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 류영모] (23)몸뚱이를 바르게 써라, 그래야 애국도 할 수 있다

2020-02-24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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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23)이마에 땀 흘리고 살아라

[강연하는 다석 류영모.]




23세 류영모, 문득 유학을 포기한 까닭
1913년 류영모가 도쿄 유학 중에 학업의 뜻을 접고 귀국한 이유에 대해선 자세히 알기 어렵다. 다만, 그 이후의 행적으로 그 마음을 살필 뿐이다. 그는 세상의 성취보다 더 중요한 성취가 있으며, 그것에 생을 바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예수의 가르침이 당시 그의 선택을 압축하고 있는 말이 아닐까.

류영모의 생을 '제나(自我)'에서 '얼나(靈我)'로 나아간 거룩한 궤적이라고 말할 때, 23세 때의 대전환이 하나의 모멘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영적인 선구자인 톨스토이는 젊은 류영모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이마에 땀을 흘리며 농사를 지어서 제가 먹을 것은 제 손으로 먹거리를 만들어야 한다."(작가 로맹 롤랑이 '신앙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농사를 하여야 하는가'라고 편지로 물었을 때 톨스토이가 해준 대답이다.)

석가는 과연 농사를 지었던가. 그는 탁발(빌어먹는 일)을 했다. 농사를 지으며 수도하는 이들은 브라만이었다. 브라만들은 석가가 농사짓지 않고 탁발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탁발을 하는 석가를 본 브라만은 밭에서 일을 하고 있다가 문득 허리를 펴고 서서 이렇게 말했다. "석가 또한 저처럼 밭을 갈고 씨를 뿌려 그것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석가가 답했다.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려 그것을 먹고 살아가느니라." 브라만이 다시 묻는다. "석가에게는 보습(쟁기에 끼우는 큰 삽)도 멍에(쟁기 끄는 소의 목에 거는 막대)도 고삐도 채찍도 없습니다. 무엇으로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는 말씀인지요?"

이에 석가는 대답한다. "신심을 씨로 삼고 수행을 빗물로 삼으며 지혜를 보습 자루로 삼고 부끄러움을 멍에로 삼아 바른 생각으로 스스로를 지키면 그야말로 좋은 농부입니다. 몸과 입의 '업(業)'을 단속하고 음식종류를 알아 알맞게 먹고 진실을 참수레로 삼고 즐거이 머무르되 게으르지 않으면, 이 농부는 감로(甘露·생명의 이슬)의 열매를 얻지 않겠습니까."(잡아함경 '경전경(耕田經)'편)

석가나 예수는 출가한 뒤 생산하는 일은 하지 않았지만, 저 아함경이 말하고자 하는 뜻에 따른다면, 믿음 수행을 부지런히 하는 일 또한 큰 농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생산노동으로 자급자족하며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톨스토이의 신앙관은 젊은 류영모에게 종교가 투철한 일상적 실천임을 일깨우는 정신적 등대가 되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마태오 6:31~32)라는 구절을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류영모는 말했다. 사도 바울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했고, 당나라 때 백장대사(白丈大師·749~814)는 "하루 일하지 않았으면 하루 먹지 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고 했다.

톨스토이의 '신앙적 농경생활'을 꿈꾸다

"아버지,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고 살려고 합니다." 도쿄에서 학업을 중단하고 돌아온 아들이 이런 말을 꺼냈을 때 류명근은 적지않이 놀랐다. 서울에서 경성피혁을 경영하고 있던 류명근은 업계에서 신망을 쌓아가고 있던 상인이었다. 그는 말했다. "대학공부는 그만둘 마음을 먹었다 하니 말릴 수 없는 일이지만,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는 건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감농(監農·농업 관리)이라면 몰라도 너의 체력으로 무슨 농사를 한단 말인가. 나의 사업이나 돕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류영모의 '신앙생활의 꿈'은 현실적인 벽에 부딪혔다. 부친 말대로 경성피혁에서 일을 하게 됐다. 이 업체는 국내뿐 아니라 일본 및 중국과도 거래를 했다. 류영모는 상업거래를 위한 서신을 보내고 받는 일을 맡았다.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하고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 위해 절실한 생각을 미룬 것뿐이었다. 몸은 종로바닥에 있었으나, 마음은 시골의 논밭을 달리고 있었다. 2년 뒤 결혼 무렵에 신부에게 "농사 지으며 살 것"이라고 말했다가 혼담이 틀어질 뻔한 사건에서도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류영모는 23년 뒤에야 자신의 '실천적 신앙생활'을 행하게 된다. 그의 신념은 그의 속에서 줄기차게 전진하고 있었다.

류영모는 1905년 15세에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집안에선 뚜렷한 종교가 없었다. 관습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 정도로, 넓은 의미에서는 유교라 할 수 있으나 당시에 다들 그랬듯이 이것을 신앙으로 생각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류영모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을 때, 부모는 별로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1911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정주에서 오산학교 교사로 지내던 류영모가 방학을 맞아 서울에 오니, 두 분이 모두 교회에 나가고 있었다. 아버지 류명근은 연동교회에, 어머니 김완전은 승동교회에 다녔다. 부모가 모두 교회에 나가게 된 데에는 류영모의 영향도 있었지만, 아들 류영묵이 19세로 죽음을 맞았을 때 받은 충격을 이겨내기 위한 몸부림의 선택이기도 했을 것이다.

아이러니일까. 류영모는 동생의 죽음 이후 교회 기독교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의식이 생겨났다. 성서가 제시한 처음의 뜻을 찾아 교의신학(정통기독교)이 장식해놓은 종교방식을 넘고자 했다. 아들의 이런 결행을 교회신도가 된 부모는 이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연동교회 장로가 됐고, 어머니는 승동교회 집사가 되었지만, 아들은 부모에게 교의신학에 대해 이의를 달거나 불만을 제기한 적이 없었다.

