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58)] 류영모는 알고, 김교신·함석헌은 몰랐던 것

2020-08-10 11:37
  • 글자크기 설정

기독교 보편성과 국가주의의 모순 꿰뚫다…김교신·함석헌, 그 위의 성자

[다석 류영모와 바보새 함석헌, 뒤쪽 가운데는 김흥호.]




'국가 잃은 땅'에서 삶을 시작한 그들
류영모는 1890년생이고 함석헌은 1901년생이다. 두 사람은 1945년 이전까지 정상적인 국가를 거의 경험할 수 없었다. 해방이 되는 해는, 류영모는 55세가 되는 해였고 함석헌에겐 44세가 되는 해였다. 두 사람의 사상적 토대는 해방 이전에 갖춰졌고, 그 사상에는 '국가 결여'라는 심각한 비정상적 상황이 개입했을 수 밖에 없다.

식민지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그들에게 국가는 '잃어버린 것'이었고, '반드시 되찾아야할 것'일 뿐이었다. 그보다 현실적으로 국가를 대체하고 있는 것은 국토를 점령하고 국권을 침탈한 일본국이었다. 식민지를 살아가는 망국민으로서, 일본이라는 '국가'는 공포와 분노, 절망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었다. 국가 권력은 대부분이 부적절한 압제였고 강제였으며 폭력이었다. 이들에게 형성된 '국가' 관점이 현재의 우리가 지닌 생각과 비슷할 거라고 보는 것은, 부주의한 짐작일 수 밖에 없다.

그들이 만난 새로운 종교는, 유럽과 미국에서 뿌리내린 기독교였다. 그 종교는 명시적이진 않지만 분명히 그 출산지(出産地)와 정착지(定着地)의 '국적'을 부전지로 달고 있었다. 즉 그것은 출산 정착지의 사회체계에 맞춰진 서구 기독교였다. 성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서구인이고, 그리스도로 추앙되는 예수 또한 그랬다.

기독교가 비서방세계로 전파되면서, 서구인들을 구원하던 종교가 과연 다른 지역의 사람들도 구원할 수 있느냐의 원천적인 질문 앞에 놓이게 된다. 즉 동양인에게도 신은 똑같은 기회를 주는 것인가. 혹은 예수가 동양인도 구원하는 것인가.

서양인 예수가 동양인도 구원하는가

이런 원초적인 질문을 해결해야 했던 사람들은, 서구 기독교를 새롭게 해석해야 하는 상황을 만났다. 일본인 우치무라 간조가 서구 선교사의 교회와 교리에 대해 반기를 들면서 일본식 기독교를 창안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일본인을 구원하며 일본을 사랑하는 신이 있는 기독교가 필요했다. 서구의 신앙시스템들을 거부한 까닭은, 그 자체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라 역사속에서 신앙을 체계화한 결과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일본 유학생이던 김교신과 함석헌이 우치무라에게서 영감을 얻고 통찰을 키운 것은 바로 그 대목이었다.

기독교를 '직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을 현지화하여 오히려 지금껏 서구가 놓치고 있던 보편적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읽어낸 것이다. 김교신은 조선산 기독교를 꿈꾸었고 우치무라의 신앙실천법인 '성서연구'를 벤치마킹해 대중화를 꾀했다.

우치무라의 일본식 기독교는 '신앙'과 '국가'를 동시에 품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두 개의 제이(J)' 사상이 그것이다. J는 재팬(Japan)과 지저스(Jesus)다. 그런데 우치무라는 곧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당시 일본이라는 국가는 침략행위와 폭력행위를 일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의 살육과 강제 행위를 신앙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난감했다. 우치무라는 이후 국가의 난행(亂行)에 대한 비판에 나서기도 했지만, 일본식 기독교가 봉착한 정체성 위기를 극복하기는 어려웠다.

반면, 우치무라의 팁을 얻은, 식민지 국가의 김교신과 함석헌은 이런 모순을 겪지 않았다. 그들에게 국가(조선)는 '수난의 예수'와 닮아있었고, 국가 독립운동은 영성의 부활을 상기시키는 결연한 목표였다. 그들은 기독교의 교리를 수용하되 새로운 방식의 교회를 꿈꾸는 정통신앙을 꿈꾸었다.

류영모는 알고, 김교신과 함석헌은 몰랐던 것

그러나 류영모는 그것이, 국가가 처한 상황에 따라 신앙의 본질과 동일한 맥락으로 보인 것일 뿐, '국가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생각은 아니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국가의 문제가 기독교의 본질과 상충하는 측면이 있음을 꿰뚫고 있었다. 서구 기독교가 원형을 훼손하면서 기형화한 것은, '국가'와의 결탁을 꾀한데서 비롯되었음을 간파한 것이다. 김교신이 우치무라를 학습하고 있을 때, 류영모는 기독교 국가주의의 위험에 관한 '톨스토이의 통찰'을 읽고 있었다.

