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고을 호칭 처음 쓴 다석 류영모
대한민국 남녘의 호남 최대도시, 광주는 저항의 이미지가 강하게 배어있는 곳이다. 가까운 역사로는 5·18민주화운동의 중심지다. 전두환 독재에 항거한 이 투쟁은 이 도시를 민주화 성지로 각인했다. 1987년 민주화투쟁의 상징인 이한열도 이곳 출신이다. 광주는 이뿐 아니라 1894년 동학농민운동 궐기가 있었던 곳이며 또 1929년 광주 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난 곳으로, 외세와 압제에 굴하지 않는 뚜렷한 의기(義氣)를 보여준 곳이다. 역사의 질곡 속에서 펼친 이 고장의 대단한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긴 하지만, 그 때문에 광주는 그 이상의 '내면(內面)'을 지닌 곳이라는 측면을 간과하기 쉽다. 이 도시는 끝없는 박애(博愛)와 아낌없는 이타(利他)를 실천한, 빛나는 정신적 도시다.
이 점을 발견하고, 광주의 신성(神聖)에 깊은 공명을 드러낸 사람이 다석 류영모다. 그는 1946년 봄에 광주로 가서 이현필(李賢弼, 1913~1964)을 만났다. 그가 누군가를 만나 영적인 비월(飛越)을 이룬 것은, 아마도 이현필이 처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보다 23년 연하의 이 사람을 만난 일은, 다석의 정신세계를 더욱 깊고 오롯하게 돋운 계기였을 것이다. 다석은 당시 주변사람들로부터 '예수'라는 극존칭으로 불리는 이현필을 만난 뒤, 이 도시 이름을 우리 말로 풀어 '빛고을'이라고 호칭했다. 광주가 오늘날 빛고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계기였다. 해방 이후 피폐한 땅이던 광주에서 '영성의 빛'을 본 것이다. 빛고을은 영성의 도시라는 뜻이다. 대체 이현필이 누구이기에, 다석을 이토록 깊이 다가가게 했던가.
그러나 이현필의 삶을 들여다보기 전에, 먼저 만나야할 사람이 있다. 그의 스승 이세종(李世鐘, 1880~1942)이다. 이름 그대로 새로운 세상을 알리는 종소리[世鐘]가 된 사람이었다. 류영모는 아쉽게도 생전의 이세종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이현필을 만났을 때, 그는 4년 전에 돌아갔기에 이 걸출한 성자의 '전설'만을 전해들었다.
이세종과 이현필은 모두 전남 화순군의 도암(道岩) 마을 사람이었다. 류영모는 道岩瑞氣無等騰 賢弼李公啓明致(도암서기무등등 현필이공계명치)라는 한시를 읊은 적이 있다. 도암 마을의 상서로운 기운은 가장 높이(무등산의 이름을 중의법으로 활용) 솟아오르고 / 이현필의 지혜와 배려는 밝게 일깨움(그가 임종한 벽제 계명산 수녀원과 중의법)에 이르렀네. 놀라운 통찰이 담긴 시다. 이현필을 낳은 스승, 이세종은 누구인가.
자식 낳으려고 성서를 봤는데
구한말인 1880년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이세종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고 큰형의 집에 얹혀 살았다. 28세 때부터 남의 집에 머슴살이를 했다.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머슴 노동으로 받는 새경으로 식구들을 먹여살렸고 논마지기까지 장만해서 형을 장가들게 해줬다. 그 와중에도 동냥글로 한글을 깨우쳤다. 머슴살이 10년여 만에 자신의 집과 농토를 마련하게 되었을 때는 마흔이 넘어 있었다. 나이가 든 그에게 시집오겠다는 여성이 없어서, 형편이 어려운 집의 16세 연하의 처녀를 아내로 맞았다. 결혼 뒤에도 그는 부지런히 일을 하였고 논밭을 계속 사들여 마을에서 부자 소리를 듣게 됐다.
이세종은 재산은 넉넉했으나 자식을 갖지 못했다. 좋다는 처방을 다 써보았으나 효험이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친지의 집에 놓인 성경을 보게 됐다. 거기 하느님이 있다 하니 혹시 뭔가 방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경전을 펼쳐본다.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제단을 쌓고 짐승을 바치며 빌어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가 신약을 읽게 됐고 예수와 바울이 결혼도 하지 않은 채 금욕생활을 하며 오직 하느님만을 향해 기도하며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 자식보다 더 귀하고 중한 것이 있구나.
