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제로 영광 되찾은 '이탈리안 리비에라'의 보석 산레모

2020-03-2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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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 '지중해 오디세이' 16

 
 
 
    

[산레모] 

 

 



[지중해 오디세이 16. 이탈리아 산레모]
‘이탈리안 리비에라’의 보석 같은 도시
유럽 왕실과 귀족, 대부호들이 찾던 최고급 휴양지
양차 대전으로 스러지던 영광을 가요제로 되찾아


오늘은 책은 덮고 노래를 부르거나 들으며 지중해로 갑시다. ‘이탈리안 리비에라’의 보석 같은 도시 산레모(San Remo)로 갑시다. 1960~1970년대 숱한 한국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던 ‘산레모 가요제’의 현장도 둘러보고, 이 도시를 유달리 좋아해 전용 증기선으로 지중해를 항해하다가 이곳을 찾아 자주 머물렀던 오스트리아 황후 ‘시시(Sissi)’의 흔적도 찾아봅시다. 동화 속 주인공에게나 일어날 우연의 작용으로 오스트리아 황실에 시집와 스위스 제네바 호숫가에서 한 무정부주의자의 어처구니없는 공격으로 심장을 찔려 비명에 갈 때까지 행복보다는 불행에 가까운 삶을 살았던 비운의 황후가 시시였습니다.

산레모는 ‘이탈리안 리비에라’의 서쪽 끝에 있습니다. ‘리비에라(Riviera)’는 이탈리아 말로 ‘해변’이지만, 지중해에서 리비에라는 이탈리아 서쪽 끝 라스페치아에서 국제 영화제로 우리에게 익숙해진 프랑스 칸까지의 해안을 말합니다. 온화하고 경관이 좋아 고급 휴양 시설이 가득한 리비에라 중 이탈리아 영토는 ‘이탈리안 리비에라(길이 320㎞)’, 프랑스 영토는 ‘프렌치 리비에라’(880㎞)로 구분한다는군요.

인구 55,000명, 면적 54.7㎢로 서울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산레모는 역사가 로마 시대까지 올라가지만 본격적으로 외부의 주목을 받은 것은 19세기 중반부터입니다. 관광 목적의 여행이 시작되고, 막대한 부를 누렸던 유럽 왕족들이 따뜻한 겨울을 나려고 이곳을 찾으면서 급속한 발전이 시작됐습니다. 고급스러운 카지노도 귀족과 부자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산레모를 지나면 곧바로 니스와 칸, 모나코가 나옵니다.

시시는 독일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공작 집안의 둘째 딸 엘리자베스의 애칭입니다. 1837년에 태어나 1898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시는 원래 황후 후보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1830~1916)는 어머니 조피 대공비의 권유로 시시의 두 살 위 언니 헬레나를 아내로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1853년 황제와 헬레나가 오스트리아의 한 궁전에서 처음 만나 정혼(定婚)을 하려는 날, 열여섯 살인 시시도 언니를 따라왔습니다. 먼저 와 있어야 할 짐마차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도착하지 않아 자매는 드레스로 갈아입지 못한 채 친척 상을 맞아 입고 있던 상복 차림으로 황제를 만났습니다. 알현 장소에 들어선 황제에게 조피 대공비는 헬레나를 소개했으나 황제의 눈길은 시시에게 붙어 있었습니다. 둘 다 유럽 최고라고 할 정도로 빼어난 미모였지만 시시의 피부가 더 하얘서 검은 상복이 언니보다 더 잘 어울렸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황제는 어머니의 선택을 거부하고 일곱 살 어린 시시와 결혼합니다.

궁정의 실권자였던 조피 대공비는 시시를 싫어했습니다. 시시의 생각과 행동이 자유로웠기 때문입니다. 시시의 부모는 딸들을 엄하게 키우기보다는 본인들이 원하는 걸 하도록 했습니다. 시시가 귀족의 예법을 배워야 할 시간에 말을 타고 시골을 돌아다녀도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런 행동은 결혼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황실의 의전과 관례를 따르지도, 배우려고도 하지 않은 시시를 조피 대공비는 공공연히 “어리고 멍청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실상 궁정의 안주인인 대공비가 시시를 싫어하니 오스트리아의 귀족과 궁전의 시녀들도 그를 우습게 봤습니다. 시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발작적 기침과 공황장애 같은 증상을 보입니다.

