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경에서 신의 숨결을 느꼈다
천부경(天符經)은 출처의 근거가 미약한 게 사실이다. 단군이 지니고 있던 천부인(天符印, 하늘의 증표인 도장)에 적힌 글이라는 설이 있으며, 환인이 환웅에게 전한 것으로 신라 최치원이 묘향산 바위에 새겨놓았던 것을 1916년 계연수가 발견해 옮겼다는 주장도 있다. 천부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환단고기(桓檀古記, 평안북도 선천 출신의 계연수가 정리한 것을 1979년 이유립이 출간)는 역사학자들로부터 위서(僞書)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도 '천부경'이 줄기차게 관심을 받고 있는 까닭은 뭘까. 그것을 전달한 사람이 의심스러운 것과는 상관없이, 그 짧은 경(經)에 담긴 글이 심오하면서도 절묘하기 때문이다. 천부경은 천지창조와 천지경영의 비밀을 '십진법의 숫자, 9개'로 설파(說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누군가가 '하늘'을 사칭해서 허튼 논리를 펴놓았다고 보기에는, 워낙 정밀하면서도 고도의 이치(理致)에 도달한 면모가 보이기 때문이다. 천부경의 원작자(原作者)를 못 찾는다고 해서, 이 콘텐츠의 가치를 내치기에는 이 경서(經書)의 신학적 바탕이 너무 탄탄하다.
혹자는 류영모가, 기독교 이외의 사상이나 철학에서 신(神)의 숨결을 느끼는 태도가 다신론이나 범신론 같은 입장이라고 혹평할지도 모르지만, 그는 기독교의 세속화한 신앙체계에 충실한 것보다 기독교의 정점에 있는 믿음의 '참'에 독실한 것이 핵심적인 문제라고 여겼다. 천부경에서 발견한 '참'은, 하느님의 도메인이라 할 수 있는 절대세계의 '하나'가 어떻게 상대세계의 차원이나 층위들을 만들어내는지의 비밀을 드러낸다.
一始無始一과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천부경의 첫 구절인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하나가 시작했으나 시작은 없었고 하나가 이미 있었다)이란 말은 성서의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와 정확하게 부합하는 서술이다. 만물이 창조되었으나, 사실은 그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미 말씀이 있었고 그 속에서 이미 생겨나 있는 것이다. 시무시(始無始, 창조되었으나 창조되지 않음)의 만물들은, 원래 앞에 있는 '하나'가 한 일이며, 그 만물의 본질 또한 그 '하나'의 연속일 뿐이다.
성서는 그 이후의 일을, '말씀의 명령'이란 형식으로 말하고 있지만, 천부경은 그것을 '차원(Dimension)'(최근의 과학이 설명하고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으로 풀어내고 있다. '하나(1)'는 세 가지 차원을 지니고 있다. 하늘(天)과 지상(地)과 인간(人)의 차원이다. 천지인은 '하나'의 다른 차원일 뿐이므로, 모두 합쳐봤자 하나일 뿐이지만, 그러나 차원의 개수(個數)로 보자면 3이라는 숫자로 확장된다.
그리고 천지, 천인, 지인 등의 결합으로 보면 2개의 차원들이 생겨난다. 1과 2와 3의 차원들은 1, 2, 1+2, 1+3, 2+3으로 1,2,3,4,5가 만들어진다. 천지, 천인, 지인, 천천, 지지, 인인으로 결합된 짝들은 6을 만든다. 6은 만물의 변곡점이며 변화의 지점이다. 7,8,9는 3과 4를 이용해서 만든다. 3+4=7이며 4+4=8이며 3+3+3=9가 된다. 결국 1,2,3,4,5,6,7,8,9가 모두 하나(1)로 이뤄진 세 개의 차원(천지인, 즉 3)에서 나왔다. 하나(1)가 묘하게 확장되어 1만이 생겨나고 죽는다. 1만이 바로 만물이며, 창조된 천지다. 1만으로 활용도를 높였지만 본질은 그냥 하나(1)일 뿐이다.
숫자로 표시한 천지창조의 원리
천부경은 이렇게 숫자로 천지창조를 그려낸 뒤, 창조된 천지가 어떻게 하나로 귀의(이것을 귀일(歸一)이라 한다)하는지를 놀랍도록 선명하게 설명해놓고 있다. 만물은 어떻게 하나로 돌아가는가. 인간이 태양을 우러르면 밝아진다. 태양은 바로 하늘의 하나를 바라보는 방향이다. 이 '우러러 밝아짐'이 바로 신앙이며 신관(神觀)이다. 그 주체는 물론 인간이다.
인간이 우러러 밝아지면, 사람 마음속에 두 개의 다른 차원 하늘(天)과 지상(地)이 들어와 하나가 된다. '하나'인 사람이 죽었지만 죽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원래 있던 하나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천지창조와 죽음 이후의 영생을 설명하는 이 강렬하고 우렁찬 경전을 다른 곳에서 읽은 적이 있던가. 하나로 시작해 하나로 끝났으며, 시작하지 않은 하나와 끝나지 않은 하나로 이어지는 '하늘과 인간의 위대한 접속 현장', 류영모는 천부경에서 이걸 발견한 것이다.
