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69)] "나는 하느님 빽이 있다" 공자가 외친 까닭

2020-09-23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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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모의 '중용(中庸)신학', 유학 속에 숨은 '얼나'를 발견하다

하늘이 날 보냈는데 사람들이 어쩌겠는가

류영모는 20세 때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갔다. 여기서 학생을 가르치던 시당 여준(1862~1932)과 단재 신채호(1880~1936)를 만나면서 동양학에 눈을 뜬다. 노자와 불경, 그리고 '중용'을 읽었다. 월남 이상재(1850~1927)의 뒤를 이어 서울 종로YMCA 연경반 강단에서 35년간 강의를 하면서 류영모는 기독교 신앙인들 앞에서 동양고전을 두루 가르치는 스승이었다. 유교경전 가운데서 특히 중용을 직접 우리말로 풀어 강의하는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왜 류영모는 중용을 그토록 귀하게 여겼는가. 중용은 유학(儒學)의 정수(精髓)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 BC483~BC402, 이름은 급(伋)이라고 한다)가 공자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풀어 쓴 경전이다.
 

[공자]

공자는 하늘(天)을 믿었던 '신앙인'이었다. 그는 한때 광(匡)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혔다. 죽을 수도 있는 위기일발의 상황이었다. 제자들이 몸을 피하라고 권하자 이렇게 말했다. "文王旣沒, 文不在玆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乎 (문왕기몰 문부재자호 천지장상사문야 후사자부득여어사문야 천지미상사문야 광인기여여호)" <주나라 문왕이 이미 죽었고, (그를 이은) 문(文)이 여기 있지 않은가. 하늘(天)이 이 문(文)을 없애려 했다면 나중에 죽는 사람인 내가 이 문(文)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늘이 이 문(文)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면, 광마을 사람들이 나를 어쩔 수 있겠는가.>
공자의 학문과 사상과 믿음 전부를 '사문(斯文, 이 文)'이라고 부를 만큼 유명해진. 논어 속의 고사(故事)다. 공자는 하늘의 권능을 백그라운드로 여기고 있었다. 자신이 '문(文, 주나라의 예악 문화를 뜻한다)'을 번창시키는 미션(천명,天命)을 타고 났다고 굳게 믿었다. 이른바 하느님 '빽'을 가진 나를, 감히 (오해를 품은) 인간이 함부로 죽일 수가 있겠는가. 제자들 앞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당당히 위기에 맞선 저 '믿음'은 '신앙'이란 말 외에 달리 표현하기 어렵다.

하늘에서 시작해 하늘로 끝나는 책

'중용'은 공자가 남긴 가장 형이상학적인 어록과 사상을 담고 있다. 여기서 형이상학은 신학(神學)을 뜻한다. 중용을 유학의 한 경서가 아니라, '동양의 바이블'로 읽은 사람이 류영모다. 이 책은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으로 시작해서 '상천지재 무성무취 지의(上天之載 無聲無臭 至矣)'로 끝난다. '하늘의 뜻을 성(性)이라고 한다'는 말로 시작해서, '하늘이 하는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지만 가장 큰 일을 한다'는 말로 마무리짓는다. 하늘로 시작해 하늘로 끝난다.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
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

하늘 뚫린 줄을 바탈이라 하고
바탈 타고난 대로 살 것을 길이라 하고
디디는 길 사모칠 것을 일러 가르치는 것이라 한다
(다석 류영모의 '중용' 풀이)

(신의 말씀을 성(性)이라 하고
신의 말씀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하고
신의 말씀을 따르는 일을 훈련하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


사람의 얘기를 꺼내면서 하늘을 거론하는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지만. 더 인상적인 것은, 하늘의 뜻과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통하느냐에 대한 명쾌한 언급이다. '중용'은 말한다.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인간의 '도(道)'라고 했다. 노자처럼 '도(道)'가 도 아닐 수 있다고 에두르지 않았다. 한자로 말하면 솔천명(率天命)이다. 그 '도(道)'를 두텁게 하는 것이 교(敎, 가르침)라고 했다. 종교(宗敎)를 이렇게 명쾌하게 설명한 사람이 또 있을까. 종교는 하늘(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중용은, 종교의 개념을 15자(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에 담았다.

중용 첫 장은 마태오복음과 같다

류영모는 중용 첫 구절인 '천명지위성'과 '솔성지위도'를 성경 구절(마태오 6:10)과 같다고 보았다. 하늘의 뜻이 곧 성(性)이며 성을 따르는 것이 도(道)라는 말은,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이다'와 일치한다는 얘기다.

