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저는 이 새가 좋습니다. 이놈을 신천옹(信天翁) 곧 ‘하늘 믿는 늙은이’라 이름한 것은 이놈이 날기는 잘해서 태평양의 제왕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고기 잡을 줄은 몰라서 갈매기가 잡아서 먹다가 이따금 흘려버리는 것을 주워 먹고 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그놈을 아호도리 곧 바보새라고 부릅니다. 제가 이 새를 좋아하는 것은 이 바보새라는 이름 때문입니다. 어쩌면 제 사는 꼴도 바보새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산 시절은 또 몰라도, 적어도 해방 후의 제 살림은 틀림없는 바보새 살림입니다. 마음은 푸른 하늘에 가 있으면서 세간살이 할 줄은 몰라서 여든이 다되어 오는 오늘까지 친구들의 호의로 살아가니 이 아니 바보입니까?" - 함석헌 <남강(이승훈)선생님 영 앞에 못난 석헌이는 우옵니다>중에서
함석헌 선생은 '바보새'라는 호를 붙였다. 겸손도 겸손이지만, 신천옹이란 다른 이름이 절묘하다. 하늘을 떠다니다가, 가끔 갈매기가 놓친 물고기를 먹고 살아간다는 희한한 새. 그러니까 그가 믿는 것은 '하늘' 밖에 없다. 바다에선 죽을 쑤니까 말이다. 신천옹만큼 하느님 믿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하느님이 일용할 양식을 다 주시니 나는 그냥 하느님만 의지하고 살겠다고 평생을 결심한 저 고문관 같은 새. 이 새가 속세에서는 바보같이 보이지만, 이게 어디 바보이겠는가.
이 새는 거대하다. 날개를 펴면 폭이 4m나 된다. 망망대해를 내려다보는 하늘에서만 지내다가 번식기에 육지에 내려온다. 늘 떠 있어야 하기에 날갯짓을 거의 하지 않고 기류를 이용해 이동한다. 유럽에서는 신천옹(알바트로스(Albatross)라고 한다)을 물에 빠져 죽은 뱃사람의 영혼이라고 여겼다. 이 새를 죽이면 나쁜 귀신이 와서 붙는다는 속설 때문에, 다가와도 죽이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하지만 먼 바다 여행을 하는 동안,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낚싯바늘로 이 새를 잡아 함께 놀았다고도 한다. 느릿느릿한 바보짓에 낄낄거리면서 말이다. 샤를 보들레르는 이런 시('알바트로스, 1859)를 썼다.
시인인 자신을 세상 부적응자인 신천옹이라고 생각한 보들레르와, 세간살이 젬병이라고 한탄하면서 바보새란 호를 취한 함석헌이 닮아 있지 않은가. '신천옹'이란 키워드 속에는, 그러나 세상의 문법에 타협하지 않고 고공에서 자유비상하는 존재의 드높은 자부심이 유유히 떠다니고 있는 것은 물론이리라.
82세 함석헌, "내 사상은 류영모와 가깝다"
함석헌의 사상은 어떻게 진화했을까. 21세,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갈 때의 사상은 이랬다.
"일본에 가기 전 오산학교에 있을 때부터 나는 사물에 대하여 생각하는 눈이 뜨이기 시작했습니다. 류영모 선생의 영향이었습니다. 선생은 깊이 사색하는 분입니다. 선생의 대표적인 말씀은 참(Truth)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언제나 이것을 강조하여 말씀하셨죠. 나도 늦게나마 나를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사회문제도 차츰 머리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사회문제란 '공산주의'를 말한다.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인 학살이 있었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공산주의 사상이 확산됐다. 젊은 함석헌도 이런 분위기에 흔들렸다. 그런데 우치무라 강의를 들으면서 '신앙'을 다시 세웠다.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동경고등사범학교에 한국인 학생이 50명 정도 있었는데 크리스천인 우리들은 상당히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기독교도로 자란 터이지만 번민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러던 중 우치무라 선생의 강의를 들었고 그러면서 이 문제가 풀려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신앙을 버리지 않기로 신께 맹세했습니다."
일본서 '무교회'와 '성경연구'를 접하면서, 그는 신앙에 대한 입장을 새롭게 했다. 1936년 4월 성서조선에 '무교회'라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이런 말이 나온다.
