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바로 사람이고, 기업을 경영한다는 것은 곧 사람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이 3일 향년 8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인재 중심 경영'과 '경청의 리더십'으로 오늘날 글로벌 두산의 기틀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1932년 서울에서 고(故)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동고를 졸업하고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자원해서 해군에 입대, 참전용사로 활약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었다.
그는 사회 생활도 말단부터 시작했다. 미국 워싱턴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뒤 귀국해 1960년 산업은행에 공채로 입사했다. 두산그룹에는 1963년 동양맥주 평사원으로 발을 들였다. 당시 공장 청소와 맥주병 씻기 등 잡다한 업무부터 배운 것으로 전해진다. "남의 밑에 가서 밥을 먹어야 노고의 귀중함을 알고 아랫사람의 심경을 이해할 것"이라는 선친의 뜻이 크게 작용했다.
이런 경험은 그가 사람(人)을 중시하고 직원들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는 밑거름이 됐다. 또한 두산그룹에 국내 기업 최초 연봉제, 대단위 팀제 등을 도입하는 혁신으로 이어졌다.
그는 이 같은 능력을 인정 받아 한양식품 및 동양맥주 대표, 두산산업 대표 등을 거쳐 1981년에는 두산그룹 회장에 올랐다.
그룹의 대전환기에도 그의 존재감은 컸다. 창업 100주년을 한 해 앞둔 1995년 경영위기 타개를 위해 33개에 이르던 계열사를 20개사로 재편했고, 두산의 대표 사업인 OB맥주 매각을 추진했다.
이 같은 선제적 조치를 통해 두산은 2000년대 한국중공업, 대우종합기계, 미국 밥캣 등을 차례로 인수하며, 소비재 기업에서 산업재 중심의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그는 회사뿐 아니라 가정에도 충실했다. 1960년 부부의 연을 맺은 이응숙 여사가 1996년 먼저 세상을 떠난 이후 23년간 사부곡을 써내려갔다. 이 여사가 암 투병 당시 병실 소파에서 쪽잠을 자며 오랜 기간 병수발을 든 일화는 유명하다.
자식들에게는 가훈인 '수분가화(분수를 지켜야 가정이 화목하다)'가 새겨진 액자를 선물하는 등 겸손함과 형제간 우애를 강조해 왔다.
고인을 대해 본 재계 관계자들은 "세간의 평가보다 사람의 진심을 믿었고, 다른 이의 의견을 먼저 듣고 존중하던 '침묵의 거인'이셨다"면서 "주변의 모든 사람을 넉넉하게 품어주는 '큰 어른'이셨다"고 입을 모았다.
유족으로는 아들 정원(두산그룹 회장), 지원(두산중공업 회장), 딸 혜원(두산매거진 부회장)씨 등 2남 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7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