는 기독교 교리에 깊이 빠져서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데, 그럼 우리 부모님은 어떡하나…”라는 고민이 컸습니다. 그런데 변 교수가 새로운 신학 사조를 알려주었습니다. 우리 민족 고유의 유교적, 무속적, 불교적 바탕이 매우 소중하고, 서양 사람들이 갖지 못한 정신적 자산을 잘 활용하면 좋은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나를 학문의 길로 이끌어 준 것이지요. 새로운 기독교, 새로운 신앙 양식에 눈 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도마복음 "우리를 나간 한 마리 양이 되라"

변 선생의 뒤를 이어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공부하고 돌아왔더니 이화여대에서 정년퇴직한 김흥호 교수(1919~2012)가 명예교수로 와 있었습니다. 바로 옆방에 있던 그분의 가르침을 받게 됐지요. 김 교수는 자신도 다석한테 그렇게 배웠다면서, 나를 한 시간씩 일찍 학교 나오게 해서 다석 사상을 가르쳐 줬어요. 그렇게 2년 이상에 걸쳐 다석에 입문했지요.”
방에 김흥호 선생이 1993년 이 교수에게 써준 글씨가 걸려 있었다. 송나라 시인 육유(陸游)가 쓴 시구 ‘시성비취묵(詩成飛醉墨)’이었다. ‘시가 떠올라 취중에 붓을 휘갈기다’라는 뜻이다. 이 교수는 하느님의 영에 취해서 학문에 몰두하라는 김흥호 선생의 분부 같다고 해석했다.
-초기 예수 공동체의 도마복음에는 동정녀, 예수님의 부활, 재림, 대속(代贖) 신앙 이런 것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성경의 정경화(正經化) 과정에서 예수가 신격화했다고 하던 데요.
“예수 사후(死後),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국교화하는 AD 4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누가 옳고 그르고, 누구는 정통이고, 누구는 이단 같은 구분이 없었습니다. 도마복음서가 있었던 것은 도마를 추종하는 예수 공동체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사실 최초의 복음서라고 하는 마가복음서도 예수의 죽음으로 끝맺음을 했습니다. 부활에 대한 언급이 없다가 한 세기 지난 이후에 부활 이야기를 첨가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기독교 초기에는 예수님의 생애를 기억하고 따르던 공동체들이 많았습니다. 도마복음서의 공동체도 그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양 99마리가 있는 우리를 떠나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죄인이라 하고, 그 양을 다수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오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하지요. 하지만 도마복음서는 차라리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되라고 합니다. 기존 교회가 제도(교리)화 하고 성직자 중심으로 변질돼 가는 정황에서 오히려 도마복음서는 인간의 자유를 강조했습니다. 인간을 진정 자유롭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본 것이죠.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되는 과정에서 도마복음서는 제도를 부정하는 거추장스러웠던 책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정경에서 제외된 측면이 있습니다.”
-부활 이전과 이후의 예수는 성경에 다르게 묘사돼 있는가요.
“가장 먼저 쓰인 마가복음서는 예수님이 30세 될 때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는 모습부터 시작합니다. 그것보다 조금 늦게 쓰인 마태복음은 예수의 생애를 30년 소급해 예수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예수의 삶이 조금씩 도그마화하고 교리화하는 과정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보다 조금 더 늦게 쓰인 누가복음서에는 예수의 재림, 승천, 심판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리고 가장 늦게 쓰인 요한복음에는 예수를 로고스인 하나님과 동격이라 묘사합니다. 나중에 쓰인 복음서일수록 예수님에 대한 신성화, 예수님에 대한 교리화, 도그마화 하는 과정이 두드러집니다. 이에 반해 예수 어록을 담고 있는 도마복음은 예수의 생애를 중심으로 기록했습니다."