다석만큼 천부경을 풀어낸 이는 없었다
류영모는 육당 최남선을 통해 대종교(大倧敎)의 3대교주 윤세복(윤세린, 독립운동가, 1881~1960)을 알게 된다. 그는 단군의 홍익인간 사상으로 일제에 항거했던 사람이다. 그가 단군을 주목한 까닭은, '하느님'을 받드는 천신사상가였다는 점이었다. 이 나라가 '하느님의 나라'라는 증표가 단군에 있었다. 류영모는 1963년 12월에 천부경을 우리말로 옮겼다.
소설 '단군'(1996년 출간)에서 작가 김태영은 이렇게 말했다. "천부경은 참나를 깨달은 사람이 아니고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 줍니다. 지금까지 나는 수많은 천부경 해설서를 읽어봤지만 다석 선생만큼 그 핵심을 제대로 찌른 것은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천부의 부(符)는 흔히 부신(符信)이라고 표현한다. 서로 같음을 증명하기 위해 나눠가지는 것이 부신이다. 혹은 우리가 자신의 행위나 마음을 입증하기 위해 하는 사인이 부(符)이다. 하늘이 스스로 서명한 경전이 천부경이며 하늘과 인간이 나눠가진 보물이 바로 천부경이란 얘기다.
천부경은 아름다운 문장이며 천부적인 지혜로만 펼칠 수 있는 사유다. 논리적인 언어로 펼쳐진 숫자세계, 81자로 펼친 삼라만상의 얼개도다. 하나는 시작되어도 시작된 게 없고 시작된 뒤에도 하나이다. 끝나도 끝난 게 없으며 끝난 뒤에도 하나가 있다. 즉 천지인으로 이뤄진 궁극의 하나가 만물을 움직이고 변화하게 하는 근원이라는 것을 천명한 글이다. 하늘과 땅과 인간이 그 계약서를 도장을 찍어 한 부씩 나눠 가지고 있는, 존재의 근거서류다. 류영모는, 그 서류가 지닌 유효함을 찾으러 나선 우주의 선각자라 할 만하다. 어렵지만 한번 읽어보는 게 실감을 얻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류영모 우리말 풀이 천부경 읽기]
류영모가 풀어놓은 '천부경'은 우리말이지만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하늘 댛일쪽 실줄 (天符經)'이란 이름부터가 몹시 낯설다. <하늘(天)에 닿는 쪽(符) '말씀 연결된 줄(經)'>로 풀 수 있다.
하실 너나 없 비롯 한(一始無始一 일시무시일)
풀이 셋 가장 못다할 밑둥(析三極無盡本 석삼극무진본)
[필자 풀이] 하나가 시작됐으나 시작된 건 없이 다시 하나다.
세 가지의 극(하늘, 땅, 인간)을 아무리 분석해봐도 다함이 없는 근본이다.
천부경은 '일경(一經, 일의 경)'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일(一)이 모든 것을 관통한다. 하나는 바로 하느님이며, 하나뿐인 신(유일신)이다. 이 경전은 인간이 쓴 문체가 아니라, 신이 직접 쓴 듯한 문체로 읽히도록 해놓았다. 일시무시일은, '하나가 시작되었으나 하나가 시작된 것이 없다'라고 풀면, 이 경전이 지닌 콘텐츠 전체를 놓치는 것과 같다. "하나가 시작되었으나 시작은 없었고 그냥 하나가 이미 있었다." 이런 의미다. 만물의 태초가 시작되기 전에 말씀이 있었다. 성경 첫 구절이다. 류영모는 이 점을 표현하기 위해, '없 비롯 한'이라고 한자의 어순으로 그대로 풀었다. 마지막의 '일(一)'이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있었던 '하나'를 표현한 풀이다.
'셋 가장'은 천지인 3극(極)을 표현한 말이다. 왜 3극부터 나오느냐 하면, 이 경이 하늘과 땅과 인간이 나눠가진 증표였기 때문이다. 천지인을 저마다 나무장작처럼 쪼개봐도 그 뿌리까지 다 팰 순 없다. 그 뿌리가 바로 시작할 때부터 원래 있던 그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늘 하나 한(天一一) 땅 하나 맞둘(地一二) 사람 하나 세웃(人一三)
하나 그득 밀썰 되 다함 없이 된 셈임(一積十鉅無櫃化三)
[필자 풀이] 하늘은 하나의 첫째이며, 땅은 하나의 둘째이며, 사람은 하나의 셋째이다. 하나가 쌓여 열로 커져도. 없는 궤짝이 셋일 뿐이다 (본질은 아무리 더해도 더해지지 않는다)
신의 뜻 안에 있는 천지인의 본질은, 아무것도 없는 텅빔이다. 순서만 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없는 순서를 쌓는다고 늘어나는 건 없다. 텅빈 궤짝처럼 그냥 빈 것일 뿐이다. 사물을 세는 산수(算數)를 하자는 게 아니라, 숫자 속에 들어있는 진리를 읽으라는 얘기다.