결혼 꼭 열 달 뒤 시시는 첫 아이를 낳습니다. 공주였지요. 시어머니는 시시가 어리고 약하다는 이유로 자기가 키우기로 합니다. 공주 이름도 자기 이름을 따 조피라고 지었습니다. 시시는 젖 한 번 먹여보지 못하고 아이를 넘겨줬지요. 이듬해 둘째 공주를 낳았으나 이번에도 시어머니가 데려갑니다. 시어머니는 공주 둘을 데려갔을 뿐 아니라 왕자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시시를 압박합니다. “왕자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황실에 위험을 가져오는 외국인일 뿐”이라는 쪽지가 시시 주변에서 나돌기도 했습니다.

시시가 맞이한 첫 번째 비극은 첫째 공주 조피가 두 살 때 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떠난 겁니다. 이때부터 시시의 거식증이 시작됩니다. 172㎝에 50㎏, 어릴 때부터 가꿔온 몸이 더 가냘파집니다. 20인치였던 허리가 14인치까지 줄어들기도 했습니다. 궁정생활에는 흥미가 더 없어집니다. 혼자서 외국어를 공부하고, 유명 작가와 시인들의 작품에 깊이 빠지고, 답답하면 어릴 때부터 익숙한 말 타기에 나서 시골을 돌아다닙니다.

그러다가 왕자 루돌프를 출산합니다. 궁정에서도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을 위해 남편과 함께 헝가리를 방문했다가 환대를 받고는 왕자 하나를 더 낳겠다고 마음먹습니다. 루돌프는 오스트리아 황제를 시키고, 둘째는 헝가리 황제를 시키려는 생각이었습니다. 노력이 헛되지 않아 네 번째 아이를 갖게는 됐지만 왕자가 아니라 공주였습니다. 그 사이 시어머니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이 한 여배우를 가까이 하게 된 게 새로운 시련이었습니다. 일설에는 시시가 성병을 앓았다고도 하는데, 행실이 별로 깔끔하지 않았던 이 여배우가 황제에게 옮겨준 게 시시에게까지 건너간 거라고도 합니다.

시시는 여행으로 이 모든 걸 잊으려고 합니다. 황제도 시시가 궁정을 비우는 걸 좋아해 시시는 아무런 방해 없이 유럽 곳곳을 돌아다녔습니다. 내륙은 기차로, 바다는 전용 증기선으로 다녔습니다. 특히 지중해 바닷가를 좋아해 프렌치 리비에라의 숨은 명승지인 카프 마르탱(Cape Martin)에는 별장을 두고, 약 40㎞ 떨어진 산레모를 자주 찾았습니다. 이 부근은 이미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에드워드 7세, 러시아의 알렉산더 2세 황제 같은 유럽 강대국 왕족들이 따뜻한 겨울을 보내려 찾아오는 곳으로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유럽 최고의 부자였던 로트쉴트 가문도 이곳에 별장을 뒀습니다.

시시는 다른 왕족이나 부자들과는 어울리지 않고 언제나 한두 명의 시녀와 함께 돌아다녔습니다. 왕가의 사교는 피하고 걷거나 말을 타고 자연을 즐겼습니다. 리비에라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그리스의 아름다운 섬인 코르푸로 건너가기도 했고, 유럽 왕족의 관심 밖이던 모로코 알제리 몰타 터키 이집트도 다녔습니다.

여행으로 안정을 찾아가던 시시에게 또 다른 불행이 찾아옵니다. 1889년에 황태자인 루돌프가 부인 몰래 만나던 정부를 죽이고 자살했습니다. 루돌프도 내성적인 성격이라 억지로 사교를 해야 하는 궁정생활을 견디지 못해 바람을 피운 건데 불행으로 끝난 거지요.

