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수일 경동교회 담임목사(1952~ )는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 신학박사로 한신대 신학전문대학원장을 지낸, 국내에서 손꼽히는 신학자 목자(牧者)이다. 그는 류영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독일에 있으면서 왜 우리가 라틴어나 독일어로는 신학을 하면서 같은 소리글인 우리글과 말로는 신학을 할 수 없는 듯이 생각해왔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왔다. 그것은 물론 지금까지 우리 신학이 지나치게 유럽지향적이었기 때문이거나 어려운 중국문자의 개념을 빌려와야 비로소 그것이 학문적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에게 부딪혀온 류영모의 충격은 무엇보다 말의 뜻풀이에 있다. 어렵고 추상적인 개념을 그는 누구나 알고 있는, 그러나 미처 그 뜻을 곱씹어 생각하지 못한 생활언어로 풀어낸다. 은혜를 '힘입어'로, 시간을 '덧'으로 풀어내는 것이나 우리말의 뿌리를 찾아 내 얼굴을 '얼이 든 골짜구니' 등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경탄'도 곱씹을 만하지만, 신학자로서 하나의 우리말 개념이 어떻게 통찰로 이어지는지를 직접 느낀 것을 밝힌, 다음 말이 더 의미심장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 낱말은 '깨달음'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깨달음에 대한 그의 통찰이다. 우리는 진리를 깨닫는다고 흔히 말한다. 그런데 깨달음은 '깨다'에서 나온 것이다. 깨달음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보는 것과 관계되었고, 그것은 한자 풀이에서도 알 수 있다. (깨달을 각(覺)이, 깰 '교'자로도 읽히는 점과, 한자 뜻글자 속에 들어있는 '견(見)' 자를 의식한 풀이일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이 깨는(破) 것과 관계된다는 류영모의 통찰은 놀랍다.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깨져야 한다는 것이리라. (깨져야 할) 그것은 선입견이거나 편견일 수도, 진리를 깨닫는 자기 자신일 수도, 진리 그 자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로써 류영모는 흔히 학문적 언어라고 말하는 이른바 주객도식(主客圖式)을 극복했고, 또한 진리를 깨닫는 것이 언제나 깨지고 깨지는 과정임을 가르친 것이다."
깨달음과 파사(破私)
깨달음이, 잠에서 깨는 '각(覺, 느끼는 것)'이나 '견(見, 보는 것)'을 넘어서는 개념이라는 통찰은, 우리말로 된 낱말 자체에 주목해야 얻어진다. 우리말 '깨달음'은 '깨다'와 '닫다(달리다, 이르다)'가 합쳐진 말이다. 깨는 것은 파(破)이며, 닫는 것은 주(走)나 달(達, 도달함)을 뜻한다. 따라서 깨달음이란 말은, 채수일이 말한 것처럼, 선입견을 깨는 것, 편견을 깨는 것, 자기 자신을 깨는 것, 진리 그 자체를 깨는 것으로 개념의 폭이 넓고 깊어진 것이다. 류영모는 이 개념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기 위해 '파사(破私)'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깨달음이란 말을, '육신으로 살고있는 나를 깨는 것'이며, '나를 깨고 나아가 신에게로 닿는 것'이라는 신학언어로 정립한 것이다.
채수일이 '주객도식((subject-object schema)을 극복했'다고 말한 까닭은, 류영모의 '깨달음'에 대한 풀이가 문장의 논리구조 해석을 넘어, 전체의 맥락을 살펴 의미의 완전성을 기했기 때문이다. 이런 표현은, 성서를 읽는 데 있어서 주체와 대상을 따지는 서구 이성(理性)의 분석방식 대신, '통전적(統全的, holistic, 전체론적-맥락적-근원취지 분석적)'인 풀이를 가한 류영모를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통전적 신학(Holistic Theology)은, 모든 것을 방법론적으로 통합하여 온전함을 추구하는 신학을 말한다. 주로 장신대 학장을 지낸 이종성(1922∼2011, 호는 춘계(春溪))의 신학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이종성은 박형룡, 김재준과 함께 한국교회 3대 신학자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통전적 신학을 가리켜 '온신학'이라는 한글 표현을 쓰기도 했다.
한국기독교학술원 원장을 지낸 이종성은 2010년 8월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기독교 외 다른 종교나 사상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혹은 배척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구원의 메시지가 없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종교나 사상들도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이것들은 구원을 얻게 할 수 없지만, 구원을 위한 준비과정으로서 가치가 있습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를 기독교로 끌어올 필요가 있습니다."
발 없는 말씀이 천리(天理) 간다
말아 말 물어보자 나 타고 갈 말 네게 맸으니
내 풀어내 내가 타고 나갈 말을 네게 탈나
고르로 된 말슴이기 가려봄은 되리라
류영모 시조 '말씀에서 말슴을'
류영모는 우리 전통의 시형식인 시조(時調) 쓰기를 즐겼다. 그에게 시조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익숙한 운율로 미묘한 흥취를 살려내는 '천음(天音, 하느님의 소리)'을 연주하는 언어적 악기가 아니었을까.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누가 보면 시조가 아니라 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나대로 시조가 될 수 있습니다. 내 말을 갖다가 운(韻)으로 하고 조금 느낌을 통하게 하여 이러한 시가 되었습니다."