"나는 신(神) 절대중심주의자다. 1마리의 가치가 99마리의 가치보다 가볍지 않다는 성서의 데모크라시는 하늘에서 온 복음이다." 35세 함석헌의 사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대목이다.
54세 때는 십자가 신앙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십자가 소리를 많이 하지 않는다. 한때 십자가를 주장한 때가 있었다. 처음으로 신앙을 증거하던 때는 그랬다. 그러나 내 믿음이, 남의 신앙 증거에 감격하고 동의하며 그것을 옮겨 남에게 전하던 정도에서 좀 자랐다. 나로서 보는 것이 있고 붙잡은 것이 있으며 애를 써보게 되는 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나는 성경을 고쳐 읽고 인생을 고쳐 씹고 역사를 고쳐 보기로 하였다. 그 결과, 이전에 내가 말했던 건 남의 말을 전한 것일 뿐이지 내가 참으로 경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문제는 나다. 내가 나로 사는 것이 문제다."
그로부터 28년이 지나, 82세 때인 1983년 함석헌은 마침내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십자가 신앙에서 떠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없이 어떤 기독교든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십자가에서 떠나간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해석을 나에게 맞도록 나름대로 달리한 것일 뿐입니다. 나는 우러러보는 십자가보다는 내가 지자는 십자가 편에 섭니다. 그 점에서 나는 류영모 선생이나 마하트마 간디 쪽에 가깝습니다."(씨알마당 9호, 1995.10)
함석헌의 사상 역정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정통교회 신앙에서 정통을 버리진 않았으나 우치무라의 영향으로 '무교회'로 나아갔고 그 뒤 50대 이후에 깊은 성찰을 거쳐 80대에 이르러 스승 류영모와 같은 '스스로 지는 십자가'의 비정통 자율종교 사상에 합류하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상계 주필 활약···두 차례 노벨상 후보에
한편 함석헌은 1953년 장준하의 주재로 창간된 월간지 '사상계'의 주필을 맡는다. 사상계는 한국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물질적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겨레의 앞길을 마련하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함석헌이 사상계에 쓴 첫 글은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1956년 1월호)였다. 전쟁에 즈음해 기독교는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 비판한 글이다. 이듬해 '할 말이 있다'(1957년 3월호)를 실었다. 군인과 대통령을 비판하고 있는 대목이 있어서 장준하가 그 내용을 뺐다. 이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1958년)라는 글에 다시 그 내용을 넣었다. 함석헌은 필화로 투옥된다. '생각하는 백성...'에는 한국전쟁의 원인을 외부(소련과 미국의 갈등)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책임을 살피자는 제안이 들어있다.
1957년 천안에 씨알농장을 만들었다. 간디의 아슈람(Ashram)을 본받은 공동체다. 이때 함석헌에게 불미스런 일이 일어났다. 파문이 커지자 그는 무교회와도 결별했고 거의 모든 관계를 끊었다. 스승 류영모도 그를 공개적으로 질책했다. 함석헌에 대한 기대를 버린 건 아니었다. 이 무렵 다석일지에는 "함은 이제 안 오려는가, 영 이별인가"라는 구절이 보인다. "내게는 두 개의 벽이 있다. 동쪽 벽은 남강 이승훈 선생이고 서쪽 벽은 함석헌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던 그가 실수를 이유로 제자를 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직접적 인연'은 여기까지로 멈춰 있다.
사무치는 고립의 시절, 기록해놓은 함석헌의 정신적 공황의 자취가 남아있다. "무너진 내 탑은 이제 아까운 생각 없건만, 저 언덕 높이 우뚝우뚝 서는 돌탑들이 저물어가는 햇빛을 가리워 무서운 생각만 든다." 이 말은 윤동주의 시 '십자가'를 연상시킨다. "쫓아오던 햇빛인데/지금 교회당 꼭대기/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괴로웠던 사나이,/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십자가가 허락된다면//모가지를 드리우고/꽃처럼 피어나는 피를/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함석헌 또한 이런 심경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그는 부당한 권력에 대한 투쟁의 필전(筆戰)을 계속했다. 5·16 이후에는 '5·16을 어떻게 볼까'를 실었다. 군인들이 어서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주문하는 글이었다. 당시 지식인 중에서 5·16을 쿠데타라고 정면으로 비판했던 사람은 함석헌 밖에 없었다. 이 글 때문에 미국 국무성의 초청을 받아 방미(訪美)한다. 퀘이커교도와 교류하고 퀘이커학교에서 수업을 받은 것은 이때였다. 퀘이커는 십일조에 반대하고 목사를 두지 않는 개신교의 일파이다. 인디언을 옹호하고 노예제도를 반대했던 것도 이들이다.
