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관객석, 조명...배우 윤석화는 마지막 공연만을 남겨 놓고 있는 정미소를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겉으로는 환하게 웃었지만 복잡한 마음은 숨길 수 없었다. 정미소가 가장 빛났던 순간을 말할 때는 끝내 진한 눈물을 흘렸다.
목욕탕으로 쓰던 3층 건물을 개·보수해 2002년 개관한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는 폐관작만을 남겨 놓고 있다. 윤석화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가 오는 6월11일부터 22일까지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열린다. 2020년 영국 런던에서 공연될 예정이며, 이번에는 오픈 리허설 형식으로 무대에 오른다.
16일 정미소에서 열린 제작 발표회에서 윤석화는 “어떤 것을 기념할 나이는 지났다. 처음에는 마지막 공연을 하지 말까도 생각했지만 17년 간 함께 해준 관객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며 “이 작품을 사랑해준 많은 관객들 덕분에 영국에 가서 공연을 하게 됐다. 감사하다”고 고개 숙였다. 관객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준비한 것이다.
모노드라마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영국을 대표하는 현대 극작가 아놀드 웨스커 원작인 작품이다. 1992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연출가 임영웅의 연출 및 윤석화 출연으로 극단 산울림에서 세계초연 했던 작품이다. 당시 대성공을 거뒀다. 2013년 아놀드 웨스커, 프로듀서 리 멘지스와 함께 런던공연을 하려 했지만 한국에서의 문제 때문에 무산됐었다. 7년의 기다림 끝에 다시 기회가 온 것이다.
작품에 대한 기대감과 동시에 정미소를 떠나보내야 하는 아쉬움도 컸다. 17년간 정미소를 운영해 온 윤석화는 “건물이 매각 됐기 때문에 내가 도저히 어찌 할 수 없는 상황까지 왔다. 9월까지 극장을 비워줘야 하는 상황이다. 할 만큼 했다”며 시원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는 좋은 극장은 좋은 작품이 올라오는 곳이라고 말했다. 연극의 정신을 담아낼 수 있다면 극장이 아무리 작고 초라해도 상관없다고 했다. 정미소가 그랬다.
윤석화는 “아직 힘은 없지만 작품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젊은 후배들을 조금씩 후원해주는 ‘정미소 프로젝트’가 있었다. 조그만 공간, 약간의 제작비만 지원해줘도 연극의 정신이 살아 있는 진심이 담겨 있는 작품을 만드는 것을 보고 보람을 느꼈다”고 울먹이며 말했다. 이날 사회를 맡은 배우 이종혁은 “나를 비롯해 수많은 신인 배우들에게 꿈을 꾸게 해줬던 기회의 공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정미소는 없어지지만 윤석화는 ‘제2의 정미소’를 꿈꿨다. 그는 “시골의 진짜 정미소에 극장 정미소로 만들고 그곳에서 연극을 꿈꿀 수 있는 것 같은 예감이 든다”고 말했다.
배우 윤석화의 연극과 한국 연극 발전을 위한 발걸음도 계속된다. 그는 석양을 꿈꿨다.
윤석화는 “아침에 뜨는 해도 아름답지만 석양도 아름답다. 또 다른 아름다움이다. ‘어떻게 질 것인가’도 중요하다”며 “나는 관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제는 정말 아름다운 배우로 아름다운 사람으로 후배들의 좋은 배경이 되어주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