류영모는, 1968년 광주 무등산의 김정호 목장에서 1년간 묵으면서 '중용'을 우리말로 완역했다. 유교경전 가운데 그가 우리말 완역을 한 것은 중용이 유일하다. 우연한 일은 아니다. 중용은 '다석 신관(神觀)'의 한 뿌리이다. 그는 중용을 '가온씀'이라고 불렀다. 가운데(中)와 씀(庸,用)의 의미를 담은 순우리말이다. '중용'을 현대식으로 푼다면, '가운데 사용법'쯤 될까

'가운데'는 인간으로 보자면, '속'을 말한다. 류영모는 참나는 속의 속이라고 말한다. 속의 속이 중(中)인데 그 중이 '참나'라고 했다. "참나는 어디에 있는가. 내 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말했다. '중용'을 아예, 신과의 소통으로 풀어 '줄곧뚫림'으로 옮기기도 했다. 신과 인간 간에 '뚜렷한 채널'이 개설되어 있는 신앙상태를 중용으로 본 것이다. 신통(神通)이 중용이라는 말도 했다. 어원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개념을 뚜렷이 하는 방편으로 풀어냈다.

류영모는 이 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안다는 것은 하느님과 교통이 되어서 아는 것입니다. 성령과 무엇이 통하는 것이 있어야 바르게 옳게 발달이 됩니다. 무슨 신앙이 아니더라도 자주 하느님과 통하여야 합니다. 참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하느님이 일러주는 것을 안다는 말입니다."
 

[다석 류영모]



중용의 개념을 독창적으로 해석하다

주자는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알맞은 삶의 태도를 '중용'이라고 설명했다. 중용의 중(中)은, 제사 때에 좌우로 알맞게 꽂아놓은 깃발을 묘사한 상형문자다. 구(口)는 제사장에 배치한 기물과 예물의 모습이고 ' I '는 가운데에 위치한 깃발이나 왕을 의미한다. 이 말은 제사의식과 관련이 있다. 좌우의 균형있는 배치는 예의를 의미하며, 왕이나 제사장이 통천(通天)의식을 행하는 것이 바로 '중(中)'이다. 순자는 '중(中)'은 예의를 말한다고 했다. 용(庸)은 용(用, 씀), 상(常, 늘), 범(凡, 무릇)의 뜻으로 '항상 쓰는 것'이다. 쓸 것을 제대로 늘 쓰는 것은 또한 예의다. 이 두 말이 합쳐진 '중용'은, '하늘에 대한 예의를 잘 갖추는 소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류영모는 신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 중용이라고 밝혔다. 우리가 받은 본바탈(性)로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중(中)은 제나의 감정인 희로애락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이며 제나 너머의 얼나를 가리킨다고 보았다. 화(和)는 제나의 감정이 일어나도 얼나의 절제를 받으면 부드러워지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중용이 '하늘과의 소통'이란 주자의 풀이는 적극적으로 채택했다. 류영모는 '줄곧뚫림(常通天)'이라고 풀기도 했다.

옛사람들은 신에 대한 예의에 더 주목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신과의 합일 혹은 소통이다. 중용에서 '중(中)'이란 말을 쓴 것은, 천명(天命, 하늘의 뜻)이 어떻게 인간에게 들어오는지를 풀기 위해서다.  중용이 최고의 형이상학 경전이 되는 건 이 때문이다.  우리 속에 이미 천명이 들어와 있다. 천명은 하늘에서 내려온 '성(性)' 그대로 들어와 있다. 아직 인간의 상태인 '중(가온, 中)'으로 바뀌지 않은 미발(未發)이다. 이것이 희로애락으로 발한다. 감정으로 발할 때 도(度)에 맞지 않으면, 과불급(지나치거나 모자람)이 된다. 우리 인간들이 흔히 보여주는, 감정들은 '오버'와 '미지근'으로 하늘의 뜻을 벗어나고 있는 셈이다. 



미발의 하느님 깨우는 게, 성심성의(誠心誠意)

희로애락으로 발현하기 전의 중(中)을 미발지중(未發之中)이라 하는데 이걸 잘 관리하고 제어하고 다듬어야 한다. 하늘에서 받은 본연의 천성 그대로 순종하여 과불급 없이 희로애락을 발휘하면 도(度, 정도)에 맞고 '절(節, 절도)'에 맞는 중화(中和)를 얻는다. 공자와 자사는,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늘 겪는 희로애락이, '하늘에서 온 성(天性)'을 드러내는 것임을 포착했다. 희로애락을 발하기 전에, 숨어계시는 미발(未發)의 하느님 뜻에 따라 알맞은 감정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가운데 사용법'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대체 어떻게 미발의 하느님 뜻을 알맞게 작동하게 하느냐. 유일한 솔루션은 성(誠)이다. 정성스럽게 하는 것이다. 하늘의 도는, 저절로 참되어 진실하며 망령됨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저절로 참될 수 없기에 참되도록 노력을 하여야 한다. 이것이 사람의 도이다. 사람의 도를 이루려면 마음을 정성스럽게 쓰는 수밖에 없다. 정성스러움은 자신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지만, 남과 세상과 만물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한다.

류영모는, 신앙을 이토록 구체적이면서도 생생한 방식으로 설명한 프로그램을 만나면서 중용에 깊은 경외(敬畏)를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중(中)은 류영모의 관점에서 '얼나(성령)'로 번역되기도 했다. 미발지중(未發之中)은 모든 인간에게 들어와 있는 얼나다. 하지만 얼나를 제대로 쓰지 못하여(不庸) 감정과 욕망의 알맞음을 잃어버리고 마침내 '짐승(육신에 이끌린 삶)'으로 살아가는 반중화(反中和)의 뭇삶들. 그걸 구하고자 하는 공자의 깊은 뜻을 류영모는 읽어냈다. 

