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석, 과학의 시선]
서울대 손석우 교수(대기역학)를 만나 얘기를 들으니, 오존층 구멍을 메워야 한다고 했던 건 태양의 강한 자외선 때문이다. 자외선에 오래 노출되면 사람은 피부암에 걸릴 수 있다. 다른 생명들에게도 자외선 피폭량 증가는 문제가 된다. 식물 역시 마찬가지다. 오존층이 확 뚫리면 우리는 자외선을 피해야 하고, 이에 맞춘 생존방식을 택해야 한다. 생명의 역사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바다에 생명이 살고, 뭍으로 올라오지 못한 건 강한 자외선 때문이었다. 땅은 위험한 곳이었고, 물속이 안전했다.
양서류가 땅으로 올라온 건 오존층이란 방어막이 생긴 이후다. 고생대 데본기(4.16억년 전~3.59억년 전)에 지느러미로 땅을 걷는 물고기들이 나타났다. 이때 양서류들은 몰랐지만, 지구 성층권에는 오존층이 생긴 것이다. 이들이 인간의 먼 조상이다. 인류의 오래된 진화상 선조는 환경변화의 산물이다.
오존은 산소(O₂)로부터 만들어진다. 오존이 있다는 건 지구 대기에 산소가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 전에는 산소가 없을 때가 있었다. 무산소 시대다. 산소는 시아노박테리아(남세균)가 새로운 기술을 익히면서 지상에 나타났다. 시아노박테리아가 선보인 신기술은 이산화탄소와 물을 분해하는 광합성작용이었고, 그 부산물로 산소를 내놓았다. 산소가 물속과 대기를 채워가면서 지구는 무산소 시대에서 유산소 시대로 환경이 급변했다(닉 레인의 책 <산소: 세상을 만든 분자>).
‘산소가 생겼으니 맘대로 숨을 쉴 수 있어 생명체에는 길한 소식이었겠군’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면 안 된다. 그건 산소에 중독된 생명체인 우리 인간의 편의적인 사고일 뿐이다. 무산소 시대에는 산소가 아니라, 다른 물질을 에너지를 얻는 데 사용하는 생명들이 지구를 주름잡았다. 산소 농도가 서서히 높아지고 있을 때, 이들에게 산소는 독성물질이었다. 이들 오래전 생명체는 공기를 싫어한다는, ‘혐기성(嫌氣性)’ 생명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그들은 새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했다. 산소가 밀고 들어오자 쫓기고 쫓겨 외진 곳으로 달아났다. 오늘날 이들 ‘혐기성 생명체’를 볼 수 있는 곳은 산소가 매우 희박한 곳이다. 깊은 바닷속이나, 마그마가 나오는 화산 지대 일부에서 볼 수 있다.
생명의 역사에서 누군가에게는 재앙이지만 누군가에는 기회가 되는 급변사태는 빈번하다. 어린이의 영원한 최애 동물인 공룡도 변화의 자손들이다. 공룡은 고생대가 급격한 기후 변경으로 끝나면서 기회를 잡았다. 고생대 말에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급격히 증가해 대기와 바닷물 온도가 급상승했고, 이런 환경 변화에 적응할 수 없었던 고생대 바다의 지배자인 삼엽충은 몰락했기 때문이다. 당시 기후 변화는 시베리아 화산이 장기간 폭발하면서 대기 중에 뿜어낸 이산화탄소가 초래한 걸로 학계는 보고 있다(마이클 벤턴의 책 <대멸종>). 공룡은 대단한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중생대를 전체 3막으로 보면, 1막이 끝나갈 때쯤 공룡은 세력을 얻어 2막(쥐라기)과 3막(백악기)에 걸쳐 1억5000만년 이상 번성했다.
미국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 갔더니, 신생대 초기의 인간 조상 모습을 만들어 놓았다. 신생대는 6500만년 전에 시작됐다. 공룡이 몰살당한 중생대가 끝나면서 생태계가 백지 상태가 되었을 때 열린 새로운 지질시대이다. 신생대는 포유동물의 시대라고도 부르는데,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의 인간의 먼 조상 조형물이란 포유동물의 조상 모습이다. 그건 다름 아닌 쥐다. 한자어로는 설치류다. 인간이 싫어하는 쥐가 우리의 6500만년 전 진화상 조상의 모습에 가깝다.
