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감독은 2시간짜리 작품이 먼저 욕심이 났다. 태생이 영화감독이기 때문이다. 그의 완벽주의 고집이 발동했다. 박 감독은 "도무지 작품의 디테일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고 털어놨다. 결국 드라마를 만들어야겠다는 결론이 났다. '영화계 거장'이 TV 드라마 연출에 도전장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영화계에서는 의아한 반응이 쏟아졌다. 그러나 정작 박 감독은 "그저 '리틀 드러머 걸'을 완벽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영화보다는 드라마가 적격이었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박 감독이 이토록 완벽하게 표현하고 싶었던 '리틀 드러머 걸'은 1979년 이스라엘 정보국의 비밀 작전에 연루되어 스파이가 된 배우 찰리(플로렌스 퓨)와 그녀를 둘러싼 비밀 요원들의 숨 막히는 이야기를 그린 첩보 스릴러다.
오는 29일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 첫 방송 공개 전, 아주경제는 박찬욱 감독과 만났다.
태연하고 능청스럽게 "헷갈린다면 인터넷으로 반복해서 보시면 됩니다"라고 거드는 얼굴에 웃음이 터졌다. 박 감독의 말처럼 '리틀 드러머 걸'은 이른바 '떡밥'이 가득한 작품이다. 여러 차례 반복해서 볼수록 몰랐던 장치가 발견되고 그로 인해서 이야기가 완전히 뒤틀리기도 한다. OTT 플랫폼으로 인해 시청자들은 무리 없이 이 '떡밥'을 무한 반복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떡밥 해소법'이 충족됐기 때문에 '영화계 거장' 박찬욱이 OTT 플랫폼과 손을 잡게 된 이유가 되는 걸까.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저는 OTT 플랫폼에 대해 '어떤 의견' 같은 게 없어요. 그저 이건 대세고 현실이라고 생각해요. 적응하느냐의 문제죠. 좋다, 나쁘다는 건 이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팅커 테일러 솔저스파이'부터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모스트 원티드 맨' 등 존 르카레 감독의 숱한 첩보 소설 중 왜 '리틀 드러머 걸'이었을까. 작가의 열렬한 팬이라는 박 감독에게 '왜 이 소설이 당신의 작품이 된 것인가'라고 물었다. 대답은 명쾌했다. 작품 속 인물에 '박찬욱'이 있었다.
"활력이 있잖아요. 소설을 읽을 때 그 점에 매료되었어요. 예컨대 제가 좋아하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만 봐도 극 중 조지 스마일리(영화에서는 게리 올드만이 연기한 캐릭터)는 책상에서 지시만 내리죠. 그런데 '리틀 드러머 걸' 마틴 쿠르츠(마이클 섀넌)는 모든 걸 계획하고 설계하는데 직접 사람도 상대하고 활동하잖아요. 그 모습이 마치 프로듀서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원작에는 없지만, 드라마 속에 새로 추가한 대사가 찰리와의 첫 만남에 나와요. '제가 이 드라마의 작가이자 프로듀서, 감독이다.' 마틴은 나 같은 사람, 나와 같은 직업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소설과 이 캐릭터에 급 매료되었는지도 몰라요."
500페이지에 달하는 긴 장편소설을 읽고 박 감독이 가장 먼저 떠올린 이미지, 색채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잠시간 생각에 잠기더니 "화려하고 볼드(bold)한 색감을 쓰되 패턴은 단순하게"라고 말문을 뗐다. 설명이 더 필요했다.
"소설을 읽을 때 가디 베커(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빨간색 재킷'을 입고 찰리의 공연을 보는데 저는 왜인지 그 문장을 읽으면서 '초록색 재킷'을 떠올렸어요. 그 초록색 재킷은 이후 찰리가 마주하는 '허구의 세계'와 '현실 세계'를 이어주는데 이것이 제가 느끼는 문장보다 영상이 더 우월하게 표현됐다고 여기는 점이에요. 더 감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는 거죠. 이런 이미지를 드라마 전반에 녹여내려고 했고 미술 감독과 콘셉트 회의를 할 때도 '화려하고 과감한 색깔을 주로 쓰자' '패턴은 아예 쓰지 말자'고 했어요. 화려하고 대담하되 집중할 수 있도록. 미술 감독과 가장 많이 이야기한 점이요? '내 영화에는 존 르카레 선생 소설에 나오는 영감님들 같은 칙칙한 색깔은 쓰지 말자'는 거요.' 하하하."
"시대적 분위기를 담아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당시 1979년대는 공항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를 피우곤 했었으니까요. 지금 관객에게는 재밌는 그림이죠. 찰리는 시대를 앞서나가는 진취적인 여성이니까 그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죠. 그에 반해 요원들은 무시무시한 음모를 꾸미고 있으면서 알록달록한 색깔의 디저트를 단체로 먹고 있으면 재미있어 보이잖아요? 대조적인 효과도 있고요. 제가 좋아하는 설정들이기도 해요."
앞서 박 감독은 '친절한 금자씨' '박쥐' '스토커' '아가씨' 등 많은 작품을 통해 대담하고 진취적인 성향의 여성들을 표현해왔다. '리틀 드러머 걸' 찰리 역시 마찬가지. 그의 전작들의 여성들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원작 속에서 이미 찰리가 가진 성향이 있었지만, 제가 '이 작품을 하고 싶다'며 덤볐을 때는 어느 정도 제 생각과 선택이 담겨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그가 '여성 서사'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꼭 여성 서사만을 고집하려는 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아주 가까이에 있는 아내, 딸을 보면서 관심을 가지게 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제가 여성 서사만을 쓰고, 만들겠다는 식의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에요. 저 역시도 남성 위주의 서사를 쓰고 있긴 합니다. 꽤 오래 준비하고 쓰고 있는 작품이 있는데 투자가 계속 미뤄지고 있어요. 투자자들에게 여성 위주의 서사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나 봐요. 왜 여성 서사에 관심을 가지고 공을 들이느냐고 묻고 그에 대해 고민을 해본다면 역시 아주 가까이에 아내, 딸이 있기 때문이겠죠? 특히 딸이 성장하는 걸 지켜보면서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는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