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의 新경세유표 12-9] 무궁화는 꽃나무로 위장한 전범기인가?

2019-05-2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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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을 『국화와 무궁화』로 다시 쓰는 일본 무궁화 통사

나라,헤이안,가마쿠라,무로마치 등 시대별로 본 무궁화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무궁화는 꽃나무로 위장한 전범기인가? 일본 최초의 한반도 침략 신화 3세기 진구황후, 16세기 제국주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 19세기 후반 20세기초 제국주의자 메이지 덴노, 이들 셋의 삶과 죽음 주변에는 유독 무궁화가 만발해있다.

◆「국화와 칼』 을 『국화와 무궁화』로 다시 쓰는 일본 무궁화 통사

사(士)는 우리나라에서는 으레 문사인 선비를 의미하고, 중국에서는 문사와 무사를 불가분적으로 통칭하는 뜻으로 쓰인다. 반면 일본에서는 무사인 사무라이로 통한다. 이 ‘士’에 대한 한·중·일 삼국의 각각 다른 해석이 각각 다른 한·중·일 역사를 낳았다.

미국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1887~1948년)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 6월 미국 국무부로부터 일본의 심층분석 연구를 의뢰받았다. 한 번도 일본을 가보지 않았던 저자는 도서관의 자료와 주변 사람들의 경험에 의존해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연구할수록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에 당혹스러워하던 베네딕트는 바로 그 모순이 민족성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베네틱트가 본 일본인은 손에는 아름다운 국화를 들고 있지만(다테마에, 겉모습), 허리에는 차가운 칼을 찬 사람(혼네, 속마음)이었다.

이 같은 분석이 담긴 보고서는 전쟁이 끝난 뒤 「국화와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됐고, 전후 세계인들에게 '일본론의 고전'으로 불렸다.

그런데 필자는 『국화와 칼』을 「국화와 무궁화」라 고쳐 쓸 것이다. 그 이유를 아래 무사의 단검으로 짧게 내려치듯 일본 무궁화 통사를 개괄하면서 간략히 들어보겠다.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무궁화> 신에게 시집가는 기쁨! 신이 계신 달

일본에서 무궁화는 북쪽의 홋카이도에서 남쪽 끝 오키나와까지 일본 전역에 토착화된 꽃나무다. 일본의 혼슈 중부의 와카야마(和歌山)현과 야마구치(山口)현에는 무궁화 야생 군락지가 형성되어 있다.  무궁화는 일본 전국의 산과 들, 도시와 농촌, 학교와 공원, 거리와 빈터, 신사(神社)와 절에 흔히 볼 수 있는 꽃나무다.

이 중에서도 특히 무궁화가 흔한 지역은 교토, 도쿄, 오사카, 나라(奈良), 가시하라(橿原), 가마쿠라(鎌倉), 시마네(島根), 미에(三重), 오이타(大分), 후쿠오카(福剛), 미야자키(宮崎), 아이치(愛知) 등 수도였거나 신화시대와 무사 정권의 중심지였다.

이들 무궁화 명소에서도 최고(最古)는 혼슈의 서남부 동해에 면한 시마네현이다. 현청 소재지 마쓰에(松江)시의 무궁화 산책로와 무궁화 과자점 거리, 이즈모(出雲)시의 이즈모 타이사(大社) 등 시마네현 도처에는 무궁화가 만발해있다. 그만큼 시마네현은 무궁화 관련 신화와 전설이 많은 지역으로 이름 높다.

일본에서는 음력 10월을 '간나즈키(神無月)'라고도 부르는데 '신이 없는 달'이란 뜻이다. 이 시기에 일본의 800만의 신들은 회의를 하러 시마네현의 이즈모 신사에 모인다고 한다. 유일하게 시마네에서는 음력 10월을 '간나즈키'라고 부르지 않고, '가미아리즈키(神在月)'라고 부른다.

신들은 왜 자기 영역을 떠나 시마네현 이즈모에 모여 회의를 개최할까? 그것은 바로 ‘천양무궁(天壤無窮)’의 신칙(神勅)’ 때문이다. “태양신 아마테라스가 이즈모의 하늘을 다스리던 손자 니니기(瓊瓊杵)에게 "지상은 내 자손과 그 후손이 영원히 다스릴 땅이다.”면서 니니기를 다카치호(현 미야자키현)로 파견, 강림하게 하였다는 신화다.