 김흥호 교수가 제자 이정배 교수에게 써준 '시성비취묵'(詩成飛醉墨) 글씨 [사진=황호택]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피 흘려 죽음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속죄(贖罪)를 대신(代身)했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 영생한다는 대속(代贖) 신앙은 정통 기독교의 중심 교리인데요. 그러나 다석은 대속 신앙에 대해 “나와 관계 없다”고 했는데요?
“톨스토이가 스스로를 비정통이라고 선언했던 것처럼, 다석도 스스로 비정통이라고 했습니다. 다석이 본래는 주일 아침만 되면 연동교회 승동교회 새문안교회 등 여러 교회를 다녔고,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을 기독교로 인도할 만큼 정통 신앙에 빠져 있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일본 유학 시절에 우치무라 간조를 만났습니다. 그의 일본식 기독교에 접하면서 다석의 마음속에는 한국식 기독교라는 형상이 잡혀갔겠죠.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적 기독교를 표방했으나 루터의 대속 신앙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석은 일본적 기독교는 물론 대속 사상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뒤 일본에 갔던 함석헌도 이 점에서 동일합니다. 대속 사상은 동물을 잡아 피를 바쳐야 했던 유대 민족의 제사 풍습의 연장선에서 나온 예수에 대한 이해지, 오늘날 우리 동양 사람들에게는 낯설다고 본 것이지요.
서양의 기독교가 예수를 통해 구원 받는 대속 신앙을 가르쳤다면 동양은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서 해탈의 길을 가는 자속(自贖) 신앙이라고들 말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대속과 자속의 의미를 철저히 구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예수의 삶이 있었고, 그 삶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인 이상 이 길이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란 차원에서 대속의 뜻을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그 길을 따라 살다가 우리도 그처럼 길이 되는 것, 바로 그것을 자속이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가 우리보다 앞서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는 대속이고, 그 길을 따라가다가 우리도 그 길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 자속입니다.
그렇기에 대속 신앙이라는 말을 폐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다석은 우리들 일상의 삶 자체가 대속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하지요. 물론 나 역시 인습적으로 사용되는 교리적 대속 신앙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이 커질수록 기독교가 풀어가야 할 숙제입니다. 대속은 틀렸고 자속은 맞다는 양자택일(兩者擇一)적 이해는 오히려 다석의 생각을 그릇되게 할 수 있습니다.”
-유교적 인식이 강한 아버지께 혼날까 봐 신학대학 진학을 상당 기간 숨겼다고 했던 데요.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 시대의 양반들은 왜 기독교를 반대했습니까.
“‘예수 믿고 자기 조상도 못 알아볼 놈’ ‘부모가 죽어도 제삿밥도 안 챙겨줄 자식’이라는 우려가 있었던 거죠. 아주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이 조상을 안 챙기는 기독교 체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땅치 않았던 것입니다. 유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이 하느님만 알고, 집안도, 제사도 모르는 사람들로 여겼습니다. 아버지도 그런 걱정을 한 거죠. 저를 손사래 하며 서울로 보낸 데는 가문의 영광을 회복해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살던 시골 동네에 신학대학을 나와 누추한 교회에서 목회하는 전도사가 있었는데 자식의 앞날이 그렇게 되는 게 아닌가 걱정을 했던 것 같아요. 당시 나는 교회에서 배운 배타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졌기에 아버지의 유교적 삶이 못마땅하게 보였습니다. 아버지에 맞서다 생전 안 맞아보던 뺨도 몇 차례 맞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지요. 이래저래 큰 불효를 했습니다.”
가톨릭이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엄청난 희생자를 낸 것은 장례와 제사 문제 때문이다. 전라도 금산(지금은 충남)에 사는 양반 윤지충이 천주교를 믿으면서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고 어머니의 장례를 가톨릭 예식으로 치렀다. 그는 1791년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신해박해다.
-가톨릭이 가혹한 박해를 받은 이후에도 개신교 선교사들이 와서 조상숭배는 미신이라고 근본주의 교리를 가르치면서 기독교와 전통사회의 갈등이 심해졌다는 시각이 있는데요.
“맞는 말씀이죠. 당시 한국에 왔던 많은 기독교 선교사들이 대부분 보수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구 우월의식, 제국주의 의식을 지니고 한국에 왔기 때문에 ‘한국 것은 미개하다’고 생각한 거죠. 그것을 기억, 답습하여 한국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에 가서 우리가 경험했던 그대로 아프리카 사람들의 풍습과 문화를 함부로 재단하는 행태가 많습니다.
다수의 유교인들은 기독교인을 조상을 홀대하는 못된 사람으로 봤습니다. 하지만 다석은 오히려 유교의 병폐가 조상밖에 모르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둘 다 문제라는 것이죠. 조상의 끝이 하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조상을 유(有)라고 하면 하늘은 무(無)다, 없음까지 올라가야만 진짜 유교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도 조상의 의미를 소중히 여길 때 진정한 기독교가 될 수 있다’고 했지요.”
이 인터뷰에 나오는 성경 구절은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동번역한 성경 2판(1999년)을 인용했다. 공동번역 성경은 요즘 우리가 쓰는 말로 돼 있어서 읽기가 부드럽다. 그렇지만 빨간색 테두리가 있는 관주 성경의 옛글에 익숙한 사람들은 아직도 그 성경에 애착을 갖는다. 결례되는 비유일지 모르지만 소주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 지금도 빨간 뚜껑의 진로 소주만 마시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로다.’(공동번역 성경)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관주성경)

다석은 광주 동광원에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 대해 강의하면서 하느님의 ‘외아들’(공동번역) 보다는 하느님의 ‘독생자’(獨生子·관주성경)에 애착을 보인다. 다석은 독생자를 다시 ‘한(獨) 나신(生) 분(者)’이라고 순우리말로 바꾸어 풀이한다. 그러나 다석은 로마서 8장 4절을 소개하면서 공동번역이 알기 쉽게 되어있다고 말한다. 60년 동안을 보던 그 관주성경보다는 공동번역 성경을 보고 참뜻을 깨달았다고 술회한다.
-다석은 한글 사랑이 각별해서 순 우리말로 된 종교 용어를 많이 만들어냈는데요. 그런데 거의 안 쓰이던 순우리말로 조어(造語)를 하다 보니 더 어려워진 것이 많아요.

