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제재 완화라는 선물 보따리를 기대하며 65시간을 떠들썩하게 달렸는데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을 때 심정은 어땠을까요. 말하자면 '왕의 굴욕'인데, 본인 스스로도 처참하지 않았을까요."
지난 2월 '하노이 회담' 결렬 후 약 100일의 시간이 흘렀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국제 외교무대 데뷔전이었다. 첫 데뷔 무대를 망친 김 위원장에게 이 시간은 어떤 의미였을까. 또 문재인 대통령은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국가지도자는 나라의 진로를 결정한다. 때문에 북한을 이해하기 위해선 '인간 김정은'을 이해해야 한다. 북한을 설득해 대화 테이블로 복귀시켜야 하는 문 대통령에게도 이는 아주 중요한 과제다.
김 위원장은 매우 복잡한 인물이다. 스위스에서 유학하며 민주주의를 접했고, 잘사는 북한을 만들기 위한 야망이 누구보다 강한 '젊은 CEO' 이미지도 갖췄다. 유학 시절 담임 선생님은 김 위원장을 소탈하고 성실하며 유머러스한 청년으로 기억한다.
실제 김 위원장은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지도자다. 특히 영화, 공연, 음악 등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매우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집무실에 놓인 수백권의 책들도 이를 뒷받침한다. 집권 후 수시로 산업현장을 방문해 공장의 낡은 건물과 마구간 같은 위생상태를 지적하고,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질타하는 모습도 전 세대와 달리 거침없다.
특히 김 위원장이 하노이 회담 실패의 주역인 김혁철 대미특별대표와 김영철 통전부장 등을 숙청하지 않은 것도 '실책=처형'이라는 기존 관례와 달라진 점이다. 외교가에서는 그의 이런 노력이 국제사회와 더는 동떨어지지 않겠다는 자존심의 표현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잔인한 지도자'다. 권력을 위해 고모부인 장성택을 처형하고, 이복형인 김정남을 암살했다. 당국 차원의 공개처형과 암매장이 자행되고, 정치박해·종교탄압·굶주림·낙태 등 이유로 인권침해도 빈번하다.
개인사와 역사가 겹치면 좀처럼 정의하기 힘든 인물이 탄생한다. 김정은의 얼굴 중 어느 것이 진짜일까. 우리의 패착은 '독재자', '살인자' 프레임에 갇혀 '인간 김정은'의 진짜 모습을 읽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닐까.
미국과 북한이 제시한 비핵화 골든타임이 몇 개월 남지 않았다. 다가올 한·미 정상회담은 북한의 비핵화 문제를 풀 한국 정부의 중재역을 재검증할 수 있는 분수령이다. 문 대통령이 보낸 시간의 깊이가 국제사회에 평화의 향기를 흩날릴 수 있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