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85)] 생에서 24일을 잃어버렸다

2020-12-09 11:16
  • 글자크기 설정

죽음 근처로 갔던 71세 추락사고…내 마음 안에 허공 있소

[다석 류영모]


대미산 농장에 류씨가 오두막 은거를 하고
계촌 계곡 뜨락에 스스로 먹을 걸 심는구나
내려온 은혜 올리고 올린 마음 내려오니 영원한 진리라
서울과 강원도가 참으로 평안하구나

大美山庄柳考盤(대미산장류고반)
桂村洞庭自强植(계촌동정자강식)
昇恩降忠永遠理(승은강충영원리)
漢城江原太平安(한성강원태평안)

       류영모 한시 '대안만강(大安萬康, 아주 평안하구나)'

이 시는 류영모가 아들을 생각하며 지은 특별한 작품이다. 류고반(柳考盤)의 '고반'은, 시경의 위풍(衛風)에 나오는 고반(考槃)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고반재간(考槃在澗)이란 말이 나오는데, 산골 개울가에 은거할 오두막을 지었다는 뜻이다. 류고반은, 류씨가 숨어사는 오두막이란 의미다. 자강식(自强植)은 스스로를 먹일 푸성귀를 재배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 가장 오묘한 말은 승은강충(昇恩降忠)일 것이다. 은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고, 충성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인데, 그걸 거꾸로 써놓았다. 내려온 것을 올리는 일은 그 은혜를 갚는 것이요, 올라간 것을 다시 내려받는 것은 하늘의 응답을 듣는 일이다. 산골에서 오로지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순수하고 독실한 삶은 하늘과의 소통이 이토록 긴밀하게 이뤄지는 삶이다. 그걸 류영모는 승은강충이라고 말했다. 이 삶이야 말로, 영원한 진리에 가까이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서울에서 은거하는 아버지와 강원도에서 은거하는 아들이, 이토록 하늘삶에 면려하는 일은 참으로 태평한 일이 아닌가. 이렇게 아들을 바라보는 대견한 시선을 시에 담은 것이다. 어찌된 일인지 그 무렵의 내막을 들여다보자.

류자상도 40세에 강원도로 '출애굽'

1960년. 차남 류자상이 결혼을 했다. 그의 나이 40세, 류영모 70세였다. 류자상은 결혼을 한 뒤 바로 독립을 했다.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 계촌2리로 들어갔다. 류영모가 부친을 여읜 뒤 바로 북한산 아래로 이사를 결행하던 것과 닮지 않았는가. 그가 결혼할 당시에는 가업인 '경성피혁'을 경영해야 했기에 시골로 갈 수가 없었기에 때를 기다렸다가 결단을 내렸다.

젊은 시절의 귀촌(歸村)을 그는 '출애굽(出埃及)'이라 은유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인도로 해방되어 나온 것처럼, 도시의 각박하고 영악한 삶을 떠나 '참'을 구하러 나선 결단을 표현한 말이다. 땀을 흘리면서 세상을 위해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건강한 살이'를 도모하는 신성한 은거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랄까. 류자상 또한 정결한 삶을 가슴에 품고, 오지로 숨어 들었다.

젖을 생산하는 양 두 마리, 꿀을 생산하는 벌통 열 다섯 개. 그리고 농기구 몇 개를 들고 들어가는 단촐한 이사였다. 대미산(大美山, 1232m)은 강원도 평창의 방림면과 봉평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북쪽의 태기산, 서쪽의 청태산, 동쪽에 덕수산과 금당산이 솟아 있는 태백산맥의 줄기다. 대미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남한강의 지류인 평창강으로 흘러든다. 대미산의 품 속에는 지름이 4㎞가 되는 사발 모양의 분지가 있다. 류자상은 임야 5정보(1만5천평)와 밭 1천여 평, 그리고 화전민이 한나절 만에 뚝딱 지었다는 통나무 귀틀집을 사서, 그 땅에 자리를 잡았다.

