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시위대 '임을 위한 행진곡'…수출된 '민주화 가요'의 비밀

2019-06-16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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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AP통신]

# 홍콩 어머니들은 왜 분노했나

[빈섬 이상국의 '편집의눈'] 14일 '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에 반대하는 집회에서 무대에 오른 참가자가 한국의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중국어와 한국어로 불러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홍콩 도심 차터가든 공원에서 벌어진 이날 저녁 시위는 6천여명의 어머니들이 나서 나흘 전인 12일 시위때의 경찰 과잉진압을 규탄하는 집회였다. 12일 시위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 수만 명이 입법회 주변에서 벌인 송환법 저지 시위였다. 이날 경찰은 최루탄, 물대포, 고무탄을 쏘며 강경진압을 했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나온 바 있다.

시위를 지켜보다 격분한 어머니들이 거리로 달려나온 것이 14일 행사였다. 집회에서는 한 어머니가 기타를 들고 무대에 나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그는 구글에서 '광주의 노래'를 검색해 보라면서 한국의 영화인 '변호인', '택시운전사' '1987'을 본 사람이라면 잘 알 것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또 2017년 한국 광화문광장에서 100만명의 사람들이 모여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할 때 이 노래를 불렀다고 말하면서, 이 곡을 '우산행진곡'으로 바꿔 부르겠다고 했다. 우산행진곡은, 2014년 홍콩민주화 시위 '우산혁명'을 기리는 노래라는 의미다. 그 어머니는 광둥어와 한국어를 섞어서 이 노래를 불렀고, 참가자들은 팔을 뻗어 율동을 하고 플래시를 깜빡거리며 박자를 맞췄다. 

# 홍콩 어머니, "박근혜 퇴진시킨 노래"라고 '임을 위한 행진곡' 소개

홍콩의 어머니들이 뛰쳐나온 까닭은 12일 캐리 람 행정장관이 방송(홍콩 TVB)인터뷰에서 송환법을 옹호하면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두 아들을 둔 엄마인데, 내 아들이 버릇없는 행동을 하는 것을 방치한다면 아이들이 자라서 그때 왜 꾸짖어주지 않았느냐고 말할 것입니다." 집회에 나온 어머니들은 자식 생각을 한다면, 어떻게 물대포를 쏘고 최루탄을 퍼부을 수 있으냐고 따졌다. 아이들이 총을 맞아죽기 전에 나서야할 것 같아 나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정권에 따라 부침(浮沈)을 겪는다. 1980년대 운동가요의 고전으로 불리던 이 노래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추모행사에서 제창되어오다가 1997년 이 날이 국가기념일로 승격되면서 정부 주관 행사 기념곡으로 불렸다. 2002년 월드컵 때도 응원가로자주 불렸다. 2009년 이명박 정부 때 공식식순에서 제외되어 식전행사 곡으로 제창되었고 2011년에는 제창 자체가 폐지되고 합창단 기념공연 때 합창곡으로 삽입되는 것으로 바뀐다. 이 곡은 홍콩 어머니가 언급한 것처럼 박근혜 대통령 퇴진운동 때도 시위대 속에서 울려퍼졌다. 2017년 문재인정북가 집권하면서, 다시 이 노래의 제창이 부활됐다.

# '임을 위한 행진곡'은 백기완의 시에서 가사 빌려

이 노래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기에, 한국내에서 정치적 바람을 탔을까. 또 홍콩 시위에까지 '전파'되어, 결연한 대정부 투쟁의 촉진자가 되었을까.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노래의 1절 가사이다. 이 곡의 노랫말은 원래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그 차용한 대목은 이렇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묏비나리는 산신제의 위령곡(영혼을 달래는 노래)라고 볼 수 있다. 이 시를 작가 황석영이 노랫말로 만들고 김종률이 작곡하여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만들었다. 이 노래를 제작한 것은 1980년 12월이었으나, 이것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82년 제작된 음반 ‘넋풀이-빛의 결혼식’에 수록되면서였다.

