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2년생 김지영'(감독 김도영)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작품일 거다. 1982년 봄에 태어나 결혼, 출산까지 경험한 평범한 여자의 삶을 그린 이 작품은 한국에서만 100만 부 이상 팔린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평범한 여자 지영을 주인공으로 화장실 '몰카'(몰래카메라), 기혼여성을 '맘충'이라 부르는 혐오 시선, 직장 내 유리천장 등 사회 문제까지 녹여낸 '82년생 김지영'은 많은 이의 공감을 얻고 동시에 눈총을 받기도 했다. 원작부터 영화 기획·제작·캐스팅까지 매사 화제였고 이 중심에는 배우 정유미(36)가 있었다.
"작년 8월 말에 시나리오를 처음 봤어요. 술술술 읽고 책을 딱! 덮었죠. 그리고는 한참을 가만히 있었어요. '아, 이제 감독님을 봬야겠다'라고 생각하면서. 하하하."
'82년생 김지영'은 정유미에게 딱 맞아떨어지는 작품이었다. 오랜만에 영화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제작 투자까지 마쳤으며 주인공으로 나서도 괜찮겠다는 자신감마저 차 있을 때였다고.
"자연스럽게 타이밍이 맞았다고 생각해요. 대중과 내가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전에는 제가 주인공이어도 제작 투자가 안 될 때가 있고, 제작 투자를 마치더라도 제가 내키지 않을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딱 이때쯤 '해도 되겠다' '혼자 나서도 되겠다' 했거든요. 여러 가지 차곡차곡 계단을 쌓은 것 같은 느낌이 있었어요."
정유미는 조남주 작가의 원작 소설은 시나리오를 읽은 뒤 접했다고 말했다.
"소설은 나중에 읽었는데 제가 읽었을 때 감상과 다른 방향으로 치우쳐져 있더라고요. 여러 관점으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지만 그건 일부지 전부라고 생각지 않아요. 모니터했을 때 (악플을 다는 사람들은) 소설을 읽지 않은 분들이 더 많았어요. 솔직히 물음표가 생기긴 했지만, 그들을 이해하려면 또 이해할 수도 있으니까. 저는 제가 본 걸 믿고 밀고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정유미의 주변인들도 원작 소설을 공감한다는 쪽이었다. 그는 캐스팅 이후 주변 사람들에게 응원을 받았다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재밌게 읽었는데 네가 지영이 한다며? 잘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고 말해주더라고요.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평범한 인물을 연기하긴 하지만 그분들의 어떤 모습을 가져오려고 하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제가 주의 깊게 본 건 김도영 감독님이었죠."
'82년생 김지영'을 연출한 김도영 감독은 육아와 연출을 병행하는 '워킹맘'이다. 김지영은 현장 안에서의 김 감독을 보며 모티브를 얻었다고.
"연출만 해도 힘든데 육아까지! 남편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하다고 하시지만 그래도 위대한 것 같아요. 육아와 연출을 병행하는 분은 처음 보거든요. 어떤 단단한 힘이 느껴졌고 많이 의지가 됐어요."
영화 속 김지영은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서 한 번도 말해 본 적 없는 속내를 털어놓는다. 가장 평범한 인물이 겪는 이상한 일들을 정유미는 어떻게 해석하고 연기했을까?
"엄마에 대한 마음, 할머니에 대한 마음, 그리움과 상처 등이 켜켜이 쌓인 것 같아요. 그리고 너무 힘든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그런 식으로 표출된 거죠. 자기도 모르는 거죠. 빙의라는 거. 영화의 장치이자 극단적인 상황이지만 그 감정이 전달되지 않는다고는 생각 안 해요."
