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 1일 한진상사 창업으로 한진그룹의 태동을 시작한 조중훈 창업주는 ‘수송보국’ 정신을 바탕으로 나라의 동맥인 수송 사업을 펼쳤다. 수 많은 업종 중에서 수송·물류업을 택한 것은 국가에 헌신하겠다는 신념에서다. 조중훈 창업주는 눈 앞의 단기적 재무 실적에 치중하기 보다는 긴 호흡으로 산업을 발전시키고 경제의 대동맥으로서 기업의 사회적인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가치를 지켰다.
하지만 조중훈 창업주가 서른 살이 되던 해 발발한 한국전쟁은 한진상사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조중훈 창업주는 폐허 위에 가건물을 세우고 피난 때 몰고 갔던 트럭 한 대로 밤낮없이 회사 재건에 몰두했다.
1969년에는 만성 적자에 시달리던 국영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대한항공을 설립하며 본격적으로 항공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정상화 과정을 밟아가던 대한항공은 1973년 10월 발생한 중동전으로 위기에 빠지게 된다. 국제유가가 항공사의 존립을 위협할 만큼 치솟았기 때문이다. 당장 한 달 안에 대금을 결제하지 않으면 연료 공급이 중단될 지경이었고, 1973년에 새로 들여온 점보기를 담보로 내놔야 할 만큼 상황이 다급했다.
당장 5000만달러가 필요했던 조중훈 창업주는 프랑스 소시에테 제네랄 은행에 도움을 요청하고, 업무상 인연을 맺었던 로제 총재에게 지불 보증을 부탁했다.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로제 총재는 뜻밖에도 흔쾌히 승락했다.
조중훈 창업주의 발길은 바닷길까지 향했다. 1977년 5월 경영난을 겪고 있던 대진해운을 해체하고 컨테이너 전용 해운사인 한진해운을 설립했다. 1987년에는 만성적인 적자에 허덕이던 대한선주를 인수한 후 한진해운과 합병해 인수 2년만에 경영 정상화를 이뤄냈다. 한진해운이 정상궤도에 오르자 조중훈 창업주는 조선업으로 눈을 돌렸다. 법정관리 절차를 밟고 있던 조선공사 매각 입찰에 참가해서 인수한 후 1989년 5월 한진중공업을 출범시키는데 이르렀다.
◆인재양성을 통해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다 해야… 사재 털어가며 지원
조중훈 창업주는 기업이 사회 복지 증진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방법 중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은 바로 인재양성이라고 믿었다. 이런 취지에서 1968년 인하학원을 인수하고, 1979년에는 한국항공대학교를 인수했다.
또한 1988년부터 가정 형편상 대학 진학의 기회를 갖지 못한 직원들을 대상으로 국내 최초의 사내 산업대학인 한진산업대학(現 정석대학)을 개설해 직원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마련해 줬다. 조중훈 회장의 교육열은 현재까지도 한진그룹의 교육공헌 사업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조중훈 창업주는 생전에 모은 사재 가운데 1000억 여원을 공익재단과 그룹 계열사에 기부하는 한편, 그 중 500억 원은 수송ㆍ물류 연구발전과 육영사업기금으로 학교법인 인하학원과 정석학원, 재단법인 21세기한국연구 등 세 곳에 배분했다.
◆수송외길 걸어온 경영철학…"기업은 국민 경제와 조화"
조중훈 창업주는 평소 사업은 예술과 같다고 했다. 예술가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창조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기업가도 예술가의 신념과 노력으로 사업에 전념해야 한다는 의미다.
또한 조중훈 창업주는 기업은 반드시 ‘국민 경제와의 조화’라는 거시적 안목에서 운영해야 하고, 눈앞의 이익 보다는 국익을 위해 기업이 일정 부분의 손해도 부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부실덩어리였던 대한항공공사, 대한선주와 같은 공기업을 인수하게 된 것도 이와 같은 이유다.
조중훈 창업주는 항공사 경영을 통해 쌓은 광범위한 국제 인맥을 활용,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 등 우리나라의 경제 및 외교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기업이 사업으로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것 말고도 민간외교를 통해 국익에 일조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민간 외교관으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우리나라 정부로부터 수교훈장 광화장을 비롯한 수 차례의 훈장을 받았으며 프랑스, 벨기에, 몽골, 네덜란드, 독일 등 세계 각국으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