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혈 재상’은 독일 프로이센의 수상이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1815~1898)를 뜻한다. 그는 1862년 의회 연설에서 국왕의 상비군 확충 계획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당시 프로이센의 국회는 왕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자유주의자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만약 군인 수가 늘어나면 왕의 강압 통치가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당시 프로이센은 민주주의에 대해서만 고민할 입장이 아니었다. 국제 안보 상태가 매우 불안했기 때문이다. 북쪽의 덴마크는 민족주의 국가로 발돋움하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서쪽의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를 중심으로 영토 확장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늙은 대국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성장을 원치 않았다. 비스마르크는 이 국면을 슬기롭게 돌파하려면 강한 군대가 필요하다고 봤다. 자유주의 성향의 정치인들은 그 구상에 반대했다. 하지만 그들을 신경 쓰다가 나라를 잃을 판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이렇게 외쳤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수결이나 언론이 아니다. 오직 철과 피다.” '철혈 선언‘을 계기로 프로이센의 무장이 시작되었다. 1864년 덴마크와 북부 영토를 둘러싼 전쟁에서 이겼다. 1866년에는 오스트리아 영토까지 파고 들어가며 성공적으로 싸움을 치렀다(보-오전쟁).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계기로 비옥한 알자스-로렌 지역을 빼앗고 나폴레옹 3세를 퇴위시켰다. 1871년 독일 제국이 출범하고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로 등극했다. 비스마르크는 합의와 토론이 아니라 성과로 말하는 지도자였다.
하지만 그는 자유주의자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탄압하지 않았다. 이념보다는 실질과 가치를 더 중시했기 때문에 반대당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자유주의자들의 반항 정신은 효율적 통치에 방해되었지만, 그들의 민족주의는 독일 통일에 매우 도움이 되는 지향점이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 각지의 자유주의 성향 정치인을 끌어들여 아군으로 만들었다. 상대의 명분을 적당히 세워주고, 이익으로 발을 묶는 것이 그의 주특기였다.
영국과 러시아를 오가며 전략적인 ‘등거리 외교’를 펼치기도 했다. 두 나라가 프랑스와 연계하여 독일을 공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핵심 전략이었다. 그러자면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지나치게 가까워지지 않아야 했다.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와 경쟁하는 국가였기 때문이다. 또 해군 군비를 늘리거나 해외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려서도 안 되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을 건드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스마르크 시대에는 이 원칙이 칼같이 지켜졌다.
또 그는 자신의 정책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마다 황제를 향해 사퇴 협박을 했다. 상대방이 쉽게 사표를 수리하기 어려울 것을 알고 저지르는 벼랑 끝 전술이었다. 이 방법은 그의 정체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도 주효했다. 정적들은 비스마르크가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불온하다고 여기고 반대 여론을 조성했다. 하지만 막상 당사자로부터 사퇴 선언이 나오자 “대안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비판론이 사그라들었다. 비스마르크가 가장 믿는 구석은 그 자신이 보유한 막대한 영지와 재산이었다. “정치 그만두고 놀면 되지 뭐”라는 자신감이 승부수를 걸 수 있는 뒷배가 되었다.
19세기의 실용주의 정치인에게서 21세기 한국 야당 정치인의 모습이 보인다고 하면 너무 자의적일까. 비스마르크의 생애를 톺아보면서 유독 비슷한 사람이 떠올랐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다. 공교롭게도 그는 독일 유학파다. 유럽 정치는 어지러운 이념과 이해관계의 구도 속에서 정치인과 정당이 독특한 포지셔닝을 유지하며 한발 한발 내딛는 정치다. 해방 이후 야당 지도자였던 할아버지(가인 김병로)가 우국지사형 정치인이라면, 유학지에서 김종인이 접한 유럽 정치인들은 곡예와 이면 교섭에 능한 사람들이었다. 프랑스의 대통령이었던 퐁피두, 독일의 전 총리 빌리 브란트, 영국의 전 총리 헤럴드 윌슨 같은 인물들은 이념과 정체성에만 복무하지 않았다. 일단 국가를 최우선시했고, 그다음은 '이기는 정치'를 고민했다. 좌파는 우파를, 우파는 좌파를 벤치마킹하며 시류에 맞는 공약과 정책을 구상했다.
