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필 제자 김준호의 '인생 반전'
1967년 류영모는 광주 무등산의 산양목장에 머물렀다. 그 목장은 류영모를 존경하던 김정호 교수(목포대)가 경영하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사서(四書)의 하나인 '중용(中庸)'을 우리말로 풀어냈다. 류영모는 '중용'을 '가온씀'이라고 했다. 가온(中)은 참나를 의미하며 '씀'은 참나를 사는 생활을 뜻한다.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통하는 것이 바로 공자의 사상이라고 푼다.
산양목장에서 류영모는 모여든 제자들 앞에 경전과 자작한 글들을 펼쳐놓고 강의를 하곤 했다. 하느님과 통하는 강의를 들으려 사람들이 몰렸다. 그중에는 이현필의 수제자인 김준호도 있었다. 김준호는 누구였던가.
광주 다리밑 아이들을 구하라
1950년 광주YMCA로 가서 이현필의 제자가 됐다. 비가 몹시 내리는 아침 이현필은 김준호에게 밥을 동냥해 오라고 했다. 김준호는 그 말을 듣자마자 맨발로 달려나갔다. 어느 부잣집 앞에 서서 "밥 좀 주세요"라고 외쳤다. 한참 뒤 새댁이 놋그릇에 든 밥을 들고 나왔다. 그는 빈손을 벌려 밥을 받으려 했다. 그러자 "그릇째 가져가세요"라고 했다. 감사하다고 절을 하자, 그녀는 "하느님께 감사하세요"라고 말을 했다. 김준호가 밥을 들고 돌아갔을 때, 이현필은 맨발로 뛰어나와 감격어린 목소리로 "이 밥은 제가 먼저 먹겠습니다"라며 그것을 조금 삼켰다. 스승이 어떤 의식을 치르는 것 같았다고 김준호는 말했다. 이현필은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걸인 한명을 붙여줘 같이 다니게 했다. 탁발을 몸에 익히게 한 것이다. "성경도 정신이 살아야 도움이 되는 것이지 정신이 죽으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그의 말이었다.
동광원의 생활을 못 견뎌 뛰쳐나간 아이들이 있었다. 겨울이 닥치자 이현필은 중얼거리듯 이렇게 말했다. "상류를 빠져나간 물고기는 하류 다리 밑에서 건질 수 있을 터인데..." 이 말을 들은 김준호는 바로 동광원을 나와 광주의 다리 밑에서 걸인들과 함께 생활했다. 이로부터 10여년간 걸인들과 함께 살았다. 그러다가 폐결핵에 걸리자 이현필이 동광원으로 다시 불렀다. 동광원에서는 약의 복용도 하지 않았고 육식도 금했다. 이곳의 철칙이었다.
김준호를 위해 '파계'까지 한 이현필
그 뒤 서울에 온 이현필이 후두결핵염에 걸렸을 때, 김준호를 불렀다. 그는 걸인을 시켜 굴비를 사오게 했다. 김준호는 깜짝 놀랐다. 그는 굴비국물을 입 속에 떠넣어 달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명한 '이현필 파계사건'이다. 이후, 이현필은 김준호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치료를 받게 했다. 아픈 제자에게 파계를 하더라도 몸부터 나으라는 암시를 한 것이었다고 김준호는 말했다. 이후 건강을 회복한 김준호는 무등산에서 움막생활을 하며 폐결핵 환자를 도우며 살았다. 정부가 폐결핵 환자 요양소를 세우기 전까지 20여년간 그 일을 했다. 그는 동광원 정신의 큰 기둥이었다.
아까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김준호가 류영모 강의를 듣고 왔을 때 이현필은 문득 이렇게 말했다. "나도 잘 듣는 귀가 있건만. 류영모 선생님 말씀을 혼자만 듣다니. 선생님을 모시고 와서 다 함께 들읍시다." 김준호는 그뒤 산양목장에 가서 류영모를 동광원으로 초빙했다. 처음 듣는 강의에 동광원이 감동으로 술렁였다. 이현필은 류영모가 읊어주는 시를 좔좔 외곤 했다.
류영모 "나도 동광원서 함께하고 싶소"
어느날 류영모는 강의 중에 이렇게 말했다. "이곳이 참 좋으니, 나도 와서 여러분과 함께해도 좋을지요?" 이현필이 반색을 했다. "선생님을 맞을 준비는 언제나 해놓고 있습니다. 모두들 대환영이지요." 류영모는 동광원의 땀 흘리는 삶과 밑바닥을 마다않는 실천궁행, 어려운 이를 돕는 인애(隣愛), 철저한 금욕정신과 희생정신이 자신과 참 잘 맞는다고 여겼다. 그들과 진심으로 함께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현필은 이런 말도 했다. "류영모 선생님은 인도에서 태어났다면 부처님이 되었을 겁니다."