"참된 의미의 기독교는 국가를 파괴한다. 기독교의 시초부터 그렇게 인식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국가라는 것을 굳이 인정할 필요가 없었던 기독교인들이 언제나 깨닫게되는 내용이었다. 여러 국가의 리더들이 명목상의 형식적인 기독교를 채택하면서부터 기독교가 국가와 공존할 수 있다는 불가능한 이론을 교활하게 고안하기 시작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라도 진정한 기독교의 온유함, 피해에 대한 용서, 사랑의 가르침이, 국가의 거만함, 폭력행위, 처형, 전쟁과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 (톨스토이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 중에서)

과격해보이지만, 명쾌한 진실이 담겨있는 말일 수도 있다. 이 대목과 관련해 철학자 최진석(서강대 교수)의 최근 발언이 있다.

"국가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은 배타성이다. 배타성은 배타적 동일성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그래서 동일성은 대내적으로 적용되고, 배타성은 대외적으로 적용된다. 배타성을 발휘하고 동일성을 유지하려는 힘이 폭력이다. 그래서 국가는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 배타적 집단이라고 해도 된다. 국가 안에서 폭력은 관리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폭력을 임의대로 사용하면 국가가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에 구성원들이 가진 모든 폭력성을 다 거두어서 국가가 총체적으로 관리한다. 국민은 폭력을 사용하면 안되고 국가는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 국가가 대외적으로 폭력을 사용할 때는 군대가 나서고, 대내적으로는 경찰이 나선다. 군대와 경찰로 한 국가의 폭력은 관리되고 내외적으로는 생명과 재산이 보호되는 것이다. 국가가 안전과 이익을 공유하는 배타적 집단임을 감안할 때 결국 최종적인 일은 전쟁으로 나타난다. 국가는 전쟁을 하는 집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20년 7월 광주일보, 최진석 '국가란 무엇인가'중에서)

배용하 목사(산평화누림메노사이트)는 2018년 12월 역사적으로 교회들이 저지른 전쟁에 대해 성찰하며 이렇게 말했다.

"전쟁에 대한 교회의 타협은 2세기 말에 시작됐다. 소위 평화교회 전통 외에는 전쟁참여를 금하는 어떤 공식적 신조도 없었다. 국가간 전쟁이 일어나면 교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교회 사역의 일부로 전쟁을 보조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톨스토이는 미국의 사상가인 아딘 발루(Adin Ballou, 1803~1890)의 에세이를 인용하며 전쟁의 권리를 인정하는 기독교인의 모순을 설명하고 있다.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과 악을 겪으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약속했다. 동시에 나는 미국의 시민으로 국가에 충성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생명을 바쳐서라도 조국의 헌법을 수호한다고 선서했다...예수는 악행을 행하는 자들에게 저항하지 말라(마태 5:39)고 하며,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피에는 피 그리고 생명에는 생명을 취하지 말라고 한다. 반면 나의 국가는 내게 그것과 정반대이기를 요구하고 국내외의 적에 대항하여 사용하기 위해 , 교수대, 총, 칼로써 자기방위체제를 구축하여 나라 안은 결국 교수대, 감옥, 무기고, 전함 및 병사들로 가득 차게 된다."(톨스토이,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중에서 아딘 발루의 증언)
 

[김교신]


해방 이후의 국가를 경험못한 김교신

김교신이 택한 우치무라 사상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이후의 '국가'가 그 근본적인 성격 때문에 반기독교적인 악행과 보복을 행할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을 예측하지 못했다. 김교신이 고수했던 '무교회'보다 본질적으로 더 중요한 문제는, 신앙이 국가와 동일시되면서 성서의 비폭력주의를 위반할 수 밖에 없어지는 '국가'의 한계였다. 그런데 김교신은 해방을 맞던 그해 4월에 눈을 감았다.

그 문제를 본격적으로 만나야 했던 사람은, 김교신과 뜻을 같이 했던 또다른 우치무라 제자인 함석헌이었다. 해방 이후 국가의 이념적 정체성을 둘러싼 혼란과 외세의 개입으로 격화된 한국전쟁, 그 이후의 권력 부패와 군부 쿠데타 등의 '국가폭력'은, 함석헌의 사상 전반을 뒤흔들었다. 그는 '국가 본위 기독교'를 버리고, 류영모의 사상 품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렇다면 류영모는, 우치무라 방식의 사상이 아닌 어떤 사상을 견지해 왔던가.

