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고인이 회장으로 취임할 당시 LG그룹은 럭키와 금성사, 호남정유 등 8개사로 연간 매출이 270억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구 명예회장이 25년 임기를 마치고 경영에서 물러날 당시 LG는 30여개 계열사를 거느린, 매출 38조원 규모의 '재계 3위' 그룹으로 거듭났다. 종업원도 25년 간 2만명에서 10만명으로 늘었다.
◆ 교육자에서 글로벌 경영인으로
1925년생인 구 명예회장은 LG 창업주인 고(故) 구인회 회장의 장남으로 45세 때인 1970년부터 LG그룹 2대 회장을 지냈다.
구 명예회장은 주로 생산현장에서 직원들과 함께 어울렸다. 럭키크림 생산을 직접 담당하면서 손수 가마솥에 원료를 붓고 불을 지펴 크림을 만들었다. 박스에 제품을 넣어 포장 후 판매 현장에 직접 들고 가기도 했다.
이후 럭희화학은 머리빗·비누통·세숫대야 등을 생산하는 플라스틱 공장을 설립해 락희화학공업사로 발전했다. 구 명예회장은 플라스틱 가공제품의 최초 생산 현장은 물론 우리나라 최초의 전자제품생산업체인 금성사의 라디오 생산 과정도 직접 챙겼다.
그는 1962년 락희화학 전무를 거쳐 1968년 금성사 부사장에 올랐다. 1969년 구 창업회장의 별세에 따라 고인은 1970년 LG그룹 회장을 맡아 25년간 그룹 총수를 지냈다.
취임 이후 한국경제의 고도성장기 때 범한해상화재보험, 국제증권, 부산투자금융, 한국중공업 군포공장, 한국광업제련 등을 인수했고, 럭키석유화학(1978년), 금성반도체(1979년), 금성일렉트론(1989년) 등을 설립하는 등 그룹의 외형을 불렸다. 1987∼1989년 사이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구 명예회장은 70세이던 1995년 '21세기를 위해서는 젊고 도전적인 인재들이 그룹을 이끌어야 한다'며 장남 구본무 회장에게 그룹을 넘겨줬다.
그는 이임사에서 "혁신은 영원한 진행형의 과제이며 내 평생의 숙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은퇴 후에도 경영혁신 활동을 재임 중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길 정도였으며, 스스로 '혁신의 전도사'로 기억되길 바랐다.
구 명예회장은 기업의 외형적 성장뿐만 아니라 선진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실천에 옮긴 재계의 혁신가였다. 그는 국내 민간기업으로는 최초로 기업을 공개해 기업을 자본 시장으로 이끌어 내기도 했다.
1970년 2월 그룹의 모체 기업인 락희화학이 민간 기업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증권거래소에 상장했고, 곧이어 전자 업계 최초로 금성사가 기업공개를 하면서 주력 기업 모두를 기업 공개 한 한국 최초의 그룹이 됐다.
또 다른 기업들보다 한발 앞서 우리나라 기업의 활동 지평을 세계로 확장시켜, 재임 기간 동안에만 50여개 해외법인을 설립했다. 특히 1982년 미국 앨라배마주의 헌츠빌에 컬러TV 생산공장을 세웠고, 이 공장은 국내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설립된 해외 생산기지였다.
◆ 혁신적 자율경영·고객중심 문화 구축
국내외 정세가 급변하던 1980년대 후반부터는 다가올 21세기를 주도할 수 있는 기업 체질을 갖추기 위한 경영혁신 활동을 열성적으로 전개했다. 계열사 사장들이 '자율과 책임경영'을 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하는 LG의 '컨센서스(Consensus) 문화'를 싹 틔웠다.
1990년 2월에는 '고객가치 경영'을 기업 활동의 핵심으로 삼은 새로운 경영이념으로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 '인간존중의 경영'을 선포했다. 고객가치 경영은 한국 재계에서는 아직 생소한 개념이었고,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이제 막 주목받기 시작한 새로운 경영 조류였다. 이를 경영이념으로 선포한 것은 기업경영의 축을 공급자 중심에서 고객 중심으로 전환한 혁신적인 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고인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후 교육 활동과 공익재단을 통한 사회공헌활동에 집중했다. 또 충남 천안에 있는 천안연암대학 인근 농장에 머물면서 된장과 청국장, 만두 등 전통음식의 맛을 재현하는 데 힘을 쏟았다.
고인은 슬하에 지난해 타계한 구본무 LG 회장과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구본준 LG 부회장, 구본식 희성그룹 부회장 등 6남매를 뒀다. 부인 하정임씨는 2008년 1월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