초대 덴노 진무(神武)부터 지난 5월 1일 제126대 덴노로 취임한 나루히토(德仁, 1960~)까지 126명의 덴노들의 정통성은 이러한 “천양무궁의 신칙”에서 나온다.

“신에게 시집가는 기쁨! 신이 계신 달(神様に嫁ぐ喜び神在月)”

시마네현 출신의 한 하이쿠 시인은 무궁화를 이렇게 예찬했다. 천양무궁의 ‘무궁’과 ‘무궁화’ 사이에는 어떠한 사연이 묻혀 있을까? 그 진실에 닿고 싶다.

◆국화(다테마에)는 덴노의 것, 칼(혼네)은 진구황후의 것

나라마다 좋아하는 색이 다르다. 중국 사람들은 붉은색을 좋아하고 중동 사람들은 흰색을 좋아하다. 한국인은 색동저고리에서 알 수 있듯 '파랑, 빨강, 노랑, 하양, 검정' 5색 배색을 선호하는 편인데 일본인은 국기와 군기, 일본 대표 무궁화 품종에서 볼 수 있듯 빨강·하양, 홍백 배색을 길조로 여긴다.

특히 동서고금을 통하여 홍백 배색을 좋아하는 나라 사람은 일본인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인이 홍백 배색을 길조로 여기는 데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등장하는 진구(神功)황후가 태어날 때 하늘에서 홍백 배색 깃발이 흩날리며 내려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일본 각종 문헌은 진구황후의 출산이 일본에 더없는 기쁨이었기 때문에, 이때의 홍백 배색이 경사스러움의 상징이라고 적고 있다.

그의 탄생이 일본에 더없는 기쁨이라니? 도대체 진구황후는 누구일까? 신화반 역사반의 일본최초의 정사 『일본서기』를 살펴보자.

진구황후는 일본역사에 왕이 없는 기간인 서기 201년부터 269년까지 섭정으로 군림했다.  덴노(천황)이 신라를 정벌하라는 신의 계시를 듣지 않아 급사를 했다. 진구는 오진(應神)덴노를 임신한 몸이었지만 배에 돌을 대어 출산을 늦추고 직접 신라를 정벌했다(200년). 신라왕은 일본군이 도착하자 스스로 결박하고 항복했고 말과 마구를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진구는 다시 한반도 남부에 출병해서 신라를 격파하고, 가라 7국을 평정한 후 전라남도까지 장악해 백제를 복속시켰다(249년). 이러한 『일본서기』의 기록은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의 원천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역사교육 시간에는 조선이 5세기 무렵에 일어난 진구황후의 한반도 정벌 이래로 일본의 영토였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2차세계대전 이후 일본에서조차 진구황후는 역사가 아닌 설화로 취급받는다. 메이지 시대 1880년에 그려진 진구황후의 <삼한정벌도> 속 신라왕은 파사 이사금인데, 진구 황후와 파사 이사금(80~122년) 재위 시대를 비교했을 때 서로 만날 수 없는 인물이었던 사실 하나만을 보아도 삼한정벌설은 왜곡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삼한정벌설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 근거와 구실로 삼은 일본 신화시대의 전설일 뿐이다.

그러나 진구황후는 일본 사무라이들의 신모(神母)다. 실제 사무라이의 원조 미나모토노 요시이에(源義家,1039 ~1106년)는 진구황후를 자신의 신의 어머니로 삼았다.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는 그의 고손자이고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1305년~1358년)는 그의 15대 손이다.

진구황후를 제신으로 배향한 오이타(大分)현의 우사(宇佐)신궁, 후쿠오카현의 미야지다케(宮地嶽)신사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오진 덴노를 제신으로 모신 무사들의 수호 신사인 하치만(八幡)신사(일본 전역에 약 4만 4000개의 분사가 있는 일본 최다 신사)경내 외에는 시점과 종점을 알 수 없는 무궁화가 무궁하게 피고 지고 있다.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신화에서 역사로, 나라 시대(710~794년)

7세기 후반 이전까지 일본의 덴노들은 고정된 수도를 두지 않았다. 덴노의 궁전이 곧 수도였고, 덴노의 가족 일원이 정부를 이루었다. 덴노가 죽으면 궁전은 죽음과 관련이 있기에 불태웠고, 새로운 궁전을 지었다.