공자는 하느님을 믿는 성자였다. 주나라의 예악문화가 하늘에서 인간에게 준 천성(天性, 하느님의 뜻)의 발현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는 스스로가 이 문(文)을 새롭게 일으키는 소명을 받고 온 '하느님의 메신저'라고 여겼다. 물론 그가 삶과 죽음을 궁구(窮究)하는 종교적 차원에서 '하늘'을 신앙화한 것은 아니다. 인문적 가치에 대한 인간 본연의 긍지와 자부심을 하늘에까지 연결시킨 독특한 천부(天賦)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천신(天神)의 이데아가 인간 개인개인의 내면 속으로 들어와 '하늘이 지닌 중(中)'을 발현시킨다는 개념은, 류영모의 얼나사상을 깊고 치밀한 짜임새로 진화하게 하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류영모는 '가온씀(중용)'이란 시를 썼다.

하느님 나라가 그대 맘 속에 있다

莫妄論斷中庸義 (막망논단중용의)
擇善固執中庸仁 (택선고집중용인)
人我中庸失爲己 (인아중용실위기)
天地中庸得成人 (천지중용득성인)
元一貫之之謂中 (원일관지지위중)
誠實用之之謂庸 (성실용지지위용)

함부로 단정하지 말라 줄곧 뚫림의 뜻을
착함을 가려 굳게 잡음이 줄곧 뚫림의 언
사람이 내가 줄곧 뚫리면 제나를 잃지만
하늘땅의 줄곧 뚫림은 얼나를 이룬다
으뜸 하나로 뚫리니 이 일러 가온
참 말씀 받아쓰니 이 일러 씀이다

(중용인지 아닌지에 대해 함부로 단언하지 말고
중용의 핵심에서 바른 것을 잡고 굳게 지켜라
남과 나 사이의 중용은 나를 위해 잃는 것이며
하늘과 땅 사이의 중용은 사람됨을 얻는 것이다
원래의 하나를 뚫고 가는 것을 중(中)이라 하며
성(誠)을 실하게 하여 잘 쓰는 것을 용(庸)이라 하네)


류영모는 '온통'인 하느님 속을 뚫고 올라가는 것이 중용이라고 했다. '중(中)'은 깃대로 틀 가운데를 뚫는다는 상형문자이고 '용(庸)'은 두 손으로 막대기를 들고 뚫고 올라가는 것을 나타낸 회의문자이며 형성문자라고 했다. 낱동인 내가 온통인 하느님 속을 뚫고 올라가는 것을 나타낸 것이라고 했다. 예수도 "하느님 나라는 너희 맘 속에 있다."(루가 17:21)고 말했다. 중용만큼, 다석의 기독교 사상의 본령을 정확하게 짚고 있는 경전도 드물 것이다.

중용의 '실천교리'가 주역이다

중용은 조선시대 수백년의 이기논쟁을 촉발한 단초가 되기도 했다. 이발(理發)이니 기발(氣發)이니 하며 마음의 단서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 따졌다. 철학자 박종홍(1903~1976)은 중용을 읽으면서, 이 경전이 왜 발(發)하여 맞는 것을 선(善)이라고만 말하고, 어떻게 하면 맞게 할 수 있는지 실천과학의 이론으로 전개하지 않았는지 궁금해 했다는 말을 한다. 서구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론에는 나름의 분석이 들어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 답을 그는 다른 데서 찾았다. 주역의 변역(變易) 이론에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건괘를 보면 그 효사가 '초구는 잠룡이니 물용(勿用)이라' 했다. 물 속에 들어있는 용이니 쓰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다. 미치지 못할 때의 태도로서 취할 바를 말하고 있다. 꼭대기의 '상구는 항룡(亢龍)이나 유회(有悔)'라 했다. 올라가는 용은 후회한다. 지나침을 경계한 것이다. 즉 주역 전체의 논리는 중용사상으로 일관하고 있다. 길하고 흥하고 허물없다는 표현으로 '맞고 안맞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중용의 실전(實戰) 코스라 할 만하다.

한편 박 교수는 중용에 대해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한국인들은 생리적으로 '중용'에 대한 감각이 있다. '멋'이라는 말이 있다. 멋은 분명히 맞을 것이 제대로 맞았을 때에 느껴지는 것이다. 때와 장소와 사물과 우리와 모든 것이 호흡이 맞았을 때 멋드러진 것이 된다. 일거수 일투족이 멋을 알고 멋을 찾는 백성이다. 맞는 것이 무엇인지 과부족이 없음이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남의 멋을 흉내내는 것으로 '알맞음'을 창조할 수 없다. 우리에게 잘 맞는 '가온씀'이 있다. 류영모라면, 하느님을 향한 그 줄기찬 속알도 우리만의 깊고 웅숭한 멋이 있으며, 그 멋은 씨알의 '믿음숨결'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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