하늘 맞섯(天二三), 땅 맞섯(地二三), 사람 맞섯(人二三), 한셋 맞둔(大三合)
[필자 풀이] 하늘은 둘이면서 셋이다. 즉 하늘은 지인(地-人)이면서 천지인(天地人)이다.
땅은 둘이면서 셋이다. 즉 땅은 천인(天-人)이면서 천지인(天地人)이다.
사람은 둘이면서 셋이다. 즉 사람은 천지(天-地)이면서 천지인(天地人)이다.
(하늘과 땅과 사람은 모두 천지인과 같은 것이며, 각자는 다른 요소들을 품고 있다.)
천지인은 모두 그 안에 하나를 지니고 있기에 그 셋이 크게 합쳐야 한다.
새로 나온 숫자는 2다. 천지인을 말하는 1(하나)이자 3(삼극)은, 둘씩 짝 지으면 2가 된다. 그러니까, 1과 2와 3은 결국 같은 것이 쌓여 1과 다름 없는 빈 궤짝을 이루는 것이다. 당연히 앞으로의 숫자들도 빈 궤짝으로 1의 쓰임(用)이며 확장일 뿐이다. 4와 5도 새로운 숫자가 아니라, 4는 천지인(3)에 하나(1)가 합쳐진 것이고, 5는 천지인(3)에 둘(2)이 합쳐진 것일 뿐이다.
옮기어 셋 네모로 쳐 이룬 고리, 다섯 이룸 (運三四成環五七)
[필자 풀이] 육은 칠팔구(7,8,9)를 낳고 삼사(3,4)를 움직이며 오칠(5,7)을 주위에 두른다. 6은 천-천 천-지 천-인 지-지 인-인 지-인이란 6개 경우의 수를 말한다.
6은 어떻게 7,8,9를 낳는가. 6에서 1을 더하면 칠(6+1=7)이며, 2를 더하면 팔(6+2=8)이며 3을 더하면 구(6+3=9)가 된다.
6은 어떻게 3,4를 움직이는가. 육은 바탕숫자인 3과 4를 더해 칠(3+4=7)을 만들고 4와 4를 더해 팔(4+4=8)을 만들고 3과 3과 3을 더해 구(3+3+3=9)를 만든다.
5,7을 주위에 두른다는 것은, 앞과 뒤에 5,7이 있다는 얘기다.
이 얘기를 왜 하느냐 하면, 6은 절반을 넘어서서 변화를 만들어내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6은 변화가 힘을 얻는 시점이며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는 터닝포인트다. 천부경의 글자 배치를 보면 세로로 9자이고 가로로 9행이다. 합쳐서 81행인데, 그 중심에 육(6)이 있다. 변화의 중심을 쥐고 있는 숫자라는 의미다.
하나 고이 노닐음 잘 가고 잘 온데 갈리어 쓰이나, 꿈쩍 않는 밑둥 밑둥맘 밑둥 (一妙衍 萬往萬來 用變不動本 本心本)
[필자 풀이] 하나는 묘하게 확장되어 1만이 가고 1만이 온다. 쓰임이 바뀌어도 본질은 움직이지 않는다. 본질의 마음은 본질이다.
1만은 만상(萬象)을 뜻한다. 천지인의 하나가 만상을 이룬다는 뜻이다. '하나(1)'는 여러 가지 쓰임으로 바뀌지만 그 본질인 '하나(1)'가 변한 적은 없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며 본심이기 때문이다. 빈 궤짝을 쌓아봤자 텅빈 허공일 뿐이라는 얘기와 같다.
태양 뚜렷 밝아 사람 간데 하늘 땅 하나 한 마침 없는 긑 하실(太陽昻明人中天地一 一終無終一)
[필자 풀이] 태양을 우러르면 밝다. 사람 속에 천지가 있으니 하나이다. 하나가 끝나도 끝난 건 없다.하나는 그대로다.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이란 말을 주목하라. "사람 속에 하늘과 땅이 있으니 하나다." 류영모는 이 말에서 '예수'를 느꼈을 것이다. 성령이 천지인으로 분리된 셋이 아니라, 천지인에게 공유된 '하나'라는 사실을 이렇게 명쾌하게 밝힌 글이 있었던가. 천부경은 '하나'가 어떻게 확장되느냐를 보여주는 탁월한 사상논서이다. 하나가 만상을 만들어내면서도 어떻게 '하나'를 유지하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는 하느님이며 성령이며 얼나이다. 그것은 모두 하나이며 사라지는 법이 없으며 생겨나는 법도 없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