1973년 뮌스터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고 돌아온 김종인은 박정희 정부의 고용보험 정책과 의료보험 정책을 입안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880년대 비스마르크가 독일의 국민들을 경제적으로 안정시키고, 사회주의의 발호를 막기 위해 썼던 정책이었다. 우파 정권이었던 박정희 정부가 급진적인 복지 프로그램을 도입하게 된 데에는 실용주의가 증요한 배경 노릇을 했다. 약 40년의 세월이 지나 김종인은 정책 전문가에서 정국의 설계자로 발돋움했다. 비스마르크 못지않은 정치 기술자이자 그랜드 디자이너로 인기를 얻게 된 것이다. 2012년 대선에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경제민주화 공약을 통해 좌클릭을 하는 데 일역을 담당했다. 2016년 총선에서는 박근혜 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부각하며 더불어민주당의 비대위원장으로 활약했다. 운동권 정당의 골수 이념보다는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공천을 고민했던 그는 민주당을 호남권 주도 정당에서 수도권 지향 정당으로 바꿨다. “안보는 보수, 경제는 진보”라는 구 새누리당의 실용주의적 방향도 교묘하게 민주당 선거 캠페인에 이식되었다. 더불어민주당이 선거 과정에서 진보 색깔을 줄이자 무당파 성향의 중산층들이 마음껏 표를 던졌다. 이때의 이미지메이킹이 2017년 장미 대선의 문재인 대통령 당선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 번의 선거에 연거푸 패한 보수당은 지난 5월 김종인을 다시 지도자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민주당을 성공 반열에 올려놓은 노하우가 궁금해서라도 그를 영입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과거 진보가 야당이었을 때보다 오늘날 보수 야당의 환경이 훨씬 좋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점이 있다면, 2012년과 2016년에는 김종인이 선거 기간 전후로 잠깐 사령탑을 맡았으나, 2020년에는 거의 ‘1년간 독사장’으로 운영 책임을 떠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과거 비스마르크가 빌헬름 1세의 섭정으로 장기간 전권을 휘둘렀던 것과 매우 유사한 환경이다. 김종인식 정치는 전통 보수 세력에게는 위험투성이다. 기본소득과 상법상 다중대표소송제(본사 주주가 계열사 사안을 두고도 소송할 수 있는 제도)는 그가 정말 보수당 대표가 맞는지 의심스럽게 한다. 보수 군중이 정치적 자산이라고 여기는 인물들을 두고 “대통령감이 아니다”, “정치를 잘 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거침없이 품평할 때에는 오만하게 느껴진다. 자유주의자들을 향해 다짜고짜 “다수결이나 언론 운운하지 말라”고 외쳤던 비스마르크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김종인과 철혈 재상 모두 자리를 거는 데 매우 익숙하다는 사실이다. 그 탓에 민주당 열혈 지지자들은 ‘추호 할배’라는 별명을 유행시켰다. 벌써 그는 지난 12일에도 재보선 기획단 인선을 둘러싼 잡음을 두고 “이대로 가면 비대위가 더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며 엄포를 놨다. 판이 깨지면 다 같이 망한다는 논법이다.
필자는 사석에서 당사자에게 직접 존경하는 역사인물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외국에서는 아데나워와 링컨, 한국에서는 이승만과 박정희”를 꼽았다. 보수당의 대표로서 적확한 언급이었다. 네 지도자의 공통점이 있다면 이념보다는 국가를, 정체성보다는 성과를 지향했다는 사실이었다. 필자는 내심 김 위원장이 비스마르크를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예측 불허의 과정 속에서 귀신같이 결과를 내는 정치인 말이다. 재미있는 점은 보수당 지도자가 바뀐 이후로 진중권, 서민, 김경율, 권경애와 같은 진보 지식인들이 조금씩 오른쪽을 쳐다봐 주기도 한다는 점이다. 영역 넓히기가 중요한 정치 바닥에서는 분명히 의미 있는 성과다. 김 위원장을 두고 “진짜 보수냐 아니냐”하고 논쟁을 벌이기엔 야당의 사정이 너무 다급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새삼 든다.
물론 김종인에게도 나름의 정치적 숙제와 넘어야 할 벽이 있을 것이다. 비스마르크도 넘지 못했던 벽 말이다. 동서고금의 역사에 밝은 김 위원장 본인의 심중(心中)에 생각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그는 자유주의자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탄압하지 않았다. 이념보다는 실질과 가치를 더 중시했기 때문에 반대당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자유주의자들의 반항 정신은 효율적 통치에 방해되었지만, 그들의 민족주의는 독일 통일에 매우 도움이 되는 지향점이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 각지의 자유주의 성향 정치인을 끌어들여 아군으로 만들었다. 상대의 명분을 적당히 세워주고, 이익으로 발을 묶는 것이 그의 주특기였다.
영국과 러시아를 오가며 전략적인 ‘등거리 외교’를 펼치기도 했다. 두 나라가 프랑스와 연계하여 독일을 공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핵심 전략이었다. 그러자면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지나치게 가까워지지 않아야 했다.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와 경쟁하는 국가였기 때문이다. 또 해군 군비를 늘리거나 해외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려서도 안 되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을 건드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스마르크 시대에는 이 원칙이 칼같이 지켜졌다.