그러나 중국 제도에 기초한 왕실 관료제가 성장하면서 고정된 수도의 필요성이 점점 커졌다. 결국 710년 겐메이(元明)덴노는 오늘날의 나라(奈良)서쪽에 있는 헤이조쿄(平城京)에 일본 최초의 수도를 세웠다.

나라 시대에 일본은 정치 체제, 문화, 법률 면에서 중국을 모델로 삼게 되었다. 일본어에 한자를 들여온 것도 나라 시대였기에 학계는 나라 시대 이전을 신화시대, 이후를 역사시대로 구분하기도 한다.

나라 시대부터 ‘무궁화 나무 나라’라는 뜻의 부상(扶桑)국은 ‘일본(日本)’으로 기록되기 시작했고 무궁화도 ‘신화’에서 ‘역사’로 피어나기 시작했다. 즉 신화 속의 무궁화가 일본 최고(最古)이자 최고(最高)시가집 「만연집(萬葉集)」(751년 이전 출간)에 문자로 최초 기록된 것이다. 일본학계는 『만엽집』에 나오는 일곱 가지 초목 가운데 하나인 조모(朝貌)가 무궁화를 지칭함을 고증한 바 있다.

◆신사에서 사찰로, 헤이안 시대(794~1192년)
 

무궁화 명소로 유명한 교토 신뇨토(眞如堂) 거리에서 홍백 배색 의상을 입은 여인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794년 간무(桓武)덴노가 나라에서 헤이안쿄(平安京) 지금의 교토로 천도한 헤이안시대 이후 무궁화는 신토(神道)의 신사에서 불교의 사찰로 영토를 넓혔다.

일본 최고(最古)의 백과사전 『화명유취초(和名類聚抄)』(938년 출간)와 일본 최고(最古)의 옥편(사전)인 『유취명의초(類聚名義抄)』(1100년 출간)에는 무궁화가 ‘나무 연꽃(木波知須)’ 또는 ‘연꽃(波知須)’으로 적혀있다. 일본 불교의 극성기 헤이안 시대에 무궁화는 불교의 상징인 연꽃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아미타여래를 모신 교토의 신뇨도(真如堂)(984년 창건)는 일본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무궁화 명소 중의 하나이다. 무궁화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모신 사이린지(西林寺)를 비롯 야쿠시지(藥師寺), 도다이지(東大寺),큐호지(久法寺),붓꼬지(仏光寺),호류지(法隆寺)등등 헤이안 시대에 건립된 무수한 사찰 경내 외에는 무궁화 나무가 식재되어 있다.

헤이안 시대 무궁화 기록 대표 문헌에는 『유취명의초』, 『부상약기(扶桑略記)』, 『고금화가집(古今和歌集)』, 『속일본기(續日本紀)』, 『일본후기(日本後紀)』 등이 있다.

◆위에서 아래로, 가마쿠라 시대(1192~1333년)

가마쿠라의 갈림길에 즐비한 무궁화 울타리(鎌倉の辻の多さよ木槿垣) -호시노 다츠코(星野立子)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도쿄에서 남쪽으로 50㎞ 떨어진 가나가와(神奈川)현 관광 휴양도시 가마쿠라시는 집집마다 거리마다 무궁화 세상이다.

헤이안 시대 말기 덴노와 귀족의 중앙집권 체제가 붕괴되면서 지방과 농촌 지역에서 법과 질서를 유지할 수 없게 됐다. 이렇게 되자 지방의 호족들은 자신의 생명과 토지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장할 수밖에 없었다. 사무라이는 이처럼 중앙집권의 와해, 즉 덴노권의 강화의 실패와 더불어 발생했다. 이들 사무라이는 점차 상호 연결되면서 무사단으로 성장해갔다. 흰 깃발을 내건 겐지(源氏)와 붉은 깃발을 내건 헤이시(平氏)로 두 패로 갈라져 내란으로 발전했다.

1180년부터 1185년까지 겐페이 전쟁(源平合戰)의 결과 흰 깃발의 겐지 가문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승리했다. 그 결과 일본최초의 사무라이 정권이 지배하는 가마쿠라 막부가 탄생했다.

그래서일까? 가마쿠라 시대의 주체 세력인 겐지 사무라이는 흰 무궁화를 각별히 애호했다.