이때의 상황을 묘사하는 구전(口傳) 스토리 하나. 이세종은 성경을 읽은 뒤 기쁨에 넘쳐서 천태산 기슭 바람재 위에 높이 올라갔다. 그는 두 손을 쳐들고 춤을 추며 큰 소리로 노래했다. "억조창생 만민들아. 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 춤을 추는 동안에 너무나 몰입하여 자신의 아랫도리가 벗겨진 것도 모를 정도였다. "지금껏 산당을 짓고 하루 열두 번 제사를 지낸 공이 헛수였구나. 참된 복은 예수를 믿고 그의 삶을 본받아가는 길에 있는 것을." 그는 부르짖었다.
아내가 도망갔다
이후 아내는 달라진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이 왜 갑자기 자신을 멀리하는가. 밤에도 낮에도 도무지 상대를 해주지 않으니, 싫어졌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내는 그만 입던 옷 그대로 집을 나갔다. 자신을 오갈 데 없는 과부라고 속이며 밥을 빌어먹고 다녔다. 그러다가 한 사내를 만나 같이 살게 됐다. 아내를 잃은 이세종은 스스로 밥을 지어 먹으며 성서만 읽고 살았다.
누군가가 그에게 어느 마을에서 아내를 보았다는 얘기를 전해줬다. 이세종은 생각했다. 이 사람이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채 집을 나갔으니 입던 옷이나 쓰던 물건이 몹시 아쉽지 않겠는가. 사람을 시켜서 그 집으로 보내주었다. 이걸 본 두 사람이 모두 놀랐다. 아내는 옛남편이 이런 걸 챙겨준 것에 놀랐고, 같이 살던 사내는 그 여인이 남편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에 놀랐다. 이 일로, 아내는 다시 이세종에게 돌아오게 된다.
아내가 돌아오자, 이세종은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반갑게 맞았다. 그런데 다시 살아보니, 그전 생활과 다름이 없었다. 아내는 다시 가출을 했다. 낯선 곳에 가서 다른 사내를 만나 살게 되었다. 사내는 몹시 가난하여 끼니도 잇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누군가가 이 사실을 전해줬고. 이세종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쌀가마니를 지고 그 집을 찾아갔다. 사립문에서 "거기 누구 있소?"라고 불렀을 때,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아내가 물바가지를 들고 나와 남편에게 퍼부었다. 소박 맞은 분노를 표현한 것이었다. 물벼락을 맞은 이세종은 잠깐 말없이 서 있다가 "쌀을 가져왔으니 어서 밥을 지어 함께 드시오"라고 말했다. 이세종은 곁에 서있던 사내에게 "성경을 읽어보시오"라고 권했다.
이세종을 '호세아'라 부른 까닭
그를 한국의 '호세아 성자(聖者)'라고 부른다. 호세아는 예수보다 750년 전에 살았던 이스라엘의 예언자다. 구약성경에는 호세아 소예언서가 있다. 호세아는 고멜이라는 여성을 아내로 맞았다. 아내와의 사이에 세 자녀를 얻었다. 아들 이즈르엘과 로암미, 딸 로루하마다. 아내 고멜이 낳은 자식은 불륜으로 태어난 씨앗이었으나 호세아는 이를 용서했다. 하지만 아내는 다른 사내를 쫓아 집을 나갔다. 이후 그는 아내 고멜을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인다. 하느님의 이런 음성이 들렸기 때문이다.
"호세아야, 너를 배신한 아내 때문에 분할 것이다.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분할 것이다. 그러나 너는 아내를 사랑하렴. 아내가 이제 네게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 받아들이렴. 내가 나를 배신한 이스라엘 백성을 받아들이듯 너도 아내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렴."
이세종은, 성서의 호세아처럼 아니 그보다 더한 진실과 사랑으로 그를 버렸다 돌아온 아내를 대했다. 그래서 그는 한국의 '호세아 성자'가 되었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가족에게도 내 욕심을 채워줘선 안된다. 내 욕심과는 정반대로 행하라. 부부간에도 욕심을 채워주지 말아라. 정반대로 하라. 욕심을 채워주지 않는 것이 그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이세종의 아내는 쉰이 넘어 한글을 깨우치고 성서를 읽었다. 말년에 이세종이 산에 숨어 살 때도 부인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도 남편처럼 거지 행색으로 살았다. 이세종이 죽은 뒤에 그 자리에 묘를 쓰고 남편 무덤을 3년간 지켰다. "나는 세상에 와서 예수 잘 믿는 남편을 둔 행복한 사람"이라고 눈물을 흘리며 감사했다. 77세로 세상을 마칠 때까지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남편에게 지은 죄를 사죄하는 의미에서 죽을 때까지 바로 누워 잠을 자지 않았다.