55세에 이를 때까지 '정상적인 국가'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던 류영모는, 오히려 '국가'에 대해 좀 더 유연하고 이성적인 관점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그의 빼어난 통찰력이 작동했을 것이다. 국권을 찬탈한 국가 일본을 보면서, 국가가 지닌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본질을 꿰뚫었을 것이다. 한국이 독립되면 그런 '반기독교적인' 면모를 줄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해답이 아니었다. 신앙과 애국을 동일시하려는 오류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류영모가 역설한 '자율신앙'은. 집단이 신과 만나는 서구 교회의 오류와 폐단에서 벗어나려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또한 신과 인간의 단독대면을 통해서만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는
이론을, 성서의 입장을 통해 주창한 것이었다. 자율신앙에는 교회나 교제(敎制)도 없지만 국가의 그림자도 아예 없다. 신과 인간의 단독 대면과 독자적 합일이 있을 뿐이다. 

국가의 길과 신앙의 길이 함께 할 수 있다

그러나 류영모가 국가의 역할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 운영을 신중하게 하여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전쟁의 불가피성에 대해서도 인정하지만, 이런 상황에 임해서도 부전(不戰)의 무저항주의를 보여준 간디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있다. 류영모의 정신주의는 국가와의 대립을 만들어내지 않고, 각기 위치에서 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라가 무장(武裝)을 왜 하느냐 하면 나라가 평화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하면 백성들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서다. 무(武)자는 싸우자는 글자가 아니다. 창 과(戈)자가 나타내는 싸움을 멈추게 하자는 그칠 지(止)가 합하여 무(武)자가 되었다. 절대 평화론자는 비전쟁자로서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모름지기 비전쟁론자들은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언젠가는 싸움을 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싸움을 않겠다는 이것만은 마하트마 간디가 몸소 일생을 통해서 자세히 보여주고 갔다. 이 세상에서는 어떤 때는 싸움에 참여하게 된다. 싸움이 아주 없다는 주의(主義)가 없다. 요새는 싸움하기 위한 싸움이지만 우리는 어디까지나 진리의 샘(泉)을 바로 팔 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암만해도 무엇을 잊고 멍하게만 가고 있는 것 같다." (1957)

"나는 이 세상에서는 이상(理想)이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안 되는 이 세상이지만 혹 되는 듯하면 참 기쁘다. 하룻밤 자고 가는 곳이라도 뭐가 좀 되는 것 같으면 나도 퍽 복을 느낀다. 이 땅 위에서는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는데 그러나 8.15 광복 때는 나도 참 복이 있다고 느꼈다. 또 4 19 의거가 일어나자 내가 무슨 복이 있어 쾌한 꼴을 두 번씩이나 보게 되나 하고 퍽 기뻤다. 이 민중이 스스로가 민주주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을 감격스레 생각해야만 참 민주주의가 된다." (1960)

그러나 민주주의의 훼손에 대해선 단호한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원칙(原則)이 틀어지면 헛된 이름만의 민주(民主)가 된다.그러한 세상에는 마귀가 참여해서 세상을 더럽힌다. 이렇게 되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자만이 심해지고 부끄러운 것이 없어진다. 그야말로 세기말의 마귀들이다. 민주주의가 이뤄진 좋은 세상에 그따위 마귀때문에 귀하고 중한 것을 놓쳐 버리다니 억울하지 않는가?" (1957)

"대통령 자리가 무슨 자리인가? 좋은 사람 골라서 쓰는 자리이다. 예수가 베드로에게 고기잡이를 그만두고 사람을 낚으라고 했다. 대통령은 좋은 사람 낚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좋은 사람은 어버이를 잘 섬기는 사람 가운데서 골라 얻는다고 했다. (1957)
 

[다석 류영모]



씨알은 '주체적 개인'이 나선 국가 개념

한편 류영모의 씨알사상은 국가와 기독교를 모두 품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씨알은 하늘이 준 본질을 지니고 있으며 새로운 생명을 틔우는 존재인 '씨'와 하늘과 합일을 이루는 인간존재를 의미하는 '알'이 합쳐진 말이다. 씨알은 하늘의 자식인 민초(民草)의 역사적 주체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씨알사상은 국가보다 그 속에 살아움직이는 인간 저마다의 개별성이 강조되고 있는 말로, 기독교 신앙을 지닌 주체적 개인이 국가라는 근대적 공동체 개념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심오한 사상이다.

