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G화학으로 기우는 ITC
23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불공정수입조사국(OUII)은 최근 2차 의견서에서 "SK 패소 판결 요청을 수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조사국은 "SK이노베이션의 증거 훼손은 여타 다른 사례와 비교해 정도가 심하다고 판단한다"며 "ITC의 포렌식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데에도 악의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앞서 ITC는 지난 10월 LG화학의 요청을 받아들여 포렌식 조사 명령을 내렸지만,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 측이 소송 전후 과정에서 고의적·조직적으로 증거를 인멸하고 포렌식 명령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며 지난달 SK이노베이션에 대해 조기패소 판결을 요청했다. 조사국은 이 같은 LG화학 입장에 찬성하는 의견서를 지난달 제출한 데 이어 이번 2차 의견서에서도 재차 LG화학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도 ITC 조사팀이 현재 LG화학의 주장이 맞다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어져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 SK이노베이션 놓칠 수 없는 트럼프
LG화학으로 기울어진 국면에서 떠오르는 변수는 트럼프 행정부다. 양사 간 법적분쟁이 미국 완성차 산업의 향배와 연관돼 있는 데다 SK이노베이션이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약속했었기 때문이다.
WSJ는 지난 19일 '왜 세계 자동차 산업이 한국의 한 분쟁을 우려하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 같은 점을 지적했다. SK이노베이션이 패소할 경우 이 회사의 배터리셀 등이 미국 내에서 수입 금지 조치를 맞게 되는데, 이는 SK이노베이션을 북미 지역 전기차 배터리 공급업체로 선정한 폭스바겐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F-150 전기 픽업트럭에 SK이노베이션 배터리를 공급받으려고 했던 포드 역시 잠재적인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특히 미국 내 배터리 생산공장을 늘리고 싶어하는 트럼프 행정부가 SK이노베이션에 대해 관대한 결론이 나길 원할 수 있다고 WSJ는 주장했다. SK이노베이션은 오는 2025년까지 총 16억 7000만달러(한화 약 2조원)를 투자해 미국에서 배터리를 생산하기로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브라이언 캠프 조지아 주지사는 지난달 ITC에 편지를 보내 "LG화학이 SK의 부품 수입을 막으려 하고 있다"며 우려를 드러내기도 했다.
◇ 전망은 '오리무중'
이 같은 상황을 두고 WSJ는 "결국 거부권을 가진 미국 무역대표부(USTR) 선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내다봤다. ITC가 SK이노베이션의 패소를 결정해도 미국 정부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오바마 정부도 ITC가 삼성전자의 특허를 일부 침해한 것으로 여겨지는 애플의 아이폰·아이패드 등에 대해 수입을 금지해야 한다고 권고했지만 이를 거부한 사례가 있다.
업계 관계자는 "LG와 SK는 이 소송의 이해당사자가 된 미국 정부와 정치인, 완성차 업계를 포섭해 자사의 목소리를 높여야할 필요성도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아직 ITC의 결정조차 나오지 않은 상황이지만, WSJ가 'ITC 결정 이후 거부권' 시나리오까지 전망하면서 양사의 셈법이 복잡해지게 됐다. 당초 양사는 소송기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는 ITC 판결에 기대를 거는 모양새였다. 만일 WSJ 시나리오대로 전개된다면 ITC 이후 미국 정부의 개입 여지가 적은 델라웨어주 지방법원 판결까지 분쟁이 장기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천문학적인 소송비용과 불확실한 수주환경 등을 고려하면 ITC 판결 이후 어떤 식으로든 양사가 합의를 모색할 것이라는게 업계 안팎에서 나오는 중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