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없이 계신다
하느님이란 말은 '하늘'에 대한 경배를 신격화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이란 호칭은, 몇 가지 다른 의미를 품을 수 있다. 하늘에 존재하는 신을 의미하거나 하늘에서 내려온 신을 뜻한다. 또 하늘 자체가 신의 존재성을 이루기도 하고, 하늘로 상징되는, 인간보다 우월한 역량과 위치의 개념 전체를 의미할 수 있다. 또한 하늘이 내리는 천벌 혹은 천재(天災)의 집행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류영모는 신에 대한 다양하고 모호한 개념들을 궁신지화(窮神知化)의 탐구로 파고들어, 고전적인 신관(神觀)이 지닌 한계들을 깊이 성찰함으로써 기독신앙의 신을 현대적인 우주론(cosmology)의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그는 신에 대한 존재 논쟁을 이 한 마디로 종결지었다. "신은 없이 계신다."
그동안 기독교를 비롯한 서구 중심의 종교는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었다. 신의 존재는 믿음 속에 있으므로 믿음만이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신이 확고해지는 이 역설적인 이항(二項)은, 오히려 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의심케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 게 사실이다. 신의 존재는 오직 인간의 가변적인 믿음 위에 놓여있어야 했다. 류영모는 인간의 마음이나 감관(感官)과 상관없는 절대자, '없이 계신 신'을 드러냈다.
신의 존재 부정과 신의 '실존 긍정' 차이
서구신앙에서 '신이 없다'는 발언은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다. 그러나 류영모가 말하는 '신이 없다'는 단언은, 신의 실존 양상을 말한다. 상대세계에서 절대자인 신이 상대적인 면모로 존재하는 것을 인간이 느낄 수 없다는 얘기다. 그 실존 양상이 '없음'으로 존재하는 것, 그것이 신이다. 없이 계신 하느님은 유와 무를 종합한 전체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설명한다. "유무가 합쳐 신이 되고 천지유무를 통하는 것이 신통이다. 신은 하나이다." 이런 궁구(窮究)가 '허공의 하느님'을 이끌어냈고, 우주여행자인 인간과 '빈탕한데' 계시는 신의 합일을 신앙의 목표로 삼는 데까지 이르렀다. 류영모의 신관은 그래서, 우주론으로 읽히기도 한다.
"나는 단일허공을 확실히 느끼는데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느껴진다. 단일허공에 색계가 눈에 티끌과 같이 섞여있다. 색계에 만족을 느끼면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다. 하느님을 찾을 생각도 못한다." 류영모는 우주를 담고 있는 무한허공을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허공은 둘레가 없는 공(空)으로 끝이 없다. 일천억의 태양별을 지닌 은하우주가 일천억개가 넘는 곳이다. 하느님의 마음인 이 허공이 한없는 얼(성령)을 인간에게 준다.
별과 행성, 달과 소행성과 같이 우주에 존재하는 뭉쳐있는 물질덩어리를 '천체(天體)'라 부른다. 우주 속의 물질들이다. 그리고 이 물질들을 감싼 '허공'이 있다. 이 허공과 물질 전체를 아우르는 얼이 있는데 그것이 '성령'이다. 천체와 허공과 성령이 사실은 모두 같은 것이며 이것이 하느님이다. 류영모는 그중에 허공을 특히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부른 것이다.
인격신(人格神)은 참나, 신격인( 神格人)은 얼나
류영모의 신관은 이미 기독교의 인격신관(人格神觀)을 넘어서 있다. 그는 인간과 신이 '참나'와 '얼나'로 통하는, 인격신 신격인(人格神 神格人)의 회통(會通)을 꿈꾼 사람이었다. 천체와 허공의 우주를 아우르는 하느님은 그것이 인간 생각 속에 라이프니츠의 프랙탈 우주처럼 들어와 앉는 '얼나'이다.