"이 씨알(民)을 위함이 하느님 위함이다.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다. ' 백성을 모른다 하면서 하느님만 섬긴다 함도, 하느님을 모른다 하고 백성만 위한다 함도 다 거짓이다. 이 시대가 민주주의 사대가 되어서 처음부터 마음이 민주(民主)가 되어야 한다. 씨알(民)이 나라의 임자(主)가 된 것은 천의(天意)요 천도(天道)이다. 그러므로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게 백성을 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참으로 민주주의라면 주의(主義)가 없어져야 한다. 주의가 있으면 전제(專制)가 된다. 역사를 자세히 본 사람은 내가 잘 경륜하겠다고 나서는 현재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다 믿지 못한다. 예수를 정말 믿고 염불(念佛)을 정말 하는 사람은 씨알(民)님을 머리에 인 자다." (1960)

함석헌은 씨알의 의미를 확장하여 사회적인 정의를 실현하는 역동적인 에너지로 보고, 이 땅의 민주화를 실천하는 힘으로 삼았다. 그는 스스로 창간한 '씨알의 소리'에서 그 핵심원리를 '하나됨'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됨이란 신과 나와 생명이 하나가 되는 일이다. 숲이 통제되어 각각의 풀들이 번영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씨알'은 저마다 햇빛을 받으며 생명을 구가하여 숲을 이루는 자연공동체다. 죽지 않는 생명으로서 ‘씨’, 그리고 극대의 하늘을 의미하는 ‘ㅇ’, 극소이자 소우주인 자아를 의미하는 ‘·’, 활동양태로서의 ‘ㄹ’이 결합한 말인 씨는 하나님(우주)의 생명이 내려와 인간의 얼(靈)이 된 존재로 해석된다(함석헌의 ‘우리가 내세우는 것’). 함석헌 또한, 후기로 갈수록 류영모의 사상에 다가서고 있다.

"교회가 또 한번 부자의 자리에 섰습니다. 그들과는 달리 가난한 사람을 위해 하늘나라 문을 여는 새로운 성경 해석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씨알도 2천 년 전 씨알 중의 으뜸 씨알인 그가 그랬던 것같이 전체를 살리기 위해 성경을 제멋대로 고쳐 씹어 읽고 그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야 할 것입니다. 어느 의미론 벌써 시작 됐다 할 수도 있습니다."
                       <함석헌의 '두 개의 성경' 중에서>
 

[함석헌]



류영모 사상과 거의 일치해가는 함석헌

함석헌은 "국가주의로는 안된다"는 제목으로 이런 글을 썼다. 여기까지 오면, 함석헌은 류영모 사상과 거의 일치하는 면모를 보인다. 

"생명은 발전합니다. 조직은 고정되어지면 변화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자라난 시대에는 국가 없이는 성장할 수 없었습니다.그러나, 지금은 인간이 국가보다 더욱 성장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국가란 제도는 국가 지상주의가 계속되면 인간의 성장을 방해하게 됩니다. 지금 자유주의나 공산주의로 나누어져 있지만, 양쪽 다 국가주의란 점에는 다른 게 없습니다. 양쪽이 싸우고 있을 때에도 저는 이데올로기는 문제가 아니라고 말해 왔습니다.지금은 이데올로기 등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데올로기가 달라도 양쪽 모두에 국가 지상주의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인류 사회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국가가 정말 인간의 논리적 생활을 돕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주의에 빠져있습니다.그렇기에, 장래의 문제를 생각하면 우리들의 국가관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정치 없이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아무리 이상주의라 하더라도 불완전한 인간인 이상, 바른 의미의 정치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정치권력을 가지고 있는 단체조직이 절대 권력을 가지고 지배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입니다. <함석헌 '역사의 의미' 중에서>

함석헌은 남한에 민주주의가 있고 북한에 공산주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군과 소련군이 남북을 나눠 점령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면서 문제를 이렇게 들여다 보기도 했다.

민족이 둘로 갈라져 있으면 언제든지 외국 세력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한다. 본래 분열이 올 때는 외국세력의 침입으로 시작됐다. 남한에 데모크라시가 있어서 미국을 끌어들이고 북한에 공산주의가 있어서 소련을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미군이 남한을 점령하고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러므로 문제의 요점이 민주주의나 공산주의에 있는 것 아니다, 남의 나라의 그 세력을 빌어서 제가 정권을 쥐어 보려하는 그 마음에 있다.<함석헌 '우리나라의 살 길' 중에서>

효(孝)논쟁과 국가주의자들

1961년 11월 류달영의 재건국민운동본부가 중앙위원회를 두면서 사회명망가들을 위원으로 뽑았다. 여기에 류영모와 함석헌을 비롯해 김정설이 포함됐다. 김정설(호는 범부(凡夫), 1897~1966)는 소설가 김동리의 큰 형이다. 영남대학교의 전신 중 하나인 계림학숙의 초대학장을 지냈다. 그는 1963년에 박정희의 오월동지회 민간 측 부회장이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뒤 비공식 정치자문을 맡았다.