이 시조의 맛을 느끼기 위해선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속담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류영모는 발 있는 말(馬)은 메시지를 전하는 전령(傳令)이 될 수 있지만, 발 없는 말(言)은 그 자체가 메시지라는 점에 착안했다. 천리(千里)는 거리를 말하지만, 천리(天理, 하느님의 뜻)는 목표를 말한다. 류영모는 하느님의 뜻을 향해 말씀을 세우려는 중이다. 위의 시조가 어렵진 않지만 구체적으로 풀어보면 이렇다.
말씀(성령)아 말 물어보자, 나 하늘로 타고갈 말씀(성령)을 말(언어)에 맸으니
말씀(성령) 풀어내 내가 타고 나아갈 말씀(성령)을 내 말(언어)에 태우려 한다
고른 말(언어)로 되어 하느님께로 세운 말씀(성령)인지 판단해볼 일은 되리라
이 시조에서 중요한 것은 '짐승'인 말(馬)은 전혀 없다는 점이다. '말을 탄다'는 표현으로 그런 호쾌한 맛을 준 것일 뿐, 사실은 나의 말(언어)과 하느님의 말씀(성령)이 있을 뿐이다. 나의 말에 하느님 말씀을 동여매고 올려 태우고 나의 말의 힘으로 하느님 말씀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바르게 세운 것인지, 하느님 말씀으로 살펴보면 되리라. 말과 말씀이 하나로 합치되는 합일(合一)을 꿈꾼 시조다.
말씀, 말숨, 말슴
이 시를 읽으면 류영모가, '말'이 신앙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지 느끼게 된다. 그는 빼어난 언어감각으로 말빛(語感)과 개념의 미세한 변화를 드러내고, 사상을 표현하는 도구로 썼다. 그중에, 말씀과 말숨과 말슴에 대한 풀이도 있다.
말씀은 말의 '씀(用, 錄)'이다. 하느님은 말을 쓰시고, 그 말씀을 인간은 받아서 쓴다. 그것이 말이며 글이다. 말씀에는 높이는 뉘앙스가 들어가 있다. 하느님의 말을 쓰는 일은 경건하며, 그것을 받아 쓰는 일은 공손할 수밖에 없다.
말숨은 말씀에서 빚어낸 말이다. '숨'은 인간이 평생 한순간도 멈출 수 없는 호흡이며, 생명의 상징이다. 숨은 받아쉬는 것이며 또한 받은 뒤 내쉬는 것이다. '말의 숨'은 말이 지닌 생명성을 말하고, 생명이 하늘에서 나왔듯 말 또한 하늘에서 나온 생명이란 의미다. 말을 한다는 것을 하느님의 성령을 숨쉬는 것으로, '얼숨'이라고도 한다. 말은 얼의 생명이며, 말씀은 영생의 숨이기도 하다. 말씀(성령)으로 숨쉬는 것이 신앙의 유일한 길이다.
말슴은, 말(언어)이 조심스럽게 서는 것을 말한다. 말'섬'이 아니고 말'슴'인 까닭은, 어린아이가 처음 일어서듯이 두렵고도 조심스럽게 그러나 있는 힘을 다해 서마서마 일어서듯이 몸을 세우는 것을 뜻한다. 말을 세우는 일은, 인간이 땅을 딛고 하늘을 향해 몸을 세우는 일과 같은 중요한 행위다. 하늘을 향한 첫마음을 내는 일이며 하늘을 향한 한결의 우러름을 내는 일이다. 말로서 하늘에 닿는 것, 하늘의 말씀과 교통하는 것. 그것이 말슴이다.
말씀에는 하느님의 말을 알아듣는 고디(貞)의 마음이 있고, 말숨에는 하루하루 하느님의 말로 숨쉬는 숨줄(생명)의 마음이 있으며, 말슴에는 하느님의 말에 닿고자 하는 바탈(천성)의 마음이 있다. 이것이 류영모 사상을 직조(織組)하는 말씀의 형이상학이다.