2020년 현재 계촌리(해발 700m)는 어떻게 됐을까. 이곳은 현대차 정몽구재단과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지정한 클래식 마을이다. 계촌초등학교는 2008년 폐교 위기에 몰렸을 때, 학교를 살리기 위해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 계촌 초등학교와 계촌 중학교 전교생이 모두 '별빛 오케스트라' 단원이다. 마을에는 클래식 벽화가 그려졌고, 골목에는 클래식이 흐르는 스피커가 설치됐다. 2015년부터 계촌마을 클래식거리축제도 열렸다. 첼리스트 정명화도 이 행사에 참여했다. 또 전국 클래식 콩쿠르가 열리기도 했다. 특히 올해는 코로나19 사태로 온라인으로 제6회 계촌마을 클래식 거리축제가 8월과 9월에 열렸다. 올해는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아 '월광소나타'가 계촌에 울려퍼졌다. 3년에 걸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시리즈 연주를 마무리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손민수(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연주였다.

클래식 마을로 지정된 계촌리

류영모가 드나들던 시절엔 아마 상상하기도 어려웠을 풍경이다. 60년 전의 계촌리는 사람이라고는 찾아보기도 어려운 두메산골이었다. 아들이 이 산골짝 귀틀집으로 이사를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 류영모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집 둘째 자식은 괴상한 사람입니다. 말이 뜬(드문) 사람입니다. 인사성이 없습니다. 자식들 가운데 내 뜻에 가장 맞게 가는 사람이 그 자식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음식에도 소금을 먹지 않습니다. 농사짓는 아들이 참 내 아들입니다."

류영모는 여름 8월 한달 동안 YMCA 강의가 쉬는 때면 꼭 평창에 갔다. 칠순의 나이였지만 그는 불편한 교통을 무릅쓰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계촌리 대미산 분지에는 바위들이 군데군데 앉을 만한 바위들이 솟아 있었는데, 류영모는 그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깊은 호흡으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다졌다. 마치 스스로의 자리를 찾은 것처럼, 평안하게 좌정한 류영모를 바라보는 류자상 부부의 마음도 뿌듯했을 것이다. 계촌의 '류영모 명상바위'는 정신문화 기념물로 기릴 만하다. 
 

[류영모의 둘째 아들 류자상 부부.]


이 척박한 산골에서도 경제는 기적같이 일어났다.  "젖양 2마리가 몇 해 안 되어 50여 마리로 늘어났습니다. 벌통 15개도 얼마 안 되어 50여개로 늘어났죠.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가 되었습니다. 벌통 한개면 꿀 5되를 거둡니다." 류자상의 말이다. 지금 이곳은 고랭지 채소농사 마을로 바뀌었다.

아픔과 시원함(苦樂)에 관하여

등뼈가 아프네 꽤 맵고 시네
입 속에서 어떤 맛을 느끼는 것처럼
허리는 맛이 필요없으니 쓰다고 외칠 뿐
아픔을 느끼는 게 사람인지라 나도 저리네
곤란을 겪으면 괴롭긴 하지만 곧 시원하게 낫지
가여운 곳 긁으면 시원하지만 자꾸 긁으면 상처되니
아픔과 시원함은 때에 맞아야 하고 잘 낫는 것도 때가 있네
시원함과 아픔은 원래 다른 것이 아니네

脊髓有症頗辛酸(척수유증파신산)
如在口中可一味(여재구중가일미)
腰不要味只叫苦(요불요미지규고)
人間以痛吾亦痿(인간이통오역위)
經難雖苦則快療(경난수고즉쾌료)
搔痒且樂連是瘁(소양차락연시췌)
時期痛快時快癒(시기통쾌시쾌유)
快與痛是本不二(쾌여통시본불이)

류영모의 시 고락(苦樂)(1941년)

51세 때 사다리에서 떨어져 허리를 몹시 다쳤을 때 류영모가 쓴 이 시는 BC 3세기의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설파한 철학의 핵심을 정교하게 담고 있는 놀라운 시다. 에피쿠로스는 이런 말을 했다. "모든 고통스러운 것들의 제거가, 쾌락 크기의 한계이다. "