그는 동광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1957년 9월 6일 YMCA연경반 강의)
"이번 남쪽에 가서 꼭 한 달 동안 다녀 보았습니다. 다니며 지내는 동안 다른 얘기는 그만두더라도 오늘 이 사람이 마음에 얻은 것은 이 세상 가운데 가장 마음에서 하느님이 주신 것을 받아먹었다는 생각으로 한 달을 지냈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무슨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집에서 지어 준 밥보다 더 깨끗이 먹었습니다. 나로서는 먹을 자격이 없으나 일생 중 달갑게 먹을 것을 먹어 보았습니다.
이번 내가 다닌 곳의 사람들은 보통사람과 다른 이들입니다. 될 수 있으면 장가 안 가려는 경향을 가졌습니다. 그저 일하고 기도하면서 독신자들이 모여서 함께 살자는 것입니다. 전라남도에 가면 이러한 동네가 많습니다. 10명, 20명이 군데군데에 있는데 몇 달 뒤에 가도 늘 그들이 그들입니다. 자작(自作) ·자강(自强) ·자급(自給)하여 먹고 기도하는 생활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이들 마을은 수십 리, 수백 리씩 떨어져 있지만 서로 찾아 만나 보는 것이 마치 친척을 찾아다니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현재로는 도무지 살아갈 희망이 없다가도 이들과 같이 있을 때에는 살려는 희망이 절로 생깁니다. 이 사람들의 생활이라야 도와 줄 수 있으면 있는 대로 도와 주고 싶은 형편인데 그러한 형편의 그 사람들이 나를 무척 대접하려고 애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리쌀·감자·고구마 이런 것들을 사발에 수북이 담아 대접해 줍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내가 좋아하는 감자를 알아서 줍니다. 바닷가에 있는 곳에서는 물고기도 먹는가봅니다. 전에는 배·대추·호두·잣·복숭아 같은 과일이 더 풍부했는데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점점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식혜를 내놓는데 서울 사람은 빛깔을 좋아하니까 하얀 찹쌀로 식혜를 만드는데 거기서는 보리쌀로 하는지 찌꺼기가 있고 검은색이라 보기에는 나쁘지만 먹어 보면 구수한 맛과 단맛이 아주 훌륭했습니다. 이들의 생활을 보면 우리가 속히 자급자족해야겠다는 이 마당에 참고되는 일이 많습니다. 단 한 가지 모기와 벼룩이 많다는 것입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이라야 서로가 만나 보는데 모깃불을 피워도 모기에 물립니다. 우리 생활은 너무 눈이 높아서는 안 됩니다. 입이 높아서는 안 됩니다. 체면과 거만으로 우리가 살 수 있습니까? 아무리 양반 나라라 해도 겸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간이(簡易)생활운동을 우리는 해야 합니다. 다시 금요일이 되어서 여러분을 만나 보니 감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이번 지방에 가서 아주 앉을 자리가 있으면 그냥 눌러 있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내가 정말 좋아해서 앉을 만한 자리가 아직은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아직은 한집에 있는 자식이 해다 주는 밥처럼 편한 곳은 없는 것 같습니다. 후일은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이번에도 몇 달 더 지방에 앉아 있으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류영모가 깊이 마음을 두었던 곳이 동광원이었다. 여기서 묘사된 동광원은 본원(本園)만이 아니라 호남 일대 동광원 사람들의 가정을 둘러본 풍경도 포함되어 있다.
동광원은 새마을정신의 요람
동광원은 이후 이 나라를 부흥시킨 새마을운동 정신의 한 바탕이 되었다. 이현필의 가르침을 받았고 류영모를 자주 찾아뵈었던 김준은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장을 세 차례(1, 2, 6대)나 맡았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정신가치 운동의 최적임자로 꼽았던 사람이다.
동광원 강연이 끝나면 늘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성에 사는 심상국이었다. 그는 그를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가서 식사를 대접하며 강의를 들었다. 온 마을 사람들을 그의 마당에 모아놓고, 가르침을 받도록 했다. 두 사람은 30여년 동안 교유를 했고, 서로 편지가 오갔다. 심상국이 류영모로부터 받은 편지가 17통이 남아있다(그의 아들 심복섭은 이 편지를 제자 박영호에게 건네주었다. 박영호 또한 류영모에게서 받은 편지 12통을 보관하고 있다).
심상국은 원래 그 일대에 이름난 주먹이었는데, 류영모를 만나 삶이 바뀌었다고 한다. 심상국은 어느 날 류영모에게 "중용(中庸)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류영모는 "칼을 좀 쓴다고 하던데, 혹시 칼을 갈아보았는가?"라고 되물었다. "예, 갈아보긴 했습니다만..." 심상국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칼을 부지런히 갈면, 마침내 날이 보이지 않는 경지에 이른다네. 날이 보이지 않는 칼, 그게 바로 중용일세."