또 그는 자신의 정책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마다 황제를 향해 사퇴 협박을 했다. 상대방이 쉽게 사표를 수리하기 어려울 것을 알고 저지르는 벼랑 끝 전술이었다. 이 방법은 그의 정체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도 주효했다. 정적들은 비스마르크가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불온하다고 여기고 반대 여론을 조성했다. 하지만 막상 당사자로부터 사퇴 선언이 나오자 “대안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비판론이 사그라들었다. 비스마르크가 가장 믿는 구석은 그 자신이 보유한 막대한 영지와 재산이었다. “정치 그만두고 놀면 되지 뭐”라는 자신감이 승부수를 걸 수 있는 뒷배가 되었다.
1973년 뮌스터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고 돌아온 김종인은 박정희 정부의 고용보험 정책과 의료보험 정책을 입안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880년대 비스마르크가 독일의 국민들을 경제적으로 안정시키고, 사회주의의 발호를 막기 위해 썼던 정책이었다. 우파 정권이었던 박정희 정부가 급진적인 복지 프로그램을 도입하게 된 데에는 실용주의가 증요한 배경 노릇을 했다. 약 40년의 세월이 지나 김종인은 정책 전문가에서 정국의 설계자로 발돋움했다. 비스마르크 못지않은 정치 기술자이자 그랜드 디자이너로 인기를 얻게 된 것이다. 2012년 대선에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경제민주화 공약을 통해 좌클릭을 하는 데 일역을 담당했다. 2016년 총선에서는 박근혜 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부각하며 더불어민주당의 비대위원장으로 활약했다. 운동권 정당의 골수 이념보다는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공천을 고민했던 그는 민주당을 호남권 주도 정당에서 수도권 지향 정당으로 바꿨다. “안보는 보수, 경제는 진보”라는 구 새누리당의 실용주의적 방향도 교묘하게 민주당 선거 캠페인에 이식되었다. 더불어민주당이 선거 과정에서 진보 색깔을 줄이자 무당파 성향의 중산층들이 마음껏 표를 던졌다. 이때의 이미지메이킹이 2017년 장미 대선의 문재인 대통령 당선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 번의 선거에 연거푸 패한 보수당은 지난 5월 김종인을 다시 지도자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민주당을 성공 반열에 올려놓은 노하우가 궁금해서라도 그를 영입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과거 진보가 야당이었을 때보다 오늘날 보수 야당의 환경이 훨씬 좋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점이 있다면, 2012년과 2016년에는 김종인이 선거 기간 전후로 잠깐 사령탑을 맡았으나, 2020년에는 거의 ‘1년간 독사장’으로 운영 책임을 떠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과거 비스마르크가 빌헬름 1세의 섭정으로 장기간 전권을 휘둘렀던 것과 매우 유사한 환경이다. 김종인식 정치는 전통 보수 세력에게는 위험투성이다. 기본소득과 상법상 다중대표소송제(본사 주주가 계열사 사안을 두고도 소송할 수 있는 제도)는 그가 정말 보수당 대표가 맞는지 의심스럽게 한다. 보수 군중이 정치적 자산이라고 여기는 인물들을 두고 “대통령감이 아니다”, “정치를 잘 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거침없이 품평할 때에는 오만하게 느껴진다. 자유주의자들을 향해 다짜고짜 “다수결이나 언론 운운하지 말라”고 외쳤던 비스마르크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김종인과 철혈 재상 모두 자리를 거는 데 매우 익숙하다는 사실이다. 그 탓에 민주당 열혈 지지자들은 ‘추호 할배’라는 별명을 유행시켰다. 벌써 그는 지난 12일에도 재보선 기획단 인선을 둘러싼 잡음을 두고 “이대로 가면 비대위가 더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며 엄포를 놨다. 판이 깨지면 다 같이 망한다는 논법이다.
필자는 사석에서 당사자에게 직접 존경하는 역사인물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외국에서는 아데나워와 링컨, 한국에서는 이승만과 박정희”를 꼽았다. 보수당의 대표로서 적확한 언급이었다. 네 지도자의 공통점이 있다면 이념보다는 국가를, 정체성보다는 성과를 지향했다는 사실이었다. 필자는 내심 김 위원장이 비스마르크를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예측 불허의 과정 속에서 귀신같이 결과를 내는 정치인 말이다. 재미있는 점은 보수당 지도자가 바뀐 이후로 진중권, 서민, 김경율, 권경애와 같은 진보 지식인들이 조금씩 오른쪽을 쳐다봐 주기도 한다는 점이다. 영역 넓히기가 중요한 정치 바닥에서는 분명히 의미 있는 성과다. 김 위원장을 두고 “진짜 보수냐 아니냐”하고 논쟁을 벌이기엔 야당의 사정이 너무 다급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새삼 든다.
물론 김종인에게도 나름의 정치적 숙제와 넘어야 할 벽이 있을 것이다. 비스마르크도 넘지 못했던 벽 말이다. 동서고금의 역사에 밝은 김 위원장 본인의 심중(心中)에 생각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