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이 만장일치로 류영모 선출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왔다. 일본천황이 라디오방송에 나와 떨리는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을 한 뒤, 일본인들이 사라졌다. 한반도에 그야말로 쥐 죽은 듯한 고요가 일순간에 찾아왔다. 조선총독부가 사라지니 나라의 행정공백도 함께 찾아왔다. 마치 옛 부족사회로 돌아간 듯 주민들이 나서서 자치기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면사무소에도 면 자치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해 면민들이 모였다.
류영모는 오롯이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세상 권력의 일을 앞장서 맡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를 뽑아준 주민들에게 자치위원장직을 고사(固辭)했다. 면협의회는 결렬되어 행정 공백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음을 돌렸다. 이걸 권력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당장의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인(仁)으로 여기기로 했다. 류영모는 마침내 위원장직을 수락했다. 당장 주민들의 양식 배급과 도둑 경비가 급했다. "자, 청년들은 일본군인들이 두고간 총들을 모두 수거해 오시오. 오늘밤부터 마을 순찰을 돌도록 하겠습니다."
며칠 뒤 일본인 경찰관이 은평면사무소로 불쑥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그는 면사무소에 있는 모든 무기를 내놓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류영모가 담담히 일본인의 권총 총구 앞에 나섰다. "왜 이리 무례한 행동을 하시오. 권총을 거두시오. 지금 면에서 하는 일은, 치안을 수립하는 것이오. 치안이 수립되어야 당신들이 무사히 돌아가도록 보호를 해줄 수 있지 않겠소. 지금에 와서 굳이 남아있는 일본인을 공격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소. 헛된 걱정 말고 당신네 나라로 돌아가시오." 일본인 경관은 그 말을 듣고는 권총을 다시 옷속에 집어넣고 "오해해서 미안하오"라고 말하면서 물러났다.
총 들고 들이닥친 일본경관에게 한 말
은평면 관할인 수색 지역에 일본군 7사단 군창고가 있었다. 8월 25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9월 7일 미군 24사단이 서울 용산에 주둔한다. 이 사단의 중대병력이 은평면으로 배치됐다. 일본군 사단의 군창고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은평면사무소에 온 미군들은, 뜻밖에 영어가 제법 유창한 사람을 만나 반가워했다. 류영모의 맏아들 류의상이었다.
그는 서울 제2고보를 졸업한 뒤 집에서 농사를 돕고 있었다. 미군들은 류의상을 용산본부로 데리고 갔다. 이틀간 의상은 그곳에서 통역을 했다. 이후 미군 군속이 되어 일했고 이어 미국대사관에서 근무하게 된다. 류의상은 영국잡지 '인카운터(Encounter)'에 황순원 소설 '소나기'를 영역(英譯) 응모해 인도인과 함께 '번역 최우수상'을 공동수상하기도 했고,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영역해 미국에서 출판하기도 했다.
해방 공간의 이 경험들은, 국가질서의 기초를 새로 놓으며 이 나라에 대한 사명감을 새겨보는 기회였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동네일을 볼 마을 이장감이 많아야 나라가 바로 됩니다. 온나라 이장들이 다 훌륭하면 나라 걱정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나라의 대들보감을 찾는다고 하는데, 서까래도 있어야 지붕을 덮지요. 대들보 쪼개서 서까래 만들겠습니까." 지역 곳곳의 실핏줄을 이루는 행정에서 '인재'가 살아있어야 국가가 건강하다는 생각은, 지금도 몹시 유효하지 않은가.
어느 날 면 자치위의 상위기구인 고양군 자치위원회를 구성한다는 연락이 왔다. 은평면 자치위원장이었던 류영모는 그 자리에 참석했다. 거기서 그는 좀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다. 군 자치위원회가 아니라 군 인민위원회라는 것이다. 게다가 거기에 참여한 이들이 서로를 '동무'라고 부르고 있었다. 공산당원들이 위원회에 대거 참여한 것이다. 류영모는, 그날 바로 면 자치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난다.