박 정권에 정면도전 하다 징역형을 받는다. 사상계 폐간 이후엔 '씨알의 소리'를 창간해 폐간과 재발행의 투쟁을 거듭했다. 1974년 윤보선 김대중과 함께 민주회복국민운동본부의 고문을 맡아 시국선언에 참여했고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른다. 1979년과 1985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 퀘이커봉사회의 추천으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른다. 2002년 8월 15일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이 추서되고 경기도 마차산에 묻혔던 주검은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됐다.
류영모와 함석헌 사상 비교
함석헌의 사상은, 거의 모두 류영모 사상에 기반하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씨알사상은 1948년 함석헌이 월남한 뒤 YMCA에서 류영모의 '대학(大學)' 강의를 듣고 깨우쳐 응용한 것이다.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이란 구절을 류영모는 "한 배움 길은 밝은 속알 밝힘에 있고, 씨알 어뵘에 있으며, 된 데 머뭄에 있나니라"고 풀었다. 민(民)을 백성이나 민초라고 하지 않고 '씨알'로 풀었다. 함석헌은 이 씨알을 주체성을 가진 백성, 근본성을 가진 백성, 순수성을 가진 백성, 생동력을 지닌 백성, 관계성으로 뭉치는 백성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확장했다.
함석헌 사상은 신앙의 생명성과 주체성을 강조한다. 자라나는 신앙을 역설했고, 내 마음속에 존재하는 신을 중시했다. 이 또한 류영모가 실천을 통해 보인, 자율신앙과 씨알정신의 정수이다. 예수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사상 또한 류영모의 가르침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의 영성을 받은 인간이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육신의 예수가 아니라 영성의 예수이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예수가 인간을 위해 피를 흘렸다는 대속신앙과 십자가의 예수육신 경배에 대한 문제의식을 낳게 된다. 함석헌은 바라보는 십자가에서 몸소 지는 십자가를 강조하는 쪽으로 나아갔다고 말했다. 윤동주가 '십자가'에서 표현한 바로 그 염원이다. 이것은 스승 류영모가 했던 말이기도 하다.
평화주의와 인도주의를 강조하는 사상, '사랑이 이긴다'는 함석헌의 슬로건은 류영모가 성서를 통해서 얻은 신의 단호한 직설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는 명령의 실천을 함의한다. 함석헌은 이 사랑을 공동체에 적용하여 지상천국을 꿈꾸었지만, 류영모는 성서를 통해 신이 보여준 '투철한 무저항과 비폭력 정신'을 인간이 지녀야할 근본적인 지향이라고 믿는 경지까지 나아갔다. 함석헌은 세상에 나서서 한국 민주화를 일구는 '투사'의 역할을 했지만, 류영모는 은둔과 금욕을 통해 신과의 대화로 고독하지만 강력한 사상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 자율신앙과 치열한 생각의 불꽃으로 피운 '얼나'의 전진은 류영모에게 고유한 것이었다.
류영모와 함석헌은 서로에 대한 경모(敬慕)를 유지하면서도, 사상의 결론은 상당한 차이로 벌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함석헌은 시대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공동체의 실천으로 종교적 신념을 관철하며 세상의 진화에 기여했지만, 이 땅의 신앙사상이 개척한 류영모의 '영적 공간'에는 온전히 접근할 수 없었다. 스승 류영모와 달리, 함석헌에겐 성령으로 임재한 '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류영모의 우주론적 사유, 가온찍기에서 드러나는 독창적인 존재론과 실존의식. 성령에 대한 심오한 탐구, 사상을 개념화하는 고유언어의 발굴과 해석과 제시, 인간 육신에 대한 단호하고 실천적인 분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류영모의 사상은 아직도 본령이 드러나지 않은 채 묻혀 있는 이 시대 위대한 생각의 중심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참으로 신천옹(信天翁)은 류영모였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