신앙은 핏줄의 길 아닌, 각자의 길

신앙은 핏줄의 길이 아니라 각자의 길이다. 부모와 자식이라도, 종교사상의 추구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부모가 자식에게, 혹은 자식이 부모에게 자신의 신앙을 강제할 권리가 없다는 게 류영모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모태(母胎)신앙이란 말이 있다. 그럴 듯해 보이지만 이상한 말이다. 물론 어머니의 신앙에 공감해 따를 수는 있지만 그것을 태생적으로 타고날 수는 없다. 태교가 가르칠 수도 없다. 유전자는 짐승의 성질인 수성(獸性)은 이어지게 하지만, 영성(靈性)이 유전되는 일은 없다.

영성이 유전된다면 예수·석가는 전도하려고 애쓸 일이 아니라 수많은 자식을 낳았어야 한다. 영성을 지니고 난다면 천명을 낳아도 좋고 만명을 낳아도 좋을 것이다. 아니 영성을 지닌 사람만 일부다처로 자식을 낳게 해야 할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영성은 유전되는 일이 전혀 없다. 세기적인 무신론자인 니체나 김일성도 그들의 부모는 모두가 열성스런 크리스천이었다. 영성은 누구나 하느님으로부터 성령을 스스로 받아 깨달아야 한다.

류영모는 귀국 후 기독교 교의신학에 대한 회의를 깊이 품었고, 진실한 하느님에 대한 깊은 갈증을 느꼈던 것 같다. 집안에서는 혼담이 오가던 시절, 그는 어느 절에 들어가 불경을 읽고 있었다. 류영모가 (굳이 이름을 밝히려 하지 않았던) 한 스님에게 당판(唐版) 화엄경 80권에 대한 가르침을 구했다. 그 대화의 기억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스님과 류영모가 나눈 화엄경 토론

스님이 말했다.

"사람이 부처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부처는 이 세상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하였습니다. 부처는 이상(理想)국가의 임금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임금과는 전혀 다릅니다. 세상의 임금은 온 나라의 살림과 재산을 자기 개인의 사유물(私有物)로 여깁니다. 그러나 부처는 그러지 않습니다. 부처는 자기가 가진 것을 죄다 주어 버립니다. 나라도 궁궐도 내놓습니다. 부모도 처자도 내버립니다. 그뿐 아니라 눈을 빼 달라면 빼어 줍니다. 다리·팔·내장·뼈 ·골수도 죄다 줍니다."

류영모가 이 소리를 들었을 때 불쑥 스님에게 묻는다.

"그 옛날 인도 사람들은 골수 같은 것이 소용이 없었나 보지요?"
(류영모가 이렇게 반문한 까닭은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어서였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부처가 그렇게 말한 것은 다른 사람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고 무조건 받아들인다는 말을 힘있게 나타낸 말이지요. 예수가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그제서야 류영모는 말했다.

"석가와 예수의 생각은 대단히 같습니다. 이 상대세계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상대세계를 부정하지 않으면 예수·석가를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석가의 법신(法身)과 예수의 하느님 아들은 얼생명을 가리키는 같은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구저쩌구 하는 나(自我)는 참나가 아닙니다. 그런 나는 쓸데없습니다. "

제나(自我)는 거짓이지만, 그 또한 신의 뜻

깨달음이란 '제나(自我)가 거짓인 줄 알고 얼나(靈我)가 참나임을 아는 것'이다. 알았다고 해서 몸뚱이의 제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서 영육(靈肉)을 분리시켜 줄 때까지 짐승인 제나를 최소한의 예우로 길러야 한다.

류영모가 첫 번째 깨달음을 얻고도 3남 1녀를 낳고 52살 때까지 부부생활을 한 것을 탓할 수는 없다. 세상에 태어나 거짓인 제나를 예우하는 일 또한 하느님의 뜻 속에 있기 때문이다.

류영모는 말하였다. "성령을 받아 돈오(頓悟)를 하면 한꺼번에 다 될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돈오한 뒤에도 점수(漸修)를 해야 합니다. 돈오도 한 번만 하고 마는 게 아닙니다. 줄곧 깨달아 가야 합니다. "

끊임없이 순간순간 깨우쳐야 한다. 이 제나(自我)는 참나가 아니라 거짓나다. 얼나가 참나다. 이 세상은 참나라(眞國)가 아니라 거짓나라(僞國)다. 하느님 나라가 참나라다. 거기까지 나아가는 게 '얼나의 길'이다.


다석어록= "이마에 땀 흘리고 살아야 한다. 일 안 하고 살겠다는 것보다 더 나쁜 게 없다. 그러면 노예밖에 안 된다. 일이, 나 살 것을 돕는다. 자기가 들어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정하게 되면 그것을 복거(卜居)라고 한다. 도심(道心)이 이롭다는 것을 알고 땀 흘리며 일하는 생활을 규정지어주는 것이 복거이니, 이보다 더한 호강이 어디 있겠는가. 권력과 금력으로 호강하겠다는 것은 제가 땀 흘릴 것을 남에게 대신 흘리게 해서 호강하자는 것이니, 그 죄악이 여간한 게 아니다. 우리의 삶은 영원한 꼭대기에 이어진 것으로, 생각을 잘해야 한다. 생각을 잘하면, 스스로 몸뚱이를 바로 잘 쓰겠다는 정신이 안 나올 수 없다. 몸뚱이를 바르게 쓸 수 있다면, 동포를 위한 일도 바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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