2006년 8월 뉴욕타임스에 사진 두 장이 실렸다. 하나는 인간의 뇌 시냅스 구조였고, 하나는 우주의 은하단을 찍은 것이었다. 두 사진은 흡사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었다. 우주가 하나의 입자이며 그 우주를 이루는 무수한 입자들 속에 또다른 무한한 우주가 재현된다는 이론이 프랙탈 우주론이다. 너무나 과감한 주장이라 학계에서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꼬리를 물고 '가능성'이 제기되는 주장이다. 뉴욕타임스의 두 사진은 뇌와 은하의 유사한 구조와 모양을 보여준 것을 넘어, 우주의 방대한 크기를 뇌의 작은 구조로 수학적인 대응을 할 수 있는 전망을 열어줬다고 할 수 있다. 류영모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 몸은 단순히 정신을 담는 그릇만이 아니다. 60조개의 세포가 하나로 뭉쳐 유기체를 이룰 때 여기서 개성이랄까 성격이랄까 한 인격이 나타나는 것은 신비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60조개의 세포가 저마다 정신을 차릴 때에 놀라운 천체 정신인 영원한 인격이 구성되는 게 아닐까. 건강한 육체는 단순한 그릇이 아니라 건강한 정신을 낳게 하는 모체 같다. 나는 수십억 인류가 뭉친 이 우주 위에는 하나의 신격(神格)인 영원한 정신이 꼭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유일신만을 생각하는 나머지 우주만물을 하나의 죽은 물질로만 취급하는 사람이 많은데 나는 우주가 단순히 죽은 물질이라고 푸대접할 수가 없다.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산 것처럼 우주 만물은 하나하나가 산 것이며 이 우주에는 절대의식, 절대신격이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현재 관측 가능한 우주의 크기는 지름이 930억 광년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뉴턴의 고전역학을 중심으로 한 우주론이 확립된 이후 '정상우주론'이 정설이었다. 우주 시공간이 태초부터 현재까지 늘 같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폭발 이론이 '우주배경복사(우주 대폭발의 진행 흔적)'로 입증됨으로써 지금은 '팽창우주론'이 상식이 되었다.
팽창하는 우주와 역동하는 하느님
현재의 우주는 대폭발 이후 약 136억년이 경과한 것으로 보는데, 계속 팽창하고 있다고 본다. 아직 우주에 관한 인간의 지식들은 가설과 추정에 의존한 것이 많다. 우주를 구성하는 상당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암흑물질이나 더 규명이 필요한 암흑에너지 같은 것들이 설명되지 않기에, '모든 것에 대한 이론(theory of everything)은 여전히 미완성이다.
'생성하고 팽창하는 우주'는 어쩌면 류영모가 파악한 신의 실존을 더욱 역동적으로 이해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하느님은 변하지 않는 무(無)와 변하는 유(有)의 양면을 가졌기에 전체로는 변하면서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으면서 변한다"는 류영모의 생각이 그걸 말해준다. 천체의 역동성과 허공의 포용성, 그리고 인간이 여전히 생각마저 닿을 수 없으며 관측 불가능한 우주의 외연(外延)까지도, 류영모의 신관에선 모두 하나의 점(点)과 같은 얼나(성령)에 수렴한다. "하느님의 실체는 천체도 허공도 아닌, 성령이다."
류영모는 스스로가 우주인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우주 공간에 태어난 것이다. 지구라는 우주선을 타고 우주여행을 하는 중이다. 생물들과 함께 우주선 지구호를 함께 탔다. 세계일주가 아니라 태양계를 천주, 만주하면서 태양계가 소속된 모든 성단으로서는 은하계를 무수주하려는 영원 비행이다. 이걸 전망할 줄 모르면 허공 중의 감옥일 뿐이다. 생각의 불꽃이 우주의 주인이 되면 그것으로 충분히 우주인으로 사는 것이다. 생각의 불꽃이란 우주를 초월하는 정신이다. 삶의 목적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 하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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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은 저녁에 깨고 아침에 주무신다
다석 명상한시(漢詩) - 晝夜(주야, 낮과 밤, 1957.9.18)
初月枕去多晨省(초월침거다신성)
南斗牀來一昏定(남두상래일혼정)
昏定晨省曾缺如(혼정신성증결여)
醉生夢死何頓整(취생몽사하돈정)
초승달 지는 저녁, 베개를 걷으니 늘 새벽 살핌이고
남두성 별들 지는 새벽, 침상을 펴니 그게 저녁자리 펴드림인 것을
저녁자리 펴드리고 새벽 살피건만 역시 뭔가 모자랐구나
취한 생, 꿈같은 죽음에 어찌 정리정돈이 있으리
이 시는 혼정신성(昏定晨省)이 열쇠말이다. 예기(禮記) 곡례편에 나오는 말이다. 凡爲人子之禮 冬溫而夏淸 昏定而晨省(범위인자지례 동온이하청 혼정이신성). 무릇 사람의 자식 되는 예법은 겨울에는 (부모님을)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맑게 해드리는 것인데, 저녁에는 잠자리를 펴드리고 새벽에는 잘 주무셨는지 살피는 일이다. 류영모는 인자(人子)로서 하느님에게 예법을 다하는 일을 생각했다. 하느님에게 어떻게 잠자리를 펴드리고 어떻게 잘 주무셨는지 문안 인사를 올릴 것인가. 신과 일심동체로 살아가는 삶을 꿈꾼 그에게, 이 시는 매일매일 성찰한 하룻밤의 경건을 표현해낸 인상적인 '언어풍경'이다.
