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왜 12살 때 잠깐 세상에 얼굴을 비쳤을까
예수의 생애는 거의 드러나 있지 않다. 누가복음에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누가복음은 베들레헴에서의 탄생과 8일째 되는 날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봉헌식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부모의 고향인 갈릴레아 지방 나자렛으로 돌아간다. 이후 어린 시절의 모습은 확인할 수가 없지만 문득 중요한 기록 하나가 등장한다.
예수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서른이 되어서였다. 예수가 12세 이후 어떻게 성장했는지, 또 20대 때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탄생과 봉헌식 때 여러 사람이 '구원을 할 이'가 왔음을 말했다는 점과, 소년예수의 저 한 마디 말을 통해 유추할 뿐이다. 탄생 때부터 상당한 주목을 받았던 그의 성장과정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 점을 어떻게 봐야 할까. 중간 기록이 거의 없는 까닭은 하느님의 독생자라는 특별한 신원을 보호하기 위한 '신비화'로도 읽을 수 있지만, 당시에 그가 지속적으로 언급될 만큼 관심을 끌지 않았다는 얘기도 될 수 있다. 그는 적어도 이적을 행하지도 않았고 사람들을 향해 강력한 메시지를 내놓지도 않았다.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이후, 공생활(公生活)이라 불리는 특별한 삶을 사는 예수를 만나게 된다.
'아버지'를 만난 이는 떠들썩할 이유가 없다. 신의 뜻대로 가만히 실천에 임하는 일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서른 살 이후에 그는 세간의 관심과 권력의 감시망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기록을 따른다면, 그는 하느님의 생명과 교신하는 능력은 이미 타고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류영모는 성령을 언제 만났는가
류영모는 성령을 받아 짐승 노릇을 면했던 때를 20세 때였다고 말한다. 육체가 태어나면서부터 성령이 내재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신앙과 생각과 수신을 통해 하느님과 직접 대면하는 길에 접어들었다고 고백한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이미 정신세계에서 하느님과 연락이 끊어진 지 오래다. 사람들이 이승의 짐승이 되었다. 우리가 산다고 하는 몸뚱이는 혈육의 짐승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몸나에서 얼나로 솟날 때 비로소 사람이 회복된다. 우리가 하느님께 아뢸 말은 짐승 노릇을 내버리겠사오니 하느님 생각을 이루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이 사람도 20세 전의 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짐승 노릇 했다는 것을 절감하곤 한다."
류영모는 스무살 무렵이 삶의 획기적 전환점이 되었다고 고백한 것이다. 그때가 언제였을까. 20세 때인 1910년은 이승훈의 초청으로 평안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한 때다. 오산학교에서 2년간 근무를 했다. 부임한 첫날 교실에 들어간 류영모는 학생들에게 함께 기도하기를 권한다. 학생들은 교사의 낯선 제안에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망설였고 류영모 혼자서 기도를 한다.
이후 일주일 만에 학생들은 기도를 하기 시작했고, 이 장면은 오산학교 설립자 이승훈에게 영감을 줬다. 이승훈은 기독교 신도가 되었고, 오산학교는 개교 3년 만에 기독교 학교로 거듭난다. 감옥에 간 이승훈이 평양신학교장이자 선교사인 로버트에게 오산학교 교장을 맡긴다. 로버트는 학생들에게 교리문답을 하게 하고 신앙고백을 하도록 강권했다. 이때 류영모는 가만히 교사직을 사직하고 학교를 나온다. 당시 그는 정통기독교가 교리에 얽매여 본질을 놓쳐 오히려 성령과 멀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통교회 신자로 오산학교에 들어왔던 류영모는 '비정통'이 되어 정통교회의 교리 강요를 거부하고 물러난 것이다.
류영모가 말하는 짐승 노릇의 마지막 상황은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동생 류영묵의 죽음으로 신앙의 허기진 내면을 돌이키게 된다. 살려고 태어난 인간이 왜 이토록 허무하게 죽어야 하는가. 기독교가 근원적으로 풀지 못한 문제들에 대해 파고들기 시작했다.
