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34)] 없이 계신 하느님, 얼마나 시원한 말인가

2020-04-01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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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간 신의 부재를 느꼈다'는 마더 테레사... 류영모의 역설

[다석 류영모. [그림 = 박상덕]]



독생자와 부활에 대한 새로운 접근

1937년 류영모가 요한복음 3장 16절을 새롭게 밝히며 '독생자론'을 편 것은, 한국 종교사상사에서 의미심장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독생자(獨生子)는 독자(獨子, 외아들)와는 조금 다른 말로, 기독교 용어다. 헬라어 모노게네스(Monogenes)에서 온 이 말은 어원적 의미가 다소 모호하다. 뒤에 붙은 게네스(genes)가 '되다' '태어나다' '파생하다'의 다양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일무이한 존재', '유일무이하게 태어난 존재', '유일무인하게 파생한 존재'로 풀이되며 각각의 의미가 다르다. 유일무이한 것은, 그것이 세상에 하나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며, 유일무이하게 태어난 것은 외아들이라는 의미를 담으며, 유일무이하게 파생한 것은 그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에게서 비롯된 존재라는 의미를 지닌다.  성경에는 독생자라는 말이 여섯 번 나오는데, 이삭에게 적용된 한 번을 빼고는 모두 예수를 가리킨다. 

독생자 예수는 대개 하느님의 '외아들(獨子)'이란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류영모는 독생자에 대한 풀이를 '유일무이하게 파생된 존재'에서 찾았다. 성령잉태와 동정녀 마리아의 논리적 고리를 수용하지 않은 것이다. 하느님이 인간 혈육인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아들'의 몸을 보낸 게 아니며, 인간으로 태어난 아들 속에 그의 생명인 성령을 불어넣어 보냈다는 것이다. 신이 인간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까닭은, 신의 생명인 성령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독자가 아니라 독생자가 되는 까닭은, 몸의 아버지가 아니라 영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성령으로 태어날 수 있는가. 모든 사람들이 예수와 똑같이 몸으로 태어나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상징적 사건'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십자가 기독교 신앙의 원천을 이룬 '부활'이란 기적이다. 예수의 부활은, 하느님이 그 마음 속에 성령을 넣어준 것처럼 모든 이의 마음 속에 그것을 넣어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것이 '기적'이 되는 까닭은, 오직 예수 한 사람에게 넣어준 성령이 그 부활로 인해, 믿는 자마다 모두 하느님을 아버지로 삼을 수 있도록 '성령 파생(派生)'을 가능케 했기 때문이다. 류영모는 이런 논리로, 모든 사람이 자신의 마음 속에 성령을 키워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육신은 영생도 부활도 불가능하며, 신의(神意)도 아니다

이 말은, 인간의 몸에 집중하는 신앙사상은 모두 상징적 개념을 구체적인 '육체'로 오해한 결과라는 얘기다. 류영모가 그토록 몸나와 얼나를 구분하며 강조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예수의 몸과 예수의 성령을 혼동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몸과 성령 또한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이 경건한 신앙행위에 힘입어 영생하거나 부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어처구니 없는 기론(奇論)일 뿐이다.

생물로서의 몸뚱이는 반드시 죽으며 썩어 없어지며, 그 자체가 하느님의 뜻이다. 몸뚱이는 태어나 성장하고 늙어 그 수명을 다한다. 그 수명을 늘리거나 죽음 자체를 변경하는 행위를 하느님이 왜 하겠는가. 그것을 보상으로 삼는다면, 200년을 사는 거북이나 400년을 사는 조개는 그 보상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신앙이 '죽음' 자체를 변경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 기생(寄生)하려는 것이라면, 그건 하느님의 성령을 오독하고 모독하는 것일 수 밖에 없다.

'육신을 지닌 예수'라는 점은 하느님의 독생자임을 전혀 말하고 있지 않으며, 오직 성령을 타고난 그 예수의 생각과 마음이 '독생자'의 필요충분 조건이다. 다석 류영모는 놀라울만큼 냉철하면서도 집요한 생각을 밀어붙여, 영육(靈肉)이 다른 곳에서 왔으며 또한 다른 곳으로 가는 것임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류영모의 '독생자론'의 핵심이다. 종교의 근간으로 치부되어온 믿음의 축을 완전히 새롭게 짜야할 만큼 강력하고 핍진한 사상적 재구성이다.

류영모가 '독생자론'을 펼친 자리는, 일본 신학사상가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들이 모인 자리였다. 류영모는 우치무라와 자신의 신앙관 차이를 잘 알고 있었다. 서로 건널 수 없을 만큼의 이견이 존재했지만 상대의 신념과 사상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배려를 해준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 제자들의 충격을 짐작하면서도 자신의 생각들을 밝힌 까닭은, 그들이 지금껏 우치무라에게서 배우거나 알아온 사상과 류영모의 사상의 차이를 짚어 면밀히 살펴보고 바른 길을 걸어가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우치무라와 류영모는 어떻게 달랐을까. 우치무라가 스스로의 신앙의 기본이라고 말한 네 가지 사실을 중심으로 한번 들여다 보자. 