해방 공간은 어느새 공산주의자들이 득세를 하고 있었다. 항복을 앞둔 조선총독부는 일본인들의 안전 귀환을 위해 송진우에게 총독부의 역할을 대행해달라고 당부했다. 송진우는 거절했다. 그러자 여운형에게 부탁을 했다. 여운형은 그 일을 인수받아 8월 15일 12시 일본천황의 항복 방송이 있은 직후 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고 자신이 위원장을 맡았다. 여운형은 사회주의 사상에 우호적이었다. 1922년 1월 22일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피압박인민대회에 참석한 바도 있다. 그의 주위엔 남로당 당수 박헌영의 지시를 받는 이강국, 최용달, 김세용과 같은 공산주의자들이 참모로 있었다. 이들은 미군이 서울에 진주하는 9월 7일보다 하루 앞선 6일 밤에 경기여고 강당에서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다. 9월 14일 인민공화국 내각을 발표한다. 이후, 전국 각지의 인민위원회가 구성되기 시작했다.
그는 왜 공산주의에 대해 단호했나
미군정이 들어선 뒤 인민위원회를 다시 몰아냈다. 공산당원들이 체포되기 시작했다. 이 혼란스런 정국에서 류영모는 단호히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오직 신을 우러르며 은둔적 삶을 살고자 하였고 투철한 기독사상을 지닌 그가, 저 이념에 대해 유독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 까닭은 무엇일까.
근현대에 들어와 중요한 개념이 된 '공산주의'는, 현재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활동하고 있는 현대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 주의를 말한다. 마르크스는 프랑스혁명의 자유와 평등이념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조국 독일에 비해 프랑스는 당시 사상선진국이었다. 그가 자본가계급(부르주아지) 대신 노동계급(프롤레타리아트)을 혁명의 주체로 내세운 것은, 경제적으로 낙후한 독일의 상황을 고려한 결과였다. 인간성의 상실태(喪失態)인 노동자들의 자기회복, 즉 '해방'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물질생산력이 역사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보았다(역사적 유물론). 한 시대의 생산관계는 그 시대의 생산력에 의해 결정된다. 생산관계와 생산력은 사회의 토대이며, 정치, 법률, 사상, 종교, 문화는 이 경제토대 위에 구축된 상부구조로 보았다. 그런데 생산력은 과학기술 발달에 의해 발전변화한다. 생산력은 새로워졌는데, 생산관계는 예전의 것이 유지되고 있을 때 '모순'이 생겨나고, 계급 간의 갈등과 투쟁이 일어난다. 이 결과 새로운 생산관계가 만들어지면서, 그 위의 상부구조까지 바꾼다고 설명했다.
류영모는 여기에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이 스며들어 있다고 보았다. 첫째는 '물질'이란 무엇인가 라는 근본 물음이고, 또 하나는 '국가'란 무엇인가(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또다른 근본 물음을 품고 있다. 서구에서 거의 동시에 들어온 근대의 두 이념체제는 모두, '물질'이 가장 중요하다는 전제 위에서 출발하고 있다. 물질이 이토록 중요시된 까닭은, 획기적인 기술적 진보로 이뤄진 근대문명과 그것에 대한 열광이 인간의 가치체계 전체를 흔들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류영모는 당연히, 서구가 제시하고 있는 '물질 중심'의 가치로 세상을 경영하겠다는 발상에 동의할 수 없었다. 오히려 물질은 인간이 진실로 추구해야 할 '정신적인 가치'를 폄하하고 인간의 가치체계를 왜곡시키는 '경계해야 할 욕망의 대상'으로 보았다.
"'마르크스와 예수'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 무엇인가 공통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이름 부르는 이가, 신이 일러준 말씀을 그대로 하면 공산주의가 필요했겠습니까." 류영모의 이 말은, 원시 공산주의 사상을 환기한 것이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모든 것이 신의 것이므로 사람들이 함께 나누어 써야 한다고 여겼다. 물질에 대해 지나친 의미부여와 의존을 경계해 사유재산을 배격했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물질(노동의 산물)의 충분한 소유를 인간 삶의 최대 목표로 전제하고,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경제적 토대만으로 사회의 양상과 변화를 진단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사랑한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는 빵 이상의 것이 있다. 인생에는 반드시 뜻이 있다. 진리가 그것이고 하느님이 그것이다. 물질을 모으는 것을 그만두고 마음을 비워두라. 그래야 하느님이 들어오신다." 류영모가 사사(師事)한 톨스토이는 훨씬 더 단호하게 말한다. "사회주의자에게는 사실상 사랑이 없다. 다만 지배자에 대하여 증오만 느끼고 있으며, 유복한 사람의 삶을 넌지시 질투한다. 배설물에 모여드는 파리떼의 욕망이다. 사회주의가 승리한다면 세상은 살벌해질 수밖에 없다."