# 죽은 신랑과 신부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노래

이 노래굿은 어떤 기막힌 부부에게 바치는 비나리였다. 1980년 5월27일 사망한 신랑 윤상원, 1978년 12월 27일 사망한 신부 박기순. ‘임을 위한 행진곡’은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노래였다. 1982년 2월20일, 광주 망월동 묘역에는 두 사람의 친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이 있었다. 그때 ‘신랑도 신부도 끝내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이 결혼식은 우리 역사에 한곡의 노래를 남깁니다’면서, 이 노래가 불려졌다. 이 노래를 작곡한 김종률은 윤상원의 전남대 후배이다.

신랑 윤상원은 누구이던가.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배우 김상경이 열연했던 주인공의 실제인물 바로 그이며, 임철우의 소설 ‘봄날’에서 시민국 대변인 윤상현으로 나오는 사람이기도 하다. 또 1996년 광주MBC다큐의 ‘시민군 윤상원’에서 재조명된 인물이다. 그는 5.18 항쟁지도부의 대변인 역할을 했으며 최후의 저항을 하다가 5월27일 새벽 옛전남도청에서 복부에 총상을 입고 숨을 거둔 민주화 열사이다.

# 광주민주화운동의 주역 윤상원

윤상원의 삶을 간단히 짚어보자. 그는 전남대 문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8년 1월에 주택은행에 입사를 한다. 그러나 그해에 사표를 내고 광주로 돌아와 한남플라스틱의 일용노동자로 취업한다. 이 무렵 광주지역 최초의 노동야학인 ‘들불야학’에 참여하게 된다. 이 야학은 1978년 7월에 1기가 입학했고 1981년 7월에 4기가 졸업한 뒤 해체되었다. 야학을 개설하는데 중심역할을 한 사람은 전남대 휴학생인 박기순이었다. 윤상원은 박씨의 권유를 받고 야학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1978년 크리스마스 날 박기순이 연탄가스로 숨지는 사고가 일어난다. 야학이 흔들리려 할 때 윤상원이 그 중심이 되어 다시 일으킨다.

1980년 5월 광주에 민주화운동이 들불처럼 타올랐을 때, 윤상원은 그 투쟁의 기획자이며 실행자이며 활동가였다. ‘광주시민 민주투쟁 회보’의 초안을 그가 만들었으며, 19일 오후 광주 시내 곳곳에 들불야학 교사들이 들고나가 뿌렸다. 시민군의 선언문을 제작하고 ‘투사회보’를 9회까지 만들어 배포했다. 내외신 기자들을 모아놓고 항쟁의 의미를 역설한 것도 그였다. 그의 죽음은 5.18 항쟁의 담대하던 ‘심장’이 멎은 것이었다. 그는 계엄군이 진압해오기 직전 도청에 있던 중고생들과 여대생들을 귀가시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 내일의 역사를 위한 결연한 투쟁의 노래

“너희들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제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들이 지금까지 한 항쟁을 잊지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길 바란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윤상원의 기억이 담긴, 그리고 그의 아내 박기순의 뜻이 담긴, 또한 광주 민주화운동의 피얼룩이 이뤄낸 성취의 의미가 담긴 노래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이 노래를 제창하는 것은, 윤상원이 말한 ‘지금까지 한 항쟁을 잊지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길 바란다’는 그 처절한 당부를 실천하는 것이며, 역사의 뼈저린 교훈을 상기하는 일이다. 노래 한 곡 속에 숨어있는 두 죽음과 수많은 죽음들이 버티며, 진혼을 요구하는 거기에, ‘님을 위한 행진곡’ 갈등의 본질이 있다. 이 노래는 피로 이뤄낸 민주화의 상징이며, 압제의 고난에 슬퍼하고 항의하는 노래에 그치지 않고 그토록 갈구하던 미래를 기어이 만들어내자는 다짐을 담고 있다. 홍콩의 시민들은 그것에 주목했을 것이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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