 

[우치무라 간조]



류영모와 우치무라의 근본적 차이 4가지

첫째 우치무라는 기독교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종교'라고 규정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부활했다는 것을 믿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약속의 상징이다. 우치무라는 이런 점에서 기독교가 협소해 보이지만, 협소해보이는 까닭이 '명백'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류영모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일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부활했다는 사실과 그것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은 예수가 전하려는 하느님의 뜻을 놓친 채 기적과 이적에 의존해 구원을 약속하고 있는 '부적절한 보증수표'라고 판단했다. 육신의 부활을 믿는 것은, 육신을 믿는 것이며, 그것은 성령으로 온 하느님을 제대로 믿지 않는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둘째, 우치무라는 신앙에 '상식'이라는 관점을 부여하며, 상식적인 신앙은 하느님이 모든 이에게 부여한 지식과 옳고그름의 감각이라고 말한다. 십자가의 은혜로 그를 인도한 하느님은, 아주 평범한 수단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 평범한 수단은 양심을 만족시키는가 아닌가의 문제이다. 예수의 부활은 양심을 만족시킨다는 점에서 십자가 기독교는 이성의 신앙이며 윤리의 종점이라고 말한다. 부활했다는 사실이 진실인가 아닌가에 대한 대답은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양심이라 표현한 것은, '이성(理性)'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풀어낸 것이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점은 인간의 상식에 어긋나며 이성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예수가 인간의 박해로 인한 죽음을 맞은 뒤 다시 부활하는 것은 인간의 양심을 만족시키며 이것이 바로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기독교가 윤리적이고 양심적인 까닭을 여기에서 찾는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점과 그래서 그것이 진실이라는 점을 연결하기 위해 신앙이 접고 들어가야 하는 '이성의 당혹감이나 불편함'같은 것을 우치무라가 의식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부활 논리는 예수의 죽음이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한 것일 뿐이며, 인간이 신의 독생자를 결코 죽일 수 없다는 신의 진실을 드러낸다는 점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예수 육신의 죽음은 신과 상관이 없으며, 성령은 죽음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상징적으로 부활하는 것은 성령이라고 다석은 강조한다. 

셋째 우치무라는 기독교의 이원론에 대해 나름의 해석을 붙이고 있다. 하느님과 인간,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 기독교는 이 양자 사이의 관계를 설명해놓지 않았다. 육체를 영혼의 유출이라고 간주하지 않고 영혼을 육체의 본질이라고 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양자가 어떻게 결합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영혼과 육체는 어떻게 통합되는가. 이 불가지(不可知)를 못견디는 이들이 영혼과 육체의 일원론을 주장하여 수미일관하게 설명하고자 한다고 본다. 그러나 자신은 영혼은 선이고 육체는 악이라는 입장을 취하기 보다, 삶의 끝에서 그 설명이 얻어질 것이라는 바울의 주장을 들며 영육의 통합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고 있다.

육신과 성령은 서로의 궤도가 다르다

이에 대해 류영모는 영혼과 육체를 철저히 분리하는 쪽이다. 하느님의 영혼, 즉 성령이 인간에게 임한다고 보고 육체는 다만 성령이 깃드는 둥지이자 껍질일 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육신은 영원할 수도 없고 신의 시선에서 그 가치나 수명의 길이가 중요하지도 않다고 말한다. 육신과 성령은 각각 궤도가 다르다. 육신은 다른 모든 생명체처럼 생멸의 과정을 겪는 한시적인 존재이며, 성령은 하느님에게서 나와서 하느님에게로 귀의하는 영원불멸의 하느님 그 자체라는 것이다. 따라서 '육신의 죽음'은 성령이 그를 낳은 하느님과 대면하고 귀의함으로써 완전한 통합을 이루는 장면이라고 믿는다.

넷째 많은 이들의 신앙동기가 개인적 불행이나 괴로움을 떨치기 위한 것이다. 또 새로운 사상을 얻기 위해서 혹은  세상을 개선하기 위해서도 종교를 찾는다. 하지만 기독교의 핵심은 '죄의 관념'일 뿐이라고 우치무라는 말한다. 예수를 통해 인간의 죄를 하느님이 대신 갚아준 일. 모든 위대한 기독교인은 이것을 믿음으로써 신앙에 들어갔으며 그래서 기독교를 윤리적 종교라고 부른다고 말한다. 대속신앙이 바로 기독교 윤리의 핵심이며, 그 죄악에서 자기를 구원해줄 이를 찾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말한다.

우치무라가 견지한 신앙은, 그가 비록 서구에서 정립해놓은 계급적 교회 시스템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긴 했지만,  인간원죄와 대속신앙, 그리고 부활로 이어지는 바울신앙의 고리를 보여준다. 류영모는 대속신앙과 부활에 대한 바울의 기록들이 미약했던 기독교의 교세를 일으키기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부활의 이적을 강조했고, 이종교 핍박에 의한 예수 육신의 죽음을 '인류의 원죄를 갚은 거대한 죽음'으로 확장해 놓았다고 본 것 같다.