이 이념의 경우, 오직 인간 행복과 삶의 만족을 계량하는 저울로, 물질적 충족만을 내세웠다는 점 또한 류영모로서는 가납하기 어려운 대목이었다. 물질은, 인간 삶의 본질이 될 수 없다. 게다가, 이 이념은 다른 계급에 대한 증오와 그것을 넘어뜨리는 혁명을 중심으로, 평등한 사회로의 변혁을 설계하고 있었다. 증오나 분노로 얻을 수 있는 행복과 만족? 류영모는 이 대목에서 고개를 저었다.
거기에 근대에 정립되는 '국가'라는 개념은, 경제 이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공산주의는 물질의 공동생산과 공평분배에 초점을 맞췄고, 자본주의는 인간의 이기심과 경쟁심을 활용한 생산 경쟁과 시장을 통한 소비가 중심이 되는 자율적 분배를 꿈꾸었다. 국가가 생산과 분배의 관리자가 되는 공산주의는 통제경제 혹은 관리경제를 선택했고, 자본주의는 사기업의 경쟁생산시스템과 시장경제를 택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에 비해 '국가'의 역할이 커질 수밖에 없다.
류영모는 '국가'의 권력이 커질수록, 그 해악 또한 커질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하느님은 예수를 통해 분명히 밝혔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마태복음 5:38, 39)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신의 단호한 이 말은, 국가 권력에 대한 심각한 경고를 담고 있는 게 사실이다. 국가는 때로 전쟁을 수행하고, 법을 제정하여 '악한 자'에게 형벌을 주고, 인간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행사해왔기에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예수의 말을 근본적으로 거스르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필요악'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긴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국가의 '악행'에 해당하는 권력적 역할을 파격적으로 증대하여 '기층(基層)계급의 이익'을 확대하겠다고 나선 공산주의 이념에 대해선 더더욱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류영모는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상사람들은 세상을 잘 다스려야 한다, 나라를 잘해나가야 한다고 한다. 신에게 가는 것을 잘해야지 그걸 버린 채 나라를 잘 다스려야 한다는 건 헛일이다. 예수가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요한 18:36)라고 한 것보다 더한 국가 부정 사상은 없을 것이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가지 말라,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 가라'(마태오 10:5~6)고 한 예수만큼 나라를 사랑한 이도 없다."
예수가 말한 나라는 천국이며, 지상의 나라는 육신을 잠시 기탁한 곳에 불과하다. 국가행위가 모두 '성경'을 위반한 인간행위일 수 있다는 근본문제에 대해 류영모는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식민지의 고통과 동족상잔을 겪으면서 일어선 이 나라에 대해서는 예수가 수난을 당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보낸 시선처럼, 깊은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내가 나란 줄 알면 잘 살 나라 참 좋은 나라
누가 내라 내가 내지 우리나라 좋은 나라
등걸님(단군) 우리 한울(하늘)로 열어놓으신(開天) 좋은 나라
류영모의 시조, '우리나라'
'나라'라는 말이 '나'와 비슷한 것에 주목한 시다. 개인의 주체적인 자율종교를 역설한 류영모는 국민인 내가 '나라'의 마음으로 행동하면 이 나라가 잘살 수 있다고 믿었다. 마지막 행에서 나와 나라의 통합뿐 아니라, 나와 나라와 종교의 통합까지 천명을 하고 있다. 개천(開天)은 단군이 나라를 세운 것을 말한다. 하늘을 연 것은 하느님과 '나'가 서로 만났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라'가 생겨났으니, 나라와 신앙이 하나였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