‘시로기온마모리’(白祇園守, 흰 토지신 부적)와 ‘시로하나가사’(白花笠, 흰 제례용 꽃삿갓)’ 등 순백의 무궁화 품종은 아마테라스의 동생이자 토지신인 스사노와(須佐能乎)를 배향하는 교토의 야사카(八阪) 신사와 아이치현의 츠시마(津島)신사 비롯한 일본 전국 5600여 개소 신사의 신문(神紋)과 부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신사와 사찰, 왕실과 귀족의 정원 높은 데서 피던 무궁화가 사무라이와 민가의 묘지와 울타리 등 낮은 데로 임하기 시작한 때는 가마쿠라 시대부터이다.

가마쿠라 시대 무궁화 기록 대표 문헌으로는 『신고금화가집(新古今和歌集)』, 『자경집字鏡集』, 『오처경(吾妻鏡)』, 『중무내시일기(中務内侍日記)』 등이 있다. 

◆실외에서 실내로, 무로마치시대(1333~1573년)

사무라이의 태두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15대 손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1305년~1358년)가 교토의 북서부 무로마치에 꽃의 어소(御所)라 불리우는 크고 화려한 저택을 짓고 무가정치(武家政治)를 열었다.

"1508년 7월 23일 이른 아침에 무궁화 꽃을 감상했다. 태자와 고관 승려들과 귀족 등과 차를 마시며 무궁화 꽃에 취했다."

"1508년 8월 5일 새벽에 식부대보(式部大輔)등 5명의 대신과 함께 무궁화를 감상했다. 감로사 주지도 같이 참여했다."

"1508년 8월 8일 맨드라미 꽃과 무궁화로 화환을 만들어 벽에 걸어 두니 보기 좋다."
- 「대일본사(大日本史)』(1715년)


이는 무로마치시대의 실권자 (後法成寺) 관백(關伯 성인이 된 왕을 대신해서 국사를 총괄하는 직책)의 일기다.

무로마치시대 이전까지 실외의 정원이나 울타리에서 피던 무궁화가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러서는 실내의 다도용 또는 꽃꽂이용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야말로 무궁화가 ‘실정’(室町 무로마치)시대 이름 그대로 ‘실내(室內)’로 들어온 것이다.

무로마치시대 무궁화 기록 대표 문헌엔 『하학집(下學集)』,『절용집(節用集)』, 『이경집(伊京集)』 등이 있다. 

◆무궁화를 무궁화라고 하지 못하고 모과라고 하는 까닭은?
 

야사카 신사의 무궁화 신문(神紋)과 오다 노부나가의 모과 가문(家紋)은 같다.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년)는 센고쿠(戰國)시대를 평정한 인물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를 연 다이묘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더불어 중세 일본 세 영걸로 불린다.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옹립해 덴노의 소재지 교토를 수중에 넣고, 그마저 추방해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키면서 중부 일본 일대를 기반으로 중세 일본 봉건제의 정점에 섰다. 일본 각지역의 패자들을 차례차례 굴복시키면서 하극상이 계속되던 시대 끝에 최초의 천하인이 됐다.

오다 노부나가의 승승장구 전장에는 항상 오다가(家)의 가문(家紋)인 모과(木瓜)무늬가 도안된 깃발이 펄럭였다. 일본의 문헌은 모과 가문을 ‘오과에 당화(五瓜に唐花)’라고 부연 해석한다. 테두리는 모과의 단면을 다섯으로 나누고 한가운데의 문양은 ‘당화’(唐花)무늬로서 중국으로부터 도래한 꽃무늬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으로부터 도래한 당화’라니, ‘당화’는 도대체 무슨 꽃인가? 당화의 정체에 대한 명확하고 구체적 해설은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게다가 오다 가의 가문 ‘모과(오과에 당화)’ 문양은 기존의 야사카 신사와 츠시마 신사 등 약 5만여개소의 신사의 무궁화 신문(神紋)과 똑같다(그림 8). 무궁화 문양을 모과문양이라 하다니, 이게 어이 된 일인가?

혹시 무궁화가 왕실화이자 덴노의 가문(家紋)인 국화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일본의 신화(神花)이자 신문(神紋)이기에 감히 무궁화를 무궁화라고 못하고 모과라고 불러야 했을까?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 것처럼(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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