빚문서 태우고, 곳간 연 부자
한편, 동네 사람들은 마을의 큰 부자였던 그에게 쌀이나 돈을 꿔갔고 빚을 가을 추수철에 갚곤 했다. 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든 해에, 도암 마을엔 굶주리는 사람이 속출했다. 이세종은 곳간을 열어 이웃들에게 쌀을 퍼가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빚을 진 채무자들을 모아놓고 빚문서를 모두 태워 채무를 탕감해줬다. 이날 빚걱정을 한순간에 덜게 된 마을사람들이 서로 껴안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이 자진해서 송덕비를 세웠다. 이세종은 이를 사양하며 비석을 땅에다 묻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이공(李空)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세상에 없는 사람이며 텅 빈 허공과 함께 하느님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었을까. 이세종은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고 초상화 하나도 그려진 게 없다. 일제 말기에 돌아간 사람이지만, 그가 어떻게 생긴 분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조차 남지 않았다. 다만 알 수 있는 건, 그 놀라운 생의 반전들 속에서 펼쳐진 사상과 언행들뿐이다. 그에게 감화를 받은 이들이 저마다 마음속에 남은 '거룩한 기운'들을 더듬더듬 전하는 그 조각 속에 숨어있는 영성(靈性)뿐이다.
이세종은 낙스(R. Knox)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밤에는 성경을 읽고 낮에는 청년들에게 그 성경을 다시 읽어주며 함께 토론하기를 청했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참진리는 쉽게 납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의심나게 하는 것이 참진리입니다. 진리에 대해 의심이 나는 까닭은 인간이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편히 살고 세상의 영광을 누리고 오래 살고 부귀하고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을 축복과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참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부모처자와 단란하게 사는 걸 마다하고 고생을 자처하며 종교진리를 따르니 세상사람 눈으로 볼 때에 정반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게 됩니다. 그러니 의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길에서 만난 거지와 옷을 바꿔입고
이세종은 깊이 파야 깊이 깨닫는다고 말했다. 어설프게 파면 믿음이 죽고 의심밖에 나는 것이 없다고 했다. 그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배움을 청하러 몰려왔다. 이현필, 이상복, 박복만, 이대영, 전도부인 오복희, 수레기 어머니 손임순, 최흥종 목사, 그의 사위 강순명과 백영흠, 이만식, 최원갑, 현동완이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산중 수도생활을 시작한다. 한번은 광주 교회의 공식모임에 초청받아 가던 중에 길에서 거지를 만났다. 문득 그와 옷을 바꿔입고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추운 겨울에도 이불을 가슴 위로 덮고 자지 않았다. 남의 집 처마 아래서 밤을 지새울 사람을 생각해서였다. 밥을 먹을 때도 땅바닥에서 먹었다. 거지들에게 일일이 상을 차려줄 수 없기에 자기도 땅에서 밥을 먹는다 하였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실천하는 일이었다. 그는 그뿐 아니라 산천초목과 금수곤충에 이르기까지 만물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풀잎을 쓰다듬어 주었고 길에 뻗어나온 칡넝쿨을 누군가 밟아 진액이 흐를 때 사람의 피를 보는 것처럼 아파했다. 발에 밟힌 개미를 보고 눈물을 흘렸고 빈대도 파리도 죽이지 않고 문을 열어 밖으로 내보냈다.
이세종은 혼자 성경을 읽고 체득한 바를 실천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금욕과 절제를 통한 순결이었고, 생명에 대한 외경이었으며, 그 외경이 발전한 세상 모두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확신을 다른 이들에게 가르쳐 나누고자 했다.
죽을 때가 가까워오자 이세종은 석달간 곡기를 끊었다. 자기 몸을 깨끗이 비우기 위함이었다. 임종 즈음에 그는 제자들에게 나뭇가지를 베어오게 하고 그것을 손수 새끼로 엮어 상여를 만들었다. 상여를 좁은 방 안에 넣고 그 위에 이불을 펴고 누워 말하기를 '숨이 지면 꼭 이대로 묻어주시오'라고 했다. 아내가 곁에서 울음을 터뜨리자, 그는 다시 벌떡 일어나 '예수를 따라가는데 울어서야 되겠소, 나는 올라가오'라고 말한 뒤 다시 누웠고 조금 뒤 눈을 감았다. 1942년 2월, 향년 63세였다. 그는 완전한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남긴 유산이라고는 가마니 한 장 없었다. 이후 이현필을 비롯한 제자들이 동광원을 세워 그 정신을 기리고 개신교 영성의 터전으로 일군다.
이세종의 아내가 죽었을 때 류영모는 '다석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1971년 2월 11일 이세종님의 마나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씀 듣다. 듣건대 거듭거듭 많이도 거듭 사시어서 돌아가시었구나."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