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뒤 안 맞는 헛소리를 하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하는 “약 먹었나?” 혹은 “약 처먹은 모양이네?”라는 말은 그런 상황에서는 매우 적실한 표현임에도 ‘지식인의 논쟁’에서는 사용되지 않을 말이다. 속에 담긴 경멸과 모욕의 강도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100분 토론’ 같은 프로그램에서 “당신 약 먹었소?”라고 받아치면 그 즉시 토론은 사라지고 격투기가 시작될 것 아닌가?
지난번 ‘책에서 책으로’에 등장한, 영국과 미국의 권위 있는 언론매체들이 2005년 ‘세계 100대 지식인’ 명단에 포함시키기도 한, 영국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비유의 효율은 높으나 품위는 아주 낮은, “약 먹었나?” 이 한마디를 고상하고 날카롭게, 그리고 지적으로 사용했다. 물론 속에는 모욕과 경멸이 듬뿍 담겼다.
그는 <기억의 집>과 <20세기를 생각한다>에서 “처음에는 자율에서 출발한 지식인들이 이내 자기기만을 드러내면서 권력과 허위에 복종하고 아부하는 것, 즉 ‘지식인의 복종감정’은 약을 먹지 않으면 생겨나지 않는 것”이라며 ‘무르티 빙의 알약 Murti Bing’s Pill’을 소개한다. 이 알약은 두려움과 불안, 부끄러움을 사라지게 하는 약이다. 주트의 설명에 내가 인터넷에서 찾아낸 것을 보태면, 중앙아시아 유목부족의 흉포한 지도자, 무르티 빙이 개발한 이 약에 얽힌 전설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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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트는 또 이런 사람들의 존재 방식이라는 ‘케트만 Ketman’이라는 개념으로도 아부하는 지식인, 책임지지 않는 지식인 비판에 활용했다. 주트의 설명에 따르면 “이 존재 방식을 내면화한 자는 자신이 하는 말과 다른 것을 믿으면서 모순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지배자가 새로운 것을 요구할 때마다 자유롭게 순응하는 한편, 자기 내면의 어딘가에는 자유사상가로서-적어도 타인의 사상과 독재에 스스로 복종하겠다고 자유롭게 선택한 사상가로서-자율성을 지켜 왔다고 믿는다.” (권력자의 면전에서 손바닥을 맞잡고 한없이 비벼대는 분들이 떠오른다!)
주트는 무르티 빙의 알약과 케트만이라는 개념을 1980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체스워프 미워시(1911~2004)의 <사로잡힌 마음 Captive Mind>에서 찾아내 자기 책에 썼다. 폴란드에 인접한 리투아니아 태생인 미워시는 폴란드어로 글을 썼으며, 1951년 공산주의 폴란드를 탈출해 1960년부터는 미국에서 활동했다. <사로잡힌 마음>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기억의 집>과 위키피디아 등에 따르면 스탈린 당시 소련 공산주의 체제에서 활동했던 소련 지식인 네 명을 비판적으로 다룬 논픽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하지만 무르티 빙의 알약은 미워시가 만든 게 아니다. 미워시는 선배 폴란드 작가인 스타니스와프 이그나치 비트키에비치(1885~1939)가 쓴 소설 ‘탐욕’에서 이 알약을 찾아냈다. 영어로는 Insatiability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책 역시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지 않았다. 케트만은 19세기 중반 프랑스 외교관이자 여행가인 아르튀르 드 고비노의 중동 지역 관련 저서에 써놓은 것을 미워시가 찾아냈고 주트를 거쳐 나에게까지 온 것이다.
내가 주트의 책에서 무르티 빙의 알약과 케트만을 발견하고 기뻐한 것처럼 주트도 미워시의 책에서 이 둘의 존재를 알고는 무척 기뻐한 것 같다. <기억의 집>과 <20세기를 생각한다>를 쓰기 전에 낸 <지식인의 책임>에서도 주트는 미워시를 여러 번 언급하고 높이 평가한다.
<지식인의 책임>은 레옹 블룸(1872~1950), 알베르 카뮈(1913~ 1960), 레몽 아롱(1905~1983) 등 20세기 프랑스 지식인 세 명의 생애와 정치적 활동을 다룬 책이다. 내용을 극도로 요약한다면, ‘이념 과잉의 프랑스’에서 이 셋이야말로 미워시가 말한 참 지식인의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들이라는 거다.
문학비평가였던 레옹 블룸은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 프랑스 사회당 당수, 총리 겸 외무장관을 지냈다. 알베르 카뮈는 어떤 세계문학전집에도 <이방인>과 <페스트> 둘 중 하나는 꼭 들어가 있는, 1957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레몽 아롱은 <지식인의 아편>이라는 책에서 공산주의와 공산주의 지지자들을 비판한 책을 쓴 정치학자이다.
“…. 세 사람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들 모두 도덕적 (때로는 나치 독일에 무장으로 저항한 육체적)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용기를 드러냈던 경우는 (모든 사람이 너무나 자주 하는 일이지만) 정적이나 지적인 적수에게 반대할 때가 아니었다. ‘자기편’을 반대할 때 그들의 용기는 진가를 발휘했다. 그들은 대가를 치렀다. 고독했고, (적어도 생애 대부분 동안) 영향력이 줄었으며, 명성도 제한됐다. …. 그들이 살았던 시기의 프랑스는 정치적이고 지성적인 복종의 압력이 이례적으로 강력했던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인·대중·동료·좌파 지식인 사이에서 평판이 떨어질 게 뻔했던 일을 기꺼이 감수하는 태도는 희귀하고 매력적인 특성이었고. 그 점만 해도 그들에 대한 글을 쓸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됐다.” 블룸과 카뮈와 아롱에 대해 주트가 한 평가의 일부다. 알약을 먹지도, 케트만에 빠진 적도 없는, 언행에 책임을 진 지식인이었다는 거다.
2년 전에도 무르티 빙의 알약을 소재로 글을 썼다. 자기표절도 있다. 그럼에도 또 내놓는 것은 이 알약을 먹은 것 같은 사람이 자꾸 늘어나서다. 그들은 약을 먹은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서로 “너 약 먹었구나!”라고 소리친다. 아, 이 강력한 약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