톨스토이가 심령을 새롭게 했다
류영모가 오산학교 교사였던 1910년은 이광수, 여준, 신채호 등 당대의 지식인들을 만나는 기회였고 그들이 지닌 사상과 서적들을 풍성하게 접한 계기가 됐다. 그 무렵 읽고 또 읽었던 책 중에 톨스토이의 저서가 있었다. 그해 11월 톨스토이의 죽음은 오산학교를 비롯한 당시 교육계와 교회에 '혁신적 기독교사상'을 되새기는 열풍을 만들어냈다. 톨스토이의 사상은 청년 류영모의 기독교 신앙을 근본부터 뒤바꾸는 위력을 발휘했다. 그가 짐승 노릇을 그만두었다고 말할 만큼, 20대는 그의 생각의 지평을 바꿔놓았다. 짧은 도쿄 유학(22세) 생활을 경험했고 결혼(25세)을 치렀으며, 그리고 삶의 날수 계산을 시작(28세)했던 그 시기다.
정신세계에 대해 눈을 뜬 20대는 류영모에겐 '영적 부활'을 체험한 때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얼나(성령)'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과 그 길에 완전히 들어섰다는 것은 다른 문제인 듯하다. 그는 직업을 가지기도 했고 결혼도 했으며 신앙과는 다른 일도 하면서 세속의 길을 피하지 않으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갔다. 그런 삶 속에서 신앙을 깊이 내재화하고 성령과 직면하는 일을 투철히 밀고 나가는 방식을 택했던 것 같다. 도연명이 취한 방식과 같은, 일종의 '세속은둔자'와 비견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의 내면 속에서는 신앙의 본질을 가차없이 심문하는 '생각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서구에서 체계와 관행을 굳혀온 뿌리 깊은 기독교에 '톨스토이와 같은' 의문을 품고, 단도직입(單刀直入)으로 성령과 만나는 길로 생각을 바꾸고 있었다.
그의 30대는 가르침의 시대였다. '비정통 기독교' 신앙과 사상의 큰 줄기를 정립한 뒤 그것을 후학에 전수하던 때였다. 1921년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해 학생들에게 '수신(修身)'을 가르쳤고, 제자 함석헌을 만났다. 그에게 본격 사도(師道)의 삶이 펼쳐진 것은 1928년 YMCA 연경반 강의를 시작하면서부터일 것이다. 35년간 줄기차게 진행된 성경 수업에서 사상은 이론적·실천적 깊이를 더해갔을 것이다. '얼나(성령)'를 모든 지혜의 기틀로 삼은 그는 자율신앙처럼 자율교육을 행했다. 비록 스승이었지만 제자에게 사상을 강요하지 않았다. 스스로 '수신(修身)'의 실천적 면모를 보여줄 뿐이었다.
농민과 노동자는 예수입니다
류영모가 1928년 YMCA 연경반 교재로 쓴 작은 수첩에는 톨스토이 생활10계가 적혀 있다.
1. 밤이나 낮이나 신선한 대기 속에 살 것
2. 날마다 방 밖에서 운동할 것
3. 음식을 절제할 것
4. 냉수욕을 할 것
5. 넓고 가벼운 옷을 입을 것
6. 청결에 힘쓸 것
7. 규율에 맞춰 일할 것
8. 밤에는 반드시 푹 잘 것
9. 이웃에 착한 마음을 쓸 것
10. 볕이 잘 드는 넓은 집에 살 것
톨스토이가 원했던 생활을 적어놓은 것이지만, 류영모의 '워너비'이기도 했을 것이다. 삶의 무욕과 부지런함, 타인에 대한 관용의 미덕을 강조하는 가운데, 건강한 농촌생활을 꿈꾸는 세목들이 많이 들어 있다. 몸은 비록 서울 종로에 있지만, 그는 톨스토이의 귀농주의를 늘 간직하고 있었다. 저 10계에는 은자(隱者)의 꿈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자기에게는 엄격하고 삶의 건강성을 유지하며, 타인에게는 관대한 청정생활. 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검은 수염을 기른 그의 모습은 농부의 행색에 이미 가까웠다. 그는 농부를 예수라고 하기도 했다.
"농민들은 그리고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짐을 지는 예수들입니다. 그들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로 인함이요, 그들이 상함은 우리의 죄악으로 인함이라고 이사야 53장5절에 나와 있습니다. 사람들의 고통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왜 고생을 합니까. 우리 대신 고생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은 농촌에 있었으나 현실은 여의치 않았다.