하느님을 모시고 자는 잠이란 어떤 것인가. 초승달은 대개 아침 9시에 떠서 저녁 9시에 지는데, 해가 지면 서쪽하늘에서 잠시 보이다가 지는 달이다. 베개를 걷는 것은 일어나는 시각을 뜻한다. 저녁답에 이 달이 지는 무렵이 바로 하느님이 깨어나시는 시각이다. 왜 그러냐 하면 하느님은 암흑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남두성(南斗星) 별빛은 밤새 비치다 새벽 무렵 사라진다. 남두성은 여름밤 남쪽 하늘에서 볼 수 있는 궁수자리의 여섯개 별이다.전통신앙에서 북두칠성이 죽음의 별이라면, 남두육성은 생명의 별이라고 한다. 북두칠성의 칠성판에 앉아 생활한 다석이 굳이 남두성을 거론한 것이 우연일까. 죽음의 별을 깔고 앉은 사람이 생명의 별을 지켜보며 신을 생각한다. 어둠에서 영원한 생명을 읽어내는 그의 촉수가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별이 지키는 새벽이 바로 하느님이 주무실 시각으로 자리를 펴드릴 시간이다. 달이 질 때 일어나셨다가 별이 질 때 잠자리에 드는 분. 그러니까 하느님이야 말로 '암흑세계'에 활동하시는 분이 아닌가. 그 말을 저렇게 아름답게 그려놓은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과 주야가 바뀐 분이라는 통찰. 이건 류영모만이 다다를 수 있는 생각이 아닐까 싶다.
그 뒤에 이렇게 읊는다. 그러하시니, 인간이 새벽기도를 하고 저녁기도를 하지만 뭔가 허전한 게 있지 않았던가. 신은 저녁에 깨시고 새벽에 주무시는데, 인간은 엉뚱하게 때 아닌 메시지를 보내고 있으니 제대로 통한 것이 맞겠는가. 인간의 효도 예법인 혼정신성(昏定晨省)이 신에게 늘 생뚱맞지 않겠는가. 그런 깨달음을 얻은 뒤, 그는 취생몽사하돈정(醉生夢死何頓整)이라며 인간이 신에게 바치는 '효도'라는 것이 형편 없음을 일갈한다. '살아있는 것은 취한 것이요 죽은 것은 꿈꾸는 것'이란 말이 취생몽사다. 살아있어도 제 정신이 아니요, 죽어도 제 정신이 아닌 상태다.
살아있어도 제 정신이 아닌 까닭은, 제 삶에 골몰하느라 신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요, 죽어도 제 정신이 아닌 것은 죽어서 닿아야 할 것이 신이건만 엉뚱한 것을 꿈꾸기 때문이다. 살아도 제대로 산 것이 아니요, 죽어도 제대로 죽은 것이 아닌 어리석은 존재다. 그런 취생몽사로 살고 죽으니 어찌 생각의 정돈이나 믿음의 정돈이나 경배(敬拜)의 정돈이 있겠는가. 삶에서 죽음을 볼 줄 알고, 죽음에서 삶을 볼 줄 아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이르는 효도예법이요 진정한 '혼정신성'이다. 밤과 낮이 바뀐 것만 알아도, 하느님 만날 일이 보인다는 걸 류영모는 시 한편에 또렷이 밝혀놓았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