시시의 여행벽은 더 심해졌습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더 은밀하게, 더 조용히 다녔다는 겁니다. 마지막 여행지는 스위스 제네바였습니다. 1898년 9월 10일 오후 1시쯤이었지요. 평소처럼 가명으로 머물던 제네바의 호텔에서 나와 배편으로 제네바 호수를 건너, 요즘에는 재즈 페스티벌로 유명한, 몽트레로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이날도 시녀 한 명만이 수행했습니다. 아들을 잃고 나서는 발목까지 덮는 검정색 긴 코트만 입어온 시시가 흰 양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증기선으로 걸어가는데, 뒤따라오던 25세의 무정부주의자가 양산을 밀치고는 가늘고 뾰족한 송곳으로 시시의 가슴을 찌릅니다.

세상의 모든 귀족을 증오한 그가 노린 원래 목표는 다른 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귀족이 이날 아침 일찍 제네바를 떠난 걸 알고 낙심하다가 “오스트리아 황후 시시가 〇〇 백작부인이라는 가명으로 △△호텔에 머물고 있다”는 기사를 읽습니다. 호텔 부근을 어슬렁거리던 암살범은 시시가 나타나자 직접 만든 송곳으로 가슴을 딱 한 번, 깊숙이 찔러버린 겁니다. 시시는 습격을 받고 쓰러졌다가 시녀의 부축을 받고 일어나 배까지 90m를 걸어갔으나 갑판에서 숨졌습니다. 왼쪽 가슴에는 딱 그 송곳 구멍만한 작은 핏자국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시시를 좋아해 빈에 있는 시시박물관은 명소가 됐으며, 1955년에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전 세계에 미모를 자랑했던 여배우 로미 슈나이더(1938~1962)가 시시를 연기한 영화도 나왔습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2세의 황후인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1824~1880)도 산레모를 유명하게 한 왕족입니다. 시시처럼 독일 출신인 알렉산드로브나 역시 열일곱 살에 러시아 황실로 시집와서 8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맏아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병에 걸려 산레모에서 요양을 합니다. 산레모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해변을 산책하다가 건강을 회복한 황후는 자기가 매일 걷던 산책로에 심도록 종려나무 여러 그루를 기증합니다. 산레모에 나름의 감사를 표한 거지요. 산레모 시당국은 이 길에 그 나무를 심어 ‘황후의 길’이라고 이름 붙여 답례를 합니다.

다이너마이트로 번 돈으로 노벨상을 만든 알프레드 노벨도 산레모를 사랑한 사람입니다. 스웨덴 사람인 노벨은 파리에 오래 머물며 당시의 진보적 인사였던 빅토르 위고 등과 어울리며 화학 연구를 하다가 프랑스 정부와 마찰이 생기는 바람에 1891년 산레모로 이사와 5년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가 머물던 별장(노벨 빌라)은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매년 12월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노벨상 시상식과 연회장은 산레모에서 키운 수만 송이의 꽃으로 꾸며집니다. 산레모 시당국이 노벨과의 인연을 기리기 위해 보낸 꽃입니다. 그러고 보니 산레모 일대는 꽃밭이 많아 ‘꽃의 해변(Riviera dei Flori)’이라고 불린다는 걸 미처 이야기하지 못했군요. 노벨 빌라 부근에는 언제나 꽃향기가 은은하다는데, 평생 화약 냄새를 맡았을 노벨이 이 빌라를 좋아했던 이유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산레모 가요제는 올해가 70회였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5년이 지나도록 관광업이 회복되지 않자 산레모의 똑똑한 지도층들이 매년 1월 말에서 2월 초에 사흘 동안 가요제를 열기로 한 게 산레모 가요제의 출발이었습니다. 1951년 막을 올린 가요제는 처음엔 라디오로 이탈리아에만 중계됐으나 1955년 TV중계가 시작되고 마지막 날 결선이 인접한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에까지 생방송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탈리아 노래를 이탈리아 가수들이 부르도록 한 규정도 얼마 후 외국인들이 자기네 말로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바뀌어 인기는 더 높아졌습니다.

1960년대에는 우리나라에도 산레모 가요제 입상곡이 수입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가수들이 원곡으로, 번안곡으로 그 노래들을 불렀습니다. 1970년대에는 소위 ‘청년문화’의 아이콘이었던 한 통기타 가수가 라디오에서 “죽기 전에 산레모 가요제에 출전하는 게 꿈”이라고 말 하던 게 기억납니다. 그도 늙고 우리도 늙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 노래들은 여전히 젊습니다. 지중해가 그런 것처럼.




 

[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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