설치류는 공룡이 포효하던 시대에서 살았다. 공룡의 위세에 눌려 몸집을 키우지 못했고, 포식자를 피해 밤에 슬금슬금 나와 음식을 구해야 했다. 야행성 동물이었다. 공룡이 우주에서 날아온 소행성 한 방을 맞고 훅하고 사라지자, 포유동물은 물 만난 듯 번창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온갖 포유동물이 생겨났다.
현재 인류를 공격하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인간에게 옮기는 동물은 거의 다 포유동물이라는 특징이 있다. 박쥐가 포유동물이고, 천산갑도 포유동물이다. 박쥐는 날개를 갖고 있어 포유류가 아니라고 볼 수 있고, 천산갑은 몸에 비늘을 갖고 있어 ‘쟤는 파충류 아냐’라고 잘못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 모두 포유류다. 이들이 인간에게 코로나 바이러스를 옮기는 중간숙주가 되는 건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과 박쥐, 천산갑을 모두 포유동물로만 인식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다.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박쥐·천산갑으로 구분하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갖고 있는 생물학 사전에는 구분이 없고 ‘포유류’라고만 쓰여 있다. 같은 포유류이기에 코로나19 입장에서는 위험을 덜 무릅쓰고 ‘호스트 점프’를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신생대의 가장 최근에 등장한 인간은 지구의 사회적 지배자다. 인간은 중생대 공룡이나 고생대 삼엽충처럼 성공적인 스토리를 써가는 중이다. 공룡이나 삼엽충은 1억5000만년 이상 계속된 영광을 누렸다. 우리는 동아프리카 초원에서 등장한 게 불과 수십만년밖에 되지 않았다. 인간이라는 종의 역사는 앞으로 그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삼엽충이나 공룡처럼 오래 살아남는다면, 인간은 지구를 벗어나 우주로 거주 공간을 확대해 나갈 것이다.
19세기 영국인 찰스 다윈은 자연선택론으로 ‘종의 기원’을 설명했다. 자연선택론은 적자(適者)생존이라는 어마무시한 말로 흔히 표현된다. 그런데 ‘적자생존’론에 역설적인 상황이 있다. 적자는 살아남을 수 있으나,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최적자(最適者)는 때로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다. 환경이 타격을 받았을 때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건 그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최적자이다. 고생대 바다의 지배자였던 삼엽충, 중생대 땅을 쿵쿵거리고 걸었던 공룡이 그 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이 이룬 지나친 성공의 희생자다.
코로나19 시대에서도 최적자가 환경 급변에 더 고통을 겪고 있는 걸 우리는 보고 있다.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global supply chain)으로 경쟁을 유지하던 글로벌 기업은 운송이 마비되면서 공장이 멈춰섰다. 그러나 환경에 최적자가 아닌 ‘로컬(지역) 기업’은 코로나 시대가 힘들기는 해도 결정타를 맞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성공적인 종의 역사를 계속 써나갈 수 있을까? 코로나19의 습격으로 강요된 ‘슬로 라이프(slow life)를 살면서 인간 종의 미래를 생각한다. 바이러스도 인간도 그 구성원인 지구 생태계는 미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생태계를 엉망으로 만든 폭군이다. 지상의 거의 모든 곳은 자신을 위한 ’제국 영토‘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원주민(다른 동식물)을 가혹하게 다루고 있다. 인간의 착취로 씨가 마른 원주민이 수도 없이 많다. 생태계의 종 다양성이 무너지고 있다. 인간이 세웠던 ’제국‘의 역사를 보면 다른 민족에 관대했던 경우도 있으나, 한국인이 경험했듯이 가혹했던 제국도 있었다. 관대했던 제국은 다른 민족 구성원을 덜 차별하고 포용정책을 썼다. 지구 생태계 위에 제국을 세운 인간이 가야 할 길이 바로 그런 ’관용적인 제국‘의 길이 아닐까? 다른 종을 자신의 입에 넣을 먹을거리로나 생각하는 인간의 현재 모습은 끔찍하다.
1980년대 오존층에 구멍을 뚫어 자신은 물론 다른 생명들을 위험에 빠뜨릴 뻔했던 게 인간이다. 다행히 인류는 오존층 구멍을 메워가는 데 성공하고 있다. 하지만 화석연료(석유, 석탄)를 태워 만든 온실가스가 초래한 지구 온난화 속도를 낮추는 데는 성공하고 있지 못하다. CFC 생산중단에 합의했던 성공의 스토리를 우리는 지구 대기 온도를 떨어뜨리는 데에서도 다시 만들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인간은 먹고 남은 치킨 뼈를 대규모로 지층에 남기고 사라진 ‘졸부’로 생명의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