재건국민운동본부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국가의 개념을 재설계하기 위해 만든 기관이었다. 김정설은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했으며 '화랑외사(花郎外史)' '풍류정신(風流精神)', '건국정치의 이념'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는 국가철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그 핵심은 '인륜적 국가관'이다. 그는 국민윤리를 강조하면서 그 초점을 효(孝)로 잡았다.

"효는 부모한테 하는 것이고, 이것을 나라에 옮길 때는 충(忠)이 되는 것입니다."(김범부 '동방사상강좌') 효는 집안의 윤리이고 충은 '나라라는 집안'(國家)의 윤리라고 보았다. "나라에 대한 심정도 기실인즉 이해득실을 초월해서 당연히 그리 해야 하고 그리 않고는 할수 없는 '무조건의 감분(感憤)' 다시 말해서 효자가 부모에 대해 지니는 지극한 감정이라 할 밖에 딴 이유가 없는 것이다."(김범부 '방인(邦人, 국민)의 국가관과 화랑정신). 김범부는 화랑정신의 핵심인 사군이충(事君以忠: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긴다)·사친이효(事親以孝: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긴다)를 국가가치의 기틀로 삼았다. 박정희 시대 요란했던 화랑정신 강조는 이런 배경 속에서 이뤄진 것이다.

국가가치를 세운 사람에는 박종홍(1903~1976)도 있었다. 평양태생인 박종홍은 한국 철학계의 태두로 꼽히는 1세대 서양철학자이다. 경성제대 철학과에서 독일철학을 전공한 그는 서울대 교수를 지내며 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그는 5.16 이후 국가재건회의 사회분과 위원이었고 1970년엔 대통령 교육문화 특별보좌관을 지냈다.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한 사람이다. 박종홍은 민족주체성과 공적(公的)인간의 전형을 강조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국민들의 어깨에 묵직한 짐을 안기던 그 구절을 그런 사상에서 태어났다고 할 만하다.

류영모 "권력에 효(孝)할 게 아니라 신에 효(孝)하라"

한편 류영모는 김범부의 '충효(忠孝) 일체'에 대해 비판했다. "학생을 국가의 동량이라 하는데 그 따위 말은 집어치워야 합니다. 이 집 가(家)의 가족제도 때문에 우리나라가 망한 게 아니겠습니까. "(1956년 11월22일 다석강의)

그는 효(孝)가 국가이념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가부장적인 국가리더가 나와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가정과 국가를 상징화하여 사회질서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해온 유교적 사고방식에 제동을 건 셈이다. 그는 육친인 아버지에 비유될 수 있는 대상은 국가수반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효(孝)'는 충(忠)으로 확장될 것이 아니라, 천부(天父)에 대한 효로 직결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류영모가 가부장적 대통령에 대해 우려했던 것은, '가부장(家父長)'의 당시 역할이 견제없는 전횡이 가능했기 때문인 점도 있다. 그는 리더의 강력한 역할은 국가가 국민을 괴롭히는 부작용으로 언제든지 변질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류영모는 '씨알'의 자율을 통한 민주주의의 번성을 꿈꾸었다. 그것이 그의 기독교적인 세계관과도 통했으며, 자율신앙의 정신과도 맞았다.

그는 노장사상 속에 숨어있는 조물주(造物主)의 섭리가 국가 정치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이란 말은 '군무위인자연(君無爲人自然, 리더(그대)가 팔걷어 모든 것을 하려하지 말고,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하게 하라)'의 메시지였다. 조물주가 자연 생태계를 유지하는 방식이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국가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고 국가 리더의 의욕이 커질수록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우린 유신독재와 정권의 비극적 결말에서 확인한 바 있다.

함석헌 또한 이런 흐름을 비판했다. "이 나라의 정신적 파산! 사상의 빈곤! 한다는 소리가 벌써 켸켸묵은 민족지상, 국가지상, 화랑도나 팔아먹으려는 지도자들, 이 민족의 정신적 빈곤을 무엇으로 형용할까?" 그는 '나라 국(國)'자를 쓰는 경우는 대개 도둑놈'이라고 하기도 했다. 국가주의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경고한 말이다. 류영모와 함석헌은 조국근대화를 외치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국가지상주의가 낳을 깊은 병폐를 우려하며 경고했던 국가사상의 큰 선지자였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