쾌락이란 뭔가?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다. 고통이 제거되어가면서 서서히 쾌락이 커지기 시작한다. 고통이 완전히 제거되어 전혀 무통의 상황이 되는 그때가 쾌락의 절정이다. 새로운 쾌락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제로인 상태일 뿐이다. 이 생각은 에피쿠로스 철학의 핵심이 된다. 고통은 인간에게 신의 뜻을 전한다. 시원함과 고통의 경계가 생명의 언어다. 시원한 것은 몸에게 적당하다는 신호이며 고통스러운 것은 몸에게 적당하지 않다는 신호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는 동시에 작동하기도 한다. 시원함에는 고통이 숨어있으니, 시원함의 극한을 밀어붙이면 고통이 온다. 고통에는 시원함이 숨어있으니, 고통이 풀리는 그 순간의 시원함이 보통의 시원함보다 훨씬 시원하다. 류영모는 이것을 快與痛是本不二(쾌여통시본불이)라 했다. 시원한 것과 아픈 것은 같은 것의 양면이라는 얘기다.

외손녀에게 하늘을 보여주려고

1961년 11월 21일. 류월상(류영모의 딸)이 김장하는 일을 도우려고 친정에 왔다. 이때 어린 딸 최은화도 데리고 왔다. 류영모는 외손녀인 은화에게 신기한 것을 보여주겠다며, 아이 손을 잡고 건물 옥상에 올라간다. 옥상에는 류영모가 천문(天文)을 관측하려고 지어놓은 2평쯤 되는 유리집이 하나 있었다.

거기서 잠깐 놀던 둘은, 다시 아래로 내려오기 위해 계단을 탔다. 가파른 옥상 층계를 앞에서 내려가던 외손녀가 발을 헛디뎠다. 아이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찰나, 뒤쪽 위에 있던 류영모가 급히 고개를 숙여 은화를 안았다. 아이를 껴안은 채 류영모는 계단에서 이탈하여 3m 높이의 허공에서 거꾸로 떨어지고 말았다. 현관바닥에 추락했으나 류영모 품에 안겨있던 은화는 다행히 상처난 곳이 없었다. 그러나 류영모는 치명상을 입었다. 왼쪽 얼굴 부분에 심한 상처가 났고 왼쪽 눈은 실명(失明)했다. 몸 전체의 타박상도 심각했다. 추락 후 류영모는 의식을 잃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가족들이 발견하고, 류영모를 급히 서울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겼다. 중환자실에서 일주일간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었으나 류영모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8일째가 되는 11월 29일, 주사침을 꽂을 때 문득 손가락을 움직였다. 통증이 돌아온 것이었다. 이후, 그는 상태가 호전되어 중환자실에서 일반환자실로 옮겼다. 류영모는 문병을 온 제자 박영호에게 "내가 다친 것은 우리가 모르고 있지만 하느님께서 무슨 뜻이 있어서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서울대 법대 학생이던 주규식이 류영모 병상을 지켰다. 11월 말인지라 학교 수업을 종강했기에 시간을 낼 수 있었다. 그는 '간병일기'를 썼다. 다음은 간병일기에 나온 기록들이다.

1961년 11월 30일
죽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의식은 회복하지 못한 채 잠꼬대 같은 소리로)

1961년 12월 2일
사람은 점잖은 사람이 돼야 해. (무의식상태에서 혼잣소리로, 입원한 지 12일째)

1961년 12월 5일
인생은 모르겠는데 인생 또한 알기 쉽거든 그대로 살면 괜찮아.(무의식상태에서 혼잣소리로, 입원한 지 15일째)