1964년 3월 18일 새벽 3시 이현필이 눈을 감았다. 51세의 성자는 결핵환자를 간호하다 결핵에 걸려 돌아갔다. "기쁘다 기쁘다."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류영모는 그의 장례에 다녀온 뒤 이렇게 기록했다.
동광원에 땅과 집 기증한 류영모
"직경 3만리 흙구슬(지구)에 높이 고이어 물로 뒤덮은 넓은 위(바다)로 쌓아올린 김 구슬(대기권)과 밀김과 썰김[호흡(呼吸)]으로 목숨 쉬 잔치를 그만 마치신가. 임자(1913)년에 나서 갑진(1964)년에 마치다. 인제는 쓰지 않게 되어두고 가신 몸은 흙 속에 돌려 묻었다. 두덩으로 올라 묻고, 넓은 흙 위에 떼풀만 보니 떼는 잘 살겠구나. 그러나 떼도 살고 죽어야 마치지. 이제 제도 예 마치면 제 가면 하는 것이다. 현필 이언(도반)의 마치신 토우는 고 현창주언이 짓고 일고 누시던 방이다. 나도 앞서 자보던 방인데 이 저녁에도 예서 김, 김, 이, 류가 한밤 쉬자고 눕다. 늙으신 능주 한나 주인이 말씀. 이선생 현필언께서는 16일 중 괴로워하심을 나타내시다가 17일 중 돌아갈 뜻의 말씀과 하느님께 빎으로 빎으로 하시다 고요하며 잠잠한 속으로 아무 기침이나 담 끓는 일도 없다가 새벽에 끝."
류영모는 전북 완주군에 있는 임야 4만여 평과 대지 3백여 평의 집을 사서 동광원에 기증한다. 이현필의 제자 김준호가 전주에 동광원 분원을 세우겠다고 해서 사준 것이다. 맏아들 류의상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는데 그때 판 구기동 임야로 생긴 돈의 일부로 전주 동광원 터와 집을 사주었다. 그럴 만큼 류영모는 제자처럼 여긴 이현필을 아꼈고, 동광원을 아꼈으며, 또 이 빛고을 터전에서 피어난 영성의 빛을 아꼈다.
[다석 한시 - 하느님 관상을 봤다]
류영모는 한복을 자주 입었다. 때로 아내의 일손을 덜어주기 위해, '국민복'을 지어 입기도 했다. 국민복은 넥타이를 안 매는 양복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입었던 레닌복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삭발한 머리에 무명옷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천으로 된 손가방을 들었다. 가방 속에는 YMCA 강의교재를 넣고 다녔다. 이런 차림을 보고 누군가 "관상(觀相)쟁이인가"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뒤 류영모는, "이왕 그런 말을 들은 차에 하느님 관상을 한번 봤다"면서 자작 한시 한 편을 소개했다. 하느님은 어떻게 생겼는가. 노자가 도덕경에서 일깨워줬다. '곡신불사(谷神不死)'라고.
觀相(관상), 곡신불사(谷神不死)' (1951.11.4)
空相莊嚴物現象(공상장엄물현상)
色相好惡我隱惑(색상호오아은혹)
小見渾盲鬼出晝(소견혼맹귀출주)
大觀分明神渾谷(대관분명신혼곡)
관상, 없이 계신 신은 영생합니다
빈탕(허공)의 얼굴은 장엄하여 만물의 진상을 드러냅니다
세상의 얼굴은 좋고싫음으로 자아의 미혹됨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인간을 보건대, 침침하여 헛된 것이 나오는 대낮이요
신을 보건대, 또렷하여 성령이 다니는 허공길입니다
신의 관상을 보았더니 어땠는가. 다석은, 공상(空相)이라고 했다. 텅 빈 얼굴이다. 스스로 텅 비어 있기에 만물을 그대로 드러낸다. 반면 인간은 이미 온갖 색(色, 표정)을 가진 얼굴이다. 그 얼굴의 소유자들은, 마음속에 온갖 의심과 번뇌와 질투와 자랑을 지니고 있다. 인간 얼굴에서 보이는 것은 스스로 눈을 감은 것처럼, 온갖 헛된 생각이 훤한 대낮에도 들끓는 꼴이다. 신의 얼굴에서 보이는 것은 저절로 또렷하여 골짜기 신이 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골짜기 신은 무엇인가. 인간의 상대세계에 내려온 신이 아니라 골짜기로 표현된 허공 그 자체이다. 류영모의 표현으로 하자면, '빈탕한데'에 없이 계시는 하느님이다. 다석이 본 신의 관상 종합 : 없음의 얼굴은 장엄하여 만물을 있는대로 드러내고, 우주 허공은 또렷하니 빈 골짜기 같은 하느님은 영생하는 것을 알겠도다. 노자의 '곡신불사'는 그 깨달음에 이른 것이었다. 텅 빈 신은 죽음이 없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