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말을 걸어온다...‘생생한 공상‘이 펼쳐진다

2020-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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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미술의 대가‘ 제니 홀저 개인전

대형 LED로 만든 2020년작 ‘경구들‘

일그러진 빛과 속도로 관객에 말걸어

‘反 트럼프‘ 작가의 정치·사회적 신념

‘뮐러 문서‘ 위에 수채화...비판 담아

 

3m의 대형 LED로 만든 2020년 작품 ‘경구들’(맨앞)이 전시된 국제갤러리 3관 전경 [사진=국제갤러리 제공]


전시장에 들어선 순간, 제니 홀저의 ‘언어’가 순식간에 온몸을 감쌌다. 공중에 매달린 3m가량의 대형 ‘발광다이오드’(LED) 작품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빙글빙글 회전했고, 작가가 1970년대부터 모아온 경구들이 LED 밑부분에서 위쪽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강렬한 첫인사에 놀란 마음을 추스를 틈도 주지 않은 채 이번엔 전시장을 가득 채운 붉은 조명이 말을 걸어왔다.

언어를 매체로 사용하는 개념미술의 대표 작가 제니 홀저의 개인전 ‘생생한 공상을 하며 사는 게 중요해’(IT’S CRUCIAL TO HAVE AN ACTIVE FANTASY LIFE)가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 2관(K2)·3관(K3) 전시장에서 개막했다.
2004년과 2011년에 이어 국제갤러리에서 세 번째로 개최되는 홀저의 개인전이다. 당초 올봄에 전시가 열릴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여파로 인해 연기됐다.

국제갤러리의 이번 전시는 작가의 최근 작품세계를 소개한다는 측면에서 주목받고 있다. 현재 미국 뉴욕에서 거주하며 작업 중인 홀저는 영상 메시지를 통해 “로봇을 활용한 LED 작품을 선보이게 됐다. 요즘 프로그래밍을 통해 텍스트와 신호 자체가 움직이는 형상을 연출하는 법에 몰두하고 있다”고 말했다.

홀저는 1980년대부터 LED 매체를 즐겨 사용했다. LED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때론 빠르고 때론 느린 움직임이 사람의 언어와 닮아 있었다. 작가는 “이런 움직임이 우리가 목소리로 내는 억양과 비슷하게 느껴졌다”고 설명했다. 예술 작품을 통해 기계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인 3m의 대형 LED로 만든 2020년 작품 ‘경구들’(TRUISM)은 팔색조처럼 다양하게 변하며 메시지를 전달했다. 경구뿐 아니라 일그러지는 신호와 조명, LED의 회전 속도 조절 등을 통해 관람객에게 여러 가지 메시지를 전달했다. '광기에 빠지는 것은 비교를 위해 좋다' 같은 강렬하고 인상적인 문장들이 계속됐다. 매우 동적인 LED 작품 밑에는 반대로 매우 정적인 대리석 의자 작품 4개가 놓여 있다. 홀저가 꼽은 문장들이 의자들 위에 새겨져 있다.

작가는 “언어가 전달되는 방식을 구상하는 것과 언어를 공간적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언어를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해 다양한 결과를 도출해 내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자연의 변화 역시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다. 윤혜정 국제갤러리 실장은 “‘경구들’ 등의 작품이 있는 K3 전시장은 날이 어두워지면 조명을 끄게 된다”며 “작품의 빛이 주를 이루는 저녁에는 아침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제니 홀저 [사진=국제갤러리 제공]


1990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여성 작가 최초로 미국관을 대표했을 뿐 아니라 그해 최고의 영예인 ‘황금사자상’을 거머쥔 홀저는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는 예술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총기 규제를 옹호하며 반(反) 트럼프 인사 중 하나로 꼽힌다. 1950년생인 홀저는 세계 유수의 미술기관뿐만 아니라 미국 뉴욕 월드 트레이드 센터와 독일 국회의사당 등 공공장소에서 작품을 꾸준히 선보이며 자신의 목소리를 전했다.

작가의 정치·사회적인 신념은 작품 속에도 잘 녹아들어 있다. 홀저는 “우리는 현재 의문을 제기하는 행위 자체가 절실한 세상을 살고 있다”며 “대다수의 작품들이 다양한 형식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짚었다.

K2 전시장 한쪽 벽은 홀저의 수채화 작품들이 가득 채웠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러시아 정부가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당선을 도왔다는 의혹에 대한 연방수사국(FBI) 수사 결과를 담은 ‘뮐러 보고서’를 바탕으로 제작한 36점의 수채화다. 국내에서 처음 선보이는 작품이다.

홀저는 “‘뮐러 보고서’를 읽고 엄청난 답답함을 느꼈다. 수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그 위에 페인팅 작업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 수채화의 출발점”이라며 “언제나 페인팅 작업을 하고 싶었지만 1970년대에 실패를 맛본 후로 줄곧 머뭇거려 왔다. 그래도 늦게나마 이렇게 시작해보려고 한다”고 털어놨다. ‘뮐러 보고서’를 크게 확대한 종이 위에 그린 수채화에는 작가의 다양한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뮐러 보고서’를 바탕으로 제작한 36점의 수채화 전경 [사진=국제갤러리 제공]


K2 전시장 다른 쪽 벽면에는 홀저가 꾸준히 제작하고 있는 ‘검열 회화’(Redaction Painting) 연작이 전시돼 있다. ‘미국 정보 공개법’에 따라 공개된 정부 문서를 추상화로 변모시켰다.

작품에는 검정색 검열 막대기로 여전히 가려진 채 기밀 해제된 미국 정부 문서와 군부 문서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인 시각이 담겨 있다. 홀저는 검열 막대기를 금박과 은박으로 바꿨다.

작품들을 둘러볼수록 이번 전시의 제목이 왜 ‘생생한 공상을 하며 사는 게 중요해’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이는 홀저가 평소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문구이기도 하다.

작품들이 전하는 ‘생생한 공상’은 결국 관람객들의 몫이다. 홀저는 “전시가 주는 메시지는 내가 아닌 작품들이 대신 전해줄 것으로 기대한다”며 “관객들이 작업을 통해 메시지를 스스로 찾아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1월 31일까지.
 

홀저의 'ultimate sin' [사진=국제갤러리 제공]


 

홀저의 'STATEMENT - redacted' [사진=국제갤러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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