다석의 한글사랑과 십자가 신학

“흔히 중국의 글자는 뜻글자고 한글은 소리글자라고 구분하잖아요? 우리는 보통 아설순치후(牙舌脣齒喉)라고 해서 혀가 구강의 어느 부분에 닿느냐에 따라 소리를 구분합니다. 하지만 다석은 한글 또한 뜻글자로 보았고 우리 민족을 하늘로 이끄는 천문(天文)이라고 했죠. 세종대왕은 훈민(訓民)의 차원을 넘어 천문(天文)으로 격상시켰습니다. 무엇보다 다석은 모음의 원리가 천지인(天地人) 3재(三才) 사상을 기초로 했다고 봤습니다. 농경 중심의 중국 문명은 음양론에 토대를 두었고, 시베리아 수렵문명권인 한국의 문화는 천지인 3재 사상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다석은 천지인 3재 사상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풀었지요. 땅(ㅡ)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는 고된 인간의 삶(ㅣ)이 3재론 속에 담겼다고 봤습니다. 다석은 이 3재를 합해서 십자가로 풀었습니다. 땅이라고 하는 것은 욕망, 현실의 세계인데, 이 땅을 뚫고 올라가는 과정이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가야 할 길이라 한 것입니다. 기독교로 말하면 십자가고, 불교로 말하면 성불(成佛)이겠습니다.
다석은 한글이 단순히 소리글자가 아니고 우리 민족을 하늘로 이끌려는 뜻을 담은 글자라 믿었습니다. 자음 역시 삼수(三數) 변화를 퉁해 설명하면서 인간의 삶을 고양시키는 뜻을 담았다 했지요. ‘ㅅ(시옷)’ ‘ㅈ(지읒)’ ‘ㅊ(치읓)’의 변화를 보십시오. 이걸 선생님은 ‘삶-잠-참’으로 설명하세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잠을 자야 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잠이란 죽음을 말합니다. 인간은 한 번 죽어야만 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선생님은 한글에 뜻이 있고, 그 뜻이 우리 인간을 하늘로 이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 교수가 책 제목으로 빌려 쓴 ‘빈탕한데 맞혀놀이’도 어렵죠. 좀 쉽게 설명해줄 수 있습니까?
“빈탕이라고 하는 것은 허공, 무, 없음이라는 말인데 결국 그 없음에 맞춰 살아가는 게 인간이 이 땅에서 할 일이라는 뜻입니다. 없이 계신 하느님이 인간 속에 바탈로서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빈탕은 곧 어둠이기도 합니다. 빛으로 드러난 세상에서 견물생심(見物生心)하지 말라는 뜻도 담겼습니다. 어둠 속에서 더 큰 것과 하나 되는 삶을 살자는 초대이자 부름입니다. 예컨대 인간은 꽃이 있으면 꽃만 보고 ‘이쁘다, 좋다, 꺾고 싶다’라는 욕망을 갖지만 꽃을 꽃 되게 하려면 그것을 있게 한 허공, 빈탕한데가 있어야 합니다. 이를 알아야 없이 계신 하느님처럼 인간도 없이 살 수 있지요. 하지만 인간은 늘상 덜 없는 존재, 그래서 더러운 존재로 살고 있습니다. 덜 없다는 것은 늘 욕망적인 존재로, 탐진치(貪嗔癡)의 삶을 살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덜 없다’는 것을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더럽다’가 되는 거예요. ‘덜 없는’ 존재가 ‘더러운’ 존재가 되는 거죠. 없이 계신 하느님을 자신의 바탈로 모신 인간이 할 일을 자신 속 탐진치를 벗는 길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이 땅에 온 이유고 살아야 할 목적입니다. 빈탕한데 맞혀놀이가 다석의 구원관입니다.”
 