류영모의 한글예찬 시조
우리 사리사리 똑 바른 말소리:우리글씨
할우 짓음 맨듬 오랜 우린 앞틸람 참잘
암은요 우리 씨알이 터낸 소리 아름답
오으이 오이 부르신 가장 바른소리 세종(世宗)
-ㅣㆍ나투신 남ㄱ에 달린 사람 믿은이:예수
등걸(檀君) 우리 나라님 한울나라 거룩함
류영모의 '바른 소리 옳은 소리'(正音)
우리 결대로 잘 포개 감아놓은, 제대로 바른 말과 글의 맵시
하늘 위해 어느 날 생각하고 만들었는데
역사가 오랜 겨레 앞을 틔워줄 것이니 참 잘 하신 일
암 그렇지요 우리 백성이 길을 낸 소리가 아름답네
백성들 어서들 오라고 부른 정음(正音) 만든 세상의 임금(世宗)
십자가 나타난 나무에 매달린 사람, 신앙인 예수
역사의 그루터기 단군, 겨레의 시조 천국서 왔으니 거룩하다
이 시조의 첫 수는 한글 창제를 찬양하고 있다. 하늘을 위해 세종이 만들었고 우리 겨레의 앞을 틔워줄 '참 잘 한 일'이라고 예찬한다. 그리고 그 한글을 쓰는 언중(言衆)에 대한 찬사도 잊지 않았다.
두 번째 수는 의미심장하다. 한글과 관련해, 세종대왕은 물론이고, 예수와 단군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종이 한글로 성취한 핵심은 애민정신과 소통정신이다. '오으이 오이(어서들 오게)'는 백성들을 부르는 군주의 따뜻한 콜이다. 이 애민(愛民)의 콜은, 신이 지친 인간을 부르는 저녁콜과도 닮아있다.
한글과 예수를 연결한 것은 한글이 '하느님과 통하는 신앙과 신학의 언어'임을 밝힌 것이라 볼 수 있다. 특히 한글로 표현한 십자가 '으이아(-ㅣㆍ)'는 기독교의 핵심 사건을 한글로 이미지화한 것으로, 성서적인 것들을 한글로 표현해낼 수 있음을 드러낸 글자이기도 하다.
단군을 언급한 것은 국수주의나 민족주의에 대한 추수(追隨)가 아니다. 천부(天父) 사상의 단군 시조 또한, 한글의 신학적 개념 자산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한글은 세종 때 만들어졌지만, 우리말의 뿌리는 단군에서 온 것이 아닌가. 세종과 예수와 단군은, '한글과 우리말 신학'의 기반을 이루는 역사적 근원이라는 점을 밝혀놓은 셈이다.
精子始初出發時(정자시초출발시)
母體先驗酷似險(모체선험혹사험)
生物最終感觸末(생물최종감촉말)
色黃音玄幻一點(색황음현환일점)
(1957.1.10)
죽음은 탄생과 닮았다
정자가 처음 생겨나 움직이기 시작할 때
엄마가 먼저 겪는 건 죽음과 비슷한 것이다
살아있는 것이 맨 마지막으로 느끼는 것은
빛깔은 노랗고 소리는 어둑한 환각같은 한 점이다
탄생과 죽음은 맞물려 있다. 무엇이 태어날 때, 그 무엇은 죽는다. 그것이 생태계다. 태어나는 것이 죽이는 것이며 죽는 것이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죽어야 태어나고 태어나면 죽는다. 바로 직결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지라도 전체가 경영되는 원리는 반드시 그렇다. 우리는 하나의 개체로 하나의 생명과 한번의 죽음만을 맞을 수밖에 없기에, 이 거대한 원리를 비켜보거나 유예하거나 부정해보려 한다. 조금 더와 덜은 있겠느나 저 필생과 필멸은 피하지 못한다.
류영모는 정자가 생겨날 때, 모체는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을 통찰했다.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그 탄생의 매체가 된 다른 생명은 죽음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실제로 예전엔 많은 여성들이 출산 과정에서 죽었고, 그 죽음 속에서 아기만 살아나기도 했다. 인간은 이것을 슬퍼하고 애달프다고 여겨왔지만, 이것이 삶과 죽음이 맞물린 단호한 불변의 섭리에서 빚어진다는 것을 그리 주목하지는 않았다. 류영모는 그 교체와 순환의 고리를 똑바로 들여다본다. 태어날 때 우리는 무엇을 느꼈는가. 우리가 처음 본 것은 무엇이었는가. 점 하나였다. 햇빛에서 기인한 노란 빛으로 된,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가물거리는 소리로 된, 점 하나가 문득 감관에 찍혔다. 그것이 '색황음현(色黃音玄)'이다. 이 점을 삶이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에 다시 본다는 것이다. 그 점으로 줄어들며 사라지는 그 환각의 끝. 그것을 류영모는 피하지 않고 인식하며 바라보고 있다.
그 일점(一點)은 육신의 생이 사라지는 점이지만, 그것은 다시 성령이 오롯이 탄생하는 점이기도 하다. 이걸 보여주는 영상 기법이 디졸브(dissolve)다. 하나의 화면이 페이드아웃 하면서 다음 화면이 페이드인 한다. 인간이 신과 접면하는 순간, 생과 사가 교체하는 그 순간. 색황음현의 일점이 찰나로 디졸브하는 상황을 묘사해 놓은 시다. 이 치열한 사유(思惟)야말로, 류영모가 견지한 수행의 궁극을 보여준다. 파사(破私)와 깨달음은 저 일점에서의 대혁명이며 일생일대의 대전환이 아닌가.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