1961년 12윌 6일
(류영모는 다친 지 16일 만에 의식을 회복하였다. 오줌을 받아 내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
"그저 사람은 똥 싸고 오줌 누는 일이야. 그것 밖에 없다. 내가 아프고부터는 오줌을 잘 가누지 못해요. 그게 걱정이요. 아버지!(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 괴로운 게, 즐거운 게 따로 있는 게 아니야. 다 하나지. 철학이 제일이야. 그저 생각하는 거지. 활달한 도(道)처럼 좋은 게 어디 있어. 예수와 석가는 참 비슷해요. 매우 가까워요. 죽으면 평안할 거야. 무엇을 믿거나 죽으면 모두 평안할 거야."
(주규식과의 대화)
(주규식) 제가 누구인지 아시겠습니까?
(류영모) 왜 몰라.
(주규식) 누구예요?
(류영모) 그 바른 도(道)를 일으켜 세우기를 좋아하는 데 서 있지 않아요.
(주규식) 누가 그렇단 말입니까?
(류영모) 여러 형제들이 다 그렇지. 원도(元道)를 깨닫는 하이심(使命)에 계시는‥‥

1961년 12월 10일
(선생님의 눈이 몹시 충혈된 것을 걱정하자)
눈이 충혈되는 것도, 아니되는 것도 다 우스운 일이야. 그까짓 것 충혈이 되어도 안 되어도 그만이지.

1961년 12월 10일
(함석헌 선생님이 문병을 오다. )
(류영모) "나에게 요새 더 똑똑히 생각되는 것은 요한복음 17장 21절 그리고 13장 31절, 이건 두 가지가 꼭 같은 말씀이야. 17장에는 13장에 있는 것을 상세히 써 놓은 것이에요. 예수가 한 일은 모두가 이겁니다. 이 세상에 다른 게 없어요. 오직 이걸 위해 예수가 오신 거야. 13장 31절에 말미암아(인하여)라고 썼는데 이게 못마땅해요. 바른 번역이 있어야 해요. 그동안에 (병원에서) 내가 잘못 살았어. 지금도 한끼씩 먹어야 해요. 빔(空)이 맘 안에, 맘이 빔 안에 있어 이것뿐이야. 나는 23살부터 이렇게 생각해요. 이것처럼 확실한 것은 없어요. 빔이 맘 안에 맘이 빔 안에 있음이 석가가 꼭 깨달은 거요.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예수는 분명히 깨달았을 거야. 예수를 아는 사람이 대단히 적은 것 같아요. 석가 이외에 석가를 아는 이는 없는 것 같아요. 죽은 뒤에 향불 피워 놓고 촛불 켜놓고 해서 불교도 기독교도 없어졌어요. 어쨌든 나도 괴상한 물건이고, 서로서로 괴상한 물건이야. (자신과 함석헌을 번갈아 가리키며) 어쨌든 둘 사이에 필요가 있어서 내가 이렇게 된 거야."
(함석헌) "예.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

             (주규식 '간병일기' 에서)

이 기록들은 간병자의 시선에서 그때그때 기록한 것이니 만큼, 매우 사실적인 대화나 발언들이라 할 수 있다. 12월 6일에 의식을 회복했으며 병문안을 온 함석헌과도 종교와 성경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그런데 12월 15일, 그는 갑자기 사고 이후의 모든 일을 잊어버린 듯했다. 그날 그는 '다석일기'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1961 12. 15. 금. 26210. 낮인데 내 정신은 내 집이 아닌 곳에, 밤 아닌 낮에 내가 왜 누워 있느냐고, 눈에 보인 집사람에게 물어 보다. 이야기를 듣고야 다쳐서 치료받고 있다는 것을 알다. 일찍 내가 알아보신 늙으신 분들과 젊으신 벗이 많이 오시어 보아 주셨다는데, 오늘 되기 전에 찾아 주신 분들께는 내 누구시라고 알아뵙는 것 같았고 또 말씀을 주고받았다고 하는 젊은 벗의 말을 듣고 내 생각하여 보아 모르겠다. 24일 동안은 내가 같은 동안 살지도 않았다 할 것이니, 누구를 맞았거나 무슨 말을 한지도 생각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

류영모의 24일(11월 21일~12월 15일)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다석 류영모]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