  부암동 집 대문 앞에서 이 교수(왼쪽)와 황호택 논설고문.[사진=이주영 인턴기자]


-다석이 십자가를 동양적으로 재해석해서 일좌식(一坐食) 일언인(一言仁)이라는 말을 하는데요. 일좌식은 한 끼 식사와 명상이지요. 그런데 일언인은 제자나 연구자들의 해석을 들여다봐도 조금씩 다르고 잘 이해가 안 가요.
“김흥호 선생은 다석의 기독교를 한마다로 동양적 기독교라 풀었고 그 핵심이 일좌식 일언인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일좌식 일언인은 김흥호가 이해한 다석 사상의 본질입니다. ‘일좌’는 말 그대로 앉아있는 것, 명상을 의미하고, ‘일식’은 하루에 한 끼 먹는 것이죠.
일언은 남녀관계를 풀어 끊는 것입니다. 다석은 뜻과 맛이라고 하는 개념을 대비시켜 이해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맛을 찾아 살지만, 선생님은 뜻을 찾아 사는 것이 인간이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라고 말했어요. 아마도 맛중의 맛이라고 하는 것이 남녀의 관계가 아닐까요. 그래서 ‘일언’이라고 말로 인간이 색에 사로잡혀 사는 것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쳤습니다. 말씀에 사로잡히면 사람은 맛을 버리고 뜻을 찾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김흥호 선생은 마지막 일인(一仁)을 명(名)과 관계시켜 이해했습니다. 한마디로 헛된 명예욕을 벗자는 것이지요. 누구에게나 있는 몸을 갖고서 ‘몸성히’를 실천하라고 했습니다. ‘몸성히’로 인해 마음이 편안해지면(마음 놓이)로 자신의 바탈을 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교수는 다석의 ‘일좌식 일언인’에서 인에 대한 해석이 가장 어렵다고 말한다. 그는 저서 ‘유영모의 귀일신학’에서 ‘일인은 늘상 걷는 일을 뜻한다’고 풀이했다. 이 교수는 “어질 인이 걷기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왜 다석이 여기서 인을 사용했는지 잘 알지 못하겠으나 가늠할 여지는 있다”고 했다. 두 발로 어디든 다니고 아침마다 냉수마찰을 해 몸을 건강하게 한 것이다. 한마디로 몸성히를 삶의 근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라고 해설했다.

다석의 一日一食과 늘상 걷기

그러나 다석은 1971년 광주 동광원 강의에서 인(仁)에 대해 “유교에서 추구하는 인”이라고 하면서 ‘어질 인’이 아니라 ‘성언 인’이라는 순우리말로 푼다. 성은 ‘(몸이) 성하다’에서, 언은 ‘언니’에서 따왔다. 그래서 성언을 찾아서 그 성언을 완전히 이루는 것, 그래서 참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인이라고 다석은 말한다.
-다석은 40년 동안 일일일식(一日一食)을 하고 체조와 늘상 걷기 등으로 건강을 다져서 그 시대로서는 드물게 91세 장수를 했는데요. 다석을 따르는 분들 중에 그런 수행법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분들이 많습니까. 윤정현 신부는 한 때 일일일식을 하다가 포기하고 배꼽시계에 맞춰 먹는다던데요.
“다석을 공부하는 사람 중에서 일일일식을 시도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요. 김흥호 선생은 38살 무렵부터 일일일식과 해혼(解婚)을 실천했고 그것이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함석헌 선생은 그걸 실천하려고 했다가 포기한 적이 있었지요. 나 역시도 시도했으나 거듭 실패를 했습니다. 저는 일일일식을 문자적으로, 소승적으로 생각하지 않고자 합니다. 오히려 이것을 문명비판적인 차원에서 단순성(Simplicity)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사실 다석은 하루 한 끼를 드셨으나 잡수신 양이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루 한 끼에 집착하는 문자적 의미는 지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단순성, 즉 최소한의 물질로 살려고 하는 노력이 중요할 것입니다. 최소한의 물질로 삶을 살아내는 것이 바로 기후(생태)붕괴 시대의 일식의 의미라 믿습니다. 이 때 물질, 곧 최소한의 물질은 정신이 되는 것이겠지요. 다석 자신도 하루 한끼 식사를 자기 생명을 바치는 정신적 행위라 여겼습니다. 내 몸이 얼마나 가난한가, 최소한의 물질로, 정신으로 살아낼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이 중요합니다.”                                           <인터뷰어 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이정배 교수 약력>

-1955년 출생
-1974년 대광고 졸업
-1974~1981년 감리교 신학대학 및 대학원
-1981~1986년 스위스 바젤 대학교 신학부 조직신학 전공
-1986~2017년 감신대 교수
-2010~2011년 한국조직 신학회 회장
-2012~2013년 한국문화신학회 회장
-2011~2012년 한국 기독자 교수협의회 회장-1992년 서울에서 열린 JPIC(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 대회를 계기로 토착화 신학과 생태신학을 연결하고자 애쓰다-강원도 횡성에 독서와 기도, 노동이 어우러지는 현장(顯藏)아카데미 조성 중
-<생태영성과 기독교의 재주체화>(2010) <한국 개신교 전위토착신학연구>(2003)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2008) <빈탕 한데 맞혀 놀이>(2011) <유영모의 귀일신학>(2020) 등 저서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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