앞서 언급했듯 '82년생 김지영'에는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성차별부터 직장 내 유리천장, 기혼여성에 대한 혐오, 화장실 '몰카'(몰래카메라), 늦은 밤 귀갓길에 관한 공포 등등 많은 여성이 한 번쯤 겪거나 보았을 일들이 그려진다. 정유미에게 개인적으로 보거나 느껴본 감정이 있느냐고 묻자 "직접적인 일은 없었다"며 고민에 잠겼다.
"비슷한 경험은 없어도 이해할 수는 있었어요. 사실 저는 집안에서 성차별을 겪기보다 첫째라서 특혜를 많이 봤거든요. 영화를 보면서 '남동생도 저런 기분이었겠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남자, 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같은 상황을 겪은 이들의 기분을 이해하게 됐어요. 우리 영화가 '김지영'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 나, 우리의 이야기라고 하는 게 그런 포인트인 거 같아요. 가족 이야기죠."
배우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을 연기하는 건 흔한 일이라고 하지만, '82년생 김지영'처럼 섬세하고 촘촘한 작품 속에서의 연기적 표현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궁금했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시나리오에 나온 그대로 하려고 했어요. 담기 어렵거나 더 세밀하게 표현하고 싶은 건 소설 단락을 찾아봤어요. 묘사가 더 구체적이니까요."
원작 소설을 토대로 각색된 시나리오를 찬찬히 톺아가며 김지영을 세공한 정유미. 그는 시나리오와 소설에 기대는 게 편했다고 고백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소설을 읽었어요. 신마다 읽은 건 아니고 이해가 안 가거나 이상하게 막히면 찬찬히 소설을 읽어갔죠. 읽다 보면 이상하게 탁 풀릴 때가 있었어요."
그는 원작과 다른 결말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원작 소설은 '남자' 정신과 의사, 반복되는 일상 등 다소 씁쓸한 마무리로 경각심을 안겨주었다면 영화는 '변화'라는 희망적인 메시지로 엔딩을 맞는다.
"소설은 소설대로, 영화는 영화대로죠. 이 영화가 보여준 결말도 유의미하지 않나 생각해요. 매체가 할 수 있는 일이죠.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거로 생각해요."
뜨거운 감자, '82년생 김지영'의 유명세를 두고 '젠더 갈등'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묘한 흐름으로 '82년생 김지영'은 '젠더 갈등'의 아이콘이 되었고, 페미니즘을 상징하는 작품이 됐다. "왠지 모르지만 악플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고 하니 정유미는 "이미 배를 탔고, 출발했고, 우리는 갈 곳으로 가고 있다"며 웃었다.
"우리는 그냥 한마음이에요. 우리 뜻이 왜곡되지 않고 관객들에게 잘 전달되는 거. 좋은 영화를 만들고 소통하는 게 우리 일이잖아요? 그렇게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논리적인 비판은 있을 수 있죠. 그래서 영화를 잘 만들어야 하고요. 우리 싸울 일이 너무 많잖아요? 영화로는 안 싸웠으면 좋겠어요."
그의 말대로 이제 배는 출발했고,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다. 정유미를 비롯해 '82년생 김지영'을 만든 이들의 마음은 관객들에게 전달됐고 지난 23일 개봉, 첫날 박스오피스 1위라는 기록을 내놓았다.
"시나리오 그대로 잘 나왔어요. 그 느낌 그대로예요. 사심은 없어요. 전작과 마찬가지로 잘 완성해, 많은 분이 즐겨주시기만을 바랄 뿐이에요."
이제 정유미는 내년 넷플릭스 드라마 '보건 교사 안은영' 공개를 앞두고 있다. 이경미 감독 연출작으로 보건 교사이자 퇴마사가 학교의 미스터리들을 풀어나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 작품 역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저더러 민음사('82년생 김지영'과 '보건 교사 안은영'의 출판사)의 딸이라고···. 하하하. 촬영은 마쳤고 내년 4월쯤 공개돼요. 아직 차기작은 정하지 않았어요. 배우로서 바람은 '뭘 하는지 궁금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 궁금한 배우가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