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 이상국의 뷰] 한글날 세종대왕은 지하에서 통곡 안하신다

2020-10-09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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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균 국무총리가 9일 서울 경복궁 수정전에서 열린 한글날 경축식에서 축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글날 코스프레'하는 미디어들의 우스꽝스러움
한글은 파괴되지 않는 글자…세종대왕이 쾌재를 부르실 판

내 작품 훼손한 놈들?

한글날이 되면 으레껏 많은 언론들은 순한글 사용론자, 아니 한글 순결론자가 된다. 364일 동안 열심히 쓰던 외래어와 신조어, 혹은 유행어들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경악하며 잘 쓰이지 않는 고유어까지 찾아내 써대면서 유난을 떤다. 한글날 이튿날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이틀전 상태로 돌아가 있음은 물론이다.

우리 한글은 정말 파괴되어 민족정기마저 걱정되는 수준에 이른 것일까. 세종대왕은 해마다 한글날만 되면 지하에서 내 작품 훼손한 고얀 놈들이라면서 통곡을 하시는 것일까.

우선 한글이 파괴되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우리말과 한글은 다른 것이다. 우리말은 입으로 쓰는 말을 중심으로 표현한 것이고, 한글은 문자체계이다. 세종대왕은 우리말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우리말을 적는 글자를 만들었다.

'나랏말씀(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글자)끼리 서로 아귀가 맞지 않기에 이를 안타깝게 여겨서" 만들었다고 천명하지 않으셨던가. 세종 이전에도 우리말은 있었지만 그걸 어려운 표의문자인 한자로 쓰려다 보니 보통 사람들이 힘겨워하는지라, 그것을 소리나는 대로 적는 표음문자로 바꾼 것이다.

한글 파괴는 없다

한글은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 말을 소리나는 대로 적는 기능은 언제나 살아있다. 세종대왕이 위대한 점이 여기에 있기도 하다. 요즘 날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신조어는, 한글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역설이기도 하다. '말'의 파괴와 변용을 몹시 좋아하고 '말장난(언어유희)'을 즐기는 겨레인 우리로서는, 어떤 말도 글자로 적어낼 수 있는 한글을 가진 것이 몹시 든든할 뿐이다.

한글파괴란 말은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말'의 파괴이다. 시대의 미묘한 감정과 소통의 복잡다기함을 담아내기 위해서, 체계화되어 있는 '말'을 뒤틀고 흔들어 새로운 의미와 표현을 추가하는 일은 어쩌면 언어의 생기와 활기를 말해주는 것에 가깝다. 폭주하는 신조어에 국어사전이 못 따라와 쩔쩔 매는 현상은, 오히려 그 자체가 사회학적인 연구대상이지 언론이 연례행사처럼 비난을 실어나를 일은 아니다.

한글이 지닌 문법의 파괴는 어찌 하느냐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언어행위가 준수하던 문법이 변형되고 창조되는 것으로 읽는 게 옳지 않을까. 문법은 언어행위들의 법칙을 모아놓은 결과물이지, 그 법칙을 이유로 언어행위를 옥죄는 수단이 되어선 안되지 않을까. 다만 여기에 새로운 말들에 대한 사회적인 합의의 정도를 따지는 보조적인 연구와 언어정책적 판단 정도는 필요할 것이다.

ㅋㅋㅋ ㅎㅎㅎ ㅍㅍㅍ ㅜㅜㅜㅜㅜ

문자 소통이 일상화되면서 '문자'가 말을 대신하는 현상이 늘어나면서 말과 문자가 서로의 경계를 상당히 넘나드는 것은 사실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은 특유의 '파자(破字)'의 축약법까지 받아내면서 훌륭하게 제 기능을 하고 있다고 나는 본다. 타이핑 오류까지도 신조어로 등장하고, 방송에서 스타의 말실수까지도 유행어가 되는 시대.

화성인이 와도 '문자와로 사맛게' 할 수 있다

한글은 그 모든 경우의 수를 모두, 소통 가능한 것으로 유통시킬 수 있는 최강의 글자라고 생각한다. 세종대왕은 아마 쾌재를 부르실 것이다. 화성인이 침공해서 한글을 파괴하려 해도, 그들의 말까지 다 적어서 '문자와로 사맛'게 만들 것이 틀림없다. 새로운 삶과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소통을 새로운 '말'에 담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그 모든 것이 한글이란 우주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신조어들은 무한한 한글 영토의 재발견이다.

1889년 고종황제의 외교자문역이었던 호머 헐버트 박사가 뉴욕트리뷴에 올린 칼럼 제목은 'The Korean Language'였다. 한글의 우수성을 19세기에 세계에 알린 글이다. 그는 1892년 1월 '조선글자(한글)'라는 논문을 발표해 한글의 문자적 우수성에 대해 조목조목 밝혔다. 알파벳보다 훨씬 우수한 한글에 탄복하는 그의 말들은 한글날의 반짝 애국의 치렛말보다 더욱 와닿는다.

"글자 구조상 한글에 필적할 만한 단순성을 가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모음은 하나만 빼고 모두 짧은 가로선과 세로선 또는 둘의 결합으로 만들어진다. 영국이나 미국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갈망하고 식자들이 심혈을 기울였으나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한 과제가, 이곳 조선에서는 수백년 동안 현실로 존재했다. 표음문자 체계의 모든 장점이 여기 한글에 녹아 있다. 영어는 모음 5개를 각각 여러 개의 다른 방법으로 발음하기 때문에 이러한 체계가 절대 불가능하다. 조선어는 영어가 라틴어보다 앞서 있는 만큼 영어보다 앞서 있다. 조선어에 불규칙 동사 따위는 없다. 어미를 한번 배우고 나면 누구든지 곧바로 모든 동사의 어형 변화표를 어간만 가지고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말 철학사상가 다석 류영모(1890~1981)는 "한글 글자 한 자에 철학개론 한 권이 들어있다"고 말했다. 이 말을 헐버트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감히 말하건대 아이가 한글을 다 떼고 언어생활을 제대로 시작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영어 ‘e’ 하나의 발음 및 용법의 규칙과 예외를 배우는 시간보다 더 적게 들 것이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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