그는 우치무라의 인식의 한계를 발견했다. 여전히 '육신의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류영모는, 예수의 죽음에 대해 간명한 시선을 유지하는 듯 하다. '성령'을 육신 속에 품고 세상에 온 존재가 하느님의 뜻을 전한 뒤 성령으로 돌아간 사건 이외에 어떤 가필도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굳이 이해하기 어려운 '윤리적 맥락'까지 거론하며, 십자가 신앙의 당위를 설명하는 우치무라가 비록 무교회 신앙을 외칠지라도, 우치무라는 결국 바울의 기독교 안에서 맴도는 소극적 '개선'의 신앙이었을 뿐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그래서 류영모는 우치무라에서 일정한 영감은 얻었으나, 그 원천적 차이의 분기점에서 사상적 결별을 한 것이다. 

류영모의 사상에는 모호한 것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단순하면서도 일관성 있게 기독교의 본질을 품는다. 굳이 수식할 것도 과장할 것도 없이 '신을 직접 만나라'는 메시지 하나로 관통한다. 육신은 가짜이고 오로지 성령이 진짜라는 말. 믿음이란 나날의 의심과 회의의 도전 속에서 그 영적인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다. 마더 테레사(1910~1997)가 눈을 감은 뒤에 공개된 편지는, '신앙의 내면'이 지닌 허기진 역설을 보여주는지 모른다.

 

[2010년 8월23일 테레사 수녀 탄생 100주년. 인도 캘커타의 한 성당에 걸린 테레사 수녀 사진.(AP=연합뉴스)]




마더 테레사 "50년간 나는 신을 의심했다"

2007년 그러니까 그가 돌아간지 10년이 지난 뒤, 책이 하나 출간됐다. '마더 테레사, 내게 빛이 되어주소서'라는 책은 인류에게 충격을 안겼다. 테레사 수녀가 생전에 가까웠던 마이클 반 데어 피트 신부와 주고받은 편지들이 실린 이 책은 인도에서의 봉사활동을 시작한 1948년부터 눈을 감은 1997년까지 '신의 부재'를 느끼고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예수님은 당신을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 커서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당신이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1979.9. 피트신부에게 쓴 편지)

1979년은 그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해이다. 저 편지를 쓰고난 뒤 석달 뒤의 일이다. 그때 그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예수님은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만나는 가난한 사람들 안에도 있고, 우리가 주고받는 웃음 안에도 있다"고 말했다. 봉사를 위해 인도로 들어가던 1948년 하반기의 글에서는 "내가 얼마나 이 고통을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 세기 세상이 우러른 완전한 성자로 살았으며,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난한 자를 섬기며 사는 봉사로 생을 일관했던 마더 테레사가 그의 내면을 진솔하게 드러낸 이 글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당시에 겪고 있던 외로움과 고통과 어둠을 지옥으로 비유하고, 이 상황들이 천국을 의심하게 할 뿐 아니라 신의 존재까지도 믿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고백을, 외양과 다른 이중적인 내면으로 읽어야 할 것인가. 그는 스스로의 미소를 '모든 것을 감추는 가면이거나 외투'라고 말하기도 했다.

신을 믿지 않은 게 아니라 존재론적인 고백을 한 것

카톨릭계에서는 이런 고백이 그가 보여준 삶의 진정성을 훼손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2003년 로마 교황청은 그를 '시복(諡福 , beatification, 교회가 공경할 복자로 선포하는 일)'의 대상자로 선언했다. 시복은 뛰어난 신앙을 가졌거나 순교를 한 사람에게 주어지며 성인 칭호의 바로 전단계다.

이해인 수녀는 마더 테레사의 편지와 관련해 "나 또한 40여년 수도생활을 하고 있지만 정말 그분이 계실까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고 고백했다.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위기상황을 겪는다"고 말한 이해인 수녀는 "테레사의 편지는 신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고백을 한 것이 아닐까 한다"고 피력했다. "신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면 테레사가 평생 그렇게 살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의견을 피력했다. 이해인 수녀는 1994년 테레사 수녀를 만났을 때 신앙, 수도생활, 봉사에 관해 불안이나 회의 혹은 시련 같은 것을 느낀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고 한다. 테레사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했다. "하느님이 계신데 내가 왜 걱정하는가, 모든 것은 그분이 다 해결해준다"고 말했다고 한다.

신앙의 깊은 공허나 회의가 어디에서 오는가. 신에 대한 근원적인 오해에서 온다. 류영모는 '신의 부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신은 실제로 부재하기 때문이다. 신은 그 자체가 육신이 아닐 뿐 아니라 인간 육신과 교류하는 존재가 아니다. 상대적인 이 세계에 존재한다면 이미 신이 아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았기에 생겨나는 의심이라는 것이다. 신은 육신의 인간과 교류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 속에 깃든 하느님 그 자체인 성령과 교류하는 것일 뿐이다. 신은 '없이 계신다'는 게 다석 류영모의 명제다. 부재한다는 것은 육신이 존재하는 상대적인 세계의 인식이며, 없이 계신다는 것은 영성이 영성을 인식하는 방식이다. 그것을 인식하게 되면 더없이 시원하다고 류영모는 말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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