연경반 강의를 시작하던 그해(1928년) 아버지(류명근)는 솜공장(경성제면소)을 차려준다. 김교신은 이런 말을 했다. "서울 장안 종로 시장바닥에서 자란 사람이라서 그런지 돈벌이 재주만은 유달리 풍부하다. 조금만 재주 부리면 돈벌이 할 구멍이 보이지만 감히 못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시며 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믿되 이처럼 믿고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성서조선)
성서조선 동인인 송두용의 제자 이진구가 1960년대 초에 미터법이 시행되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미터 환산기를 만들어 특허를 냈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견본제품을 들고 류영모에게 보이며 자문을 구했다. 미터 환산기를 이러저리 보더니 류영모 왈 "장사를 하려거든 생활필수품 쪽으로 하는 게 좋을 거 같소"한다. 이진구는 이미 일이 많이 진행된 처지라 중단할 수 없어서 그냥 시행하였다가 큰 손해를 봤다. 이진구는 "선생님은 철학자인지라 세상 물정을 모르시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그 일로 똑똑히 알았다"고 말했다.
경성제면소 7년간의 경영자 류영모
어느 날 류영모의 솜공장에 불이 났다. 솜 타는 기술자 박여상이 실수로 불을 냈는데, 류영모는 아무 말도 없었다. 제자들이 얼마나 놀랐느냐고 묻자 "장사하여 이익이 생기면 이익이 생겼다고 자랑을 합니까. 불이 난 일도 마찬가지지요."
사업과 재물에 대한 그의 말.
"사람들은 돈을 모으면 자유가 있는 줄 알지만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영업이나 경영이 자기 몸뚱이만을 위한 일이면 서로의 평등을 좀먹지요. 경영을 하게 되면 이익을 추구하게 되고 평생 동안 모으려고만 하게 됩니다. 자유나 평등이 있을 리 없지요. 돈에 매여 사는 몸이 무슨 자유이겠어요?"
그는 7년간 솜공장을 경영했다. 북한산 비봉 아래 농사를 지으러 떠날 때까지 말이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난 부자가 되고 싶지 않아요. 뭐든 더 바라지 않는 맘의 부자가 되고 싶어요. 몸이 성하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맘을 비워놓아야 하느님의 성령을 담을 수 있습니다."
류영모는 40대 때 3명의 어른을 차례로 영별한다. 1930년 5월 9일 이승훈이 눈을 감았다. 오산학교를 세우고 그 학교를 기독교 학교로 만들었던 사람, 3·1운동을 사실상 총괄 기획했던 사람, 류영모의 뛰어남을 알고 교육사업에 이끌었으며 여준·신채호·윤기섭을 만나게 해서 영혼의 개안을 하게 한 사람. 스무살에 만났던 그를 마흔에 보냈다.
40대, 이승훈·류명근·김정식의 죽음 앞에서
1933년 11월 2일 부친 류명근이 돌아갔다. 정주 오산학교의 이승훈 장례식에 다녀온 뒤 위암 판정을 받았다. 그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돌아간 날을 추념하여 5일간 금식을 했다. 돈을 옳게 버는 실천의 삶을 보여준 부친에게 류영모는 '미쁨(믿음)'이란 시조를 바친다.
옳은 거면 그리하마 외인 일엔 아니 된다.
해달 견줘 뚜렷하고 땅에 견줘 무거움이.
한 마디 그 한 말슴에 기초인가 하노라.
미뻐서 좇은 장사 장사 속에 닦은 미쁨
한때의 돈 꿈 아니오 예순 해 장사시리라
늙도록 한결 같으심 미쁨인가 하노라.
- 류영모 시조 '미쁨'
1937년 1월 13일 김정식이 세상을 떠났다. 한국YMCA의 역사이며, 류영모에게는 신앙의 은사였던 사람이다. 김정식은 일본의 우치무라와도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다. 1937년 성서조선 5월호에 류영모의 김정식 추모글이 실렸다.
"기독교도의 생애란 십자가에 기대어서 덕을 보는 것이냐, 그 작은 부분이나마 짊어지는 것이냐로 구분할 수 있다. 김정식 선생의 생애는 짊어지는 편이었다. 선생은 여전히 괴로운 속에 종종 참척(자식이 먼저 죽음)을 당하고, 배고프고, 추우며, 벗들은 소원하고, 인생은 의문되고, 세상의 불평을 온 가슴에 부둥켜 안으셨던가. 만년에 노자, 장자를 탐독하셨고 사문을 심방하셨으니 오히려 인생의 의문이 계셨음이다. 세고참변(世苦慘變)에 못 살겠다는 사람에게는 선생 말씀이 '날 보라, 나도 살지 않는가'라고 하셨다."
한 세대의 죽음을 차례로 겪으며, 류영모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두루 보면서 40대를 보냈다. 그는 죽음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죽지 않는다고 야단을 쳐도 안 됩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해도 안 됩니다. 몸이 죽는 것은 확실히 인정하고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신앙입니다. 죽으면 얼이 하늘로 간다고 믿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갑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