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근의 차이나 무비⑭] 중국영화 ‘5세대’ 출발점이 된 ‘황토지’

2018-12-05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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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카이거 연출·장이머우 촬영, 80년대 30년간 영화계 이끈 쌍두마차

새로운 구도·색채·이야기 서양 이목 집중

중국영화 '황토지' 주인공 추이차오(왼쪽)와 구칭(오른쪽). [사진=바이두]


1976년 9월, 마오쩌둥(毛澤東)이 죽었다. 10월, 이른바 ‘사인방’이 실각했다. 10년 동안 이어지던 광풍이 잦아들었다. 문화대혁명이 끝났다. 그러나 아직 새벽은 오지 않았다. 2년간 치열한 권력 투쟁이 이어졌다.

마오쩌둥의 후계자 화궈펑(華國鋒)과 실용주의자 덩샤오핑(鄧小平)은 중국의 앞날을 놓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웠다. 1978년 12월 덩샤오핑은 실권을 장악했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 그렇게 시작됐다.
그보다 앞서 1978년 9월, 대학이 다시 문을 열었다. 문화대혁명 기간 폐쇄됐던 터였다. 신입생을 모집하고 강의를 시작했다. 영화 인재를 양성한다는 목표로 매진해 온 베이징영화대학(北京電影學院)도 새로 학생을 받았다. 이때 입학한 학생들은 1982년 여름 졸업했다. 천카이거(陳凱歌)는 베이징에 남았고, 장이머우(張藝謀)는 광시(廣西)영화제작소로 배치됐다.

함께 광시로 배치된 친구 장쥔자오(張軍釗)는 장이머우에게 촬영을 맡기고 ‘하나와 여덟(一個和八個, 1984)’이라는 영화를 찍었다. 영화는 팔로군(八路軍), 즉 일제에 맞서 싸운 중국인민해방군의 주력 부대의 지도자가 투옥 상태에서도 국민당군을 감화시킨다는 내용을 그렸다. 중국 전역은 새로운 영화에 환호했다. 천카이거는 그런 분위기를 놓치지 않았다.

‘황토지(黃土地, 1984)’는 그런 흐름 속에서 태어났다. 천카이거는 친구 장이머우와 의기투합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30년 넘게 중국영화를 쥐락펴락한 쌍두마차는 그렇게 말을 내달렸다. 천카이거가 연출을 맡고 장이머우는 촬영을 맡았다.
 

중국영화 '황토지' 도입부. [사진=바이두]


영화는 1937년 중국의 궁벽한 시골 마을, 산베이(陝北)의 가난한 산촌에서 시작한다. 소녀 추이차오(翠巧)는 꽉 막힌 산골, 가족의 그늘에 살아간다. 일제의 침략과 국민당의 압박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던 공산당은 어떻게든 전쟁에 이겨야만 했다. 팔로군 문예선전대 대원 구칭(顧靑)은 민요를 수집하러 산촌에 들어선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민심이었다. 아무리 군비가 우월해도 민심을 얻지 못하면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기 어려웠다. 게다가 공산당은 일본군이나 국민당에 비해 군비조차 훨씬 열세였다. 민요는 민심을 단합하게 하는 중요한 정서적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었다. 구칭은 추이차오의 집에 가족처럼 머물게 된다.
 

중국영화 '황토지' 촬영 당시의 천카이거(왼쪽)와 장이머우(오른쪽). [사진=바이두]


천카이거와 장이머우는 촬영의 법칙에 합의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장면은 모두 걷어내자고. ‘황토지’의 도입부는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장면으로 만들어졌다. 하늘과 땅의 비율이 역전됐다. 지평선이나 수평선은 직사각형의 프레임 안에서 아랫부분에 자리 잡는 게 상식이었다. 땅이 두셋이면, 하늘은 일여덟을 차지했다.

그러나 ‘황토지’는 이런 구도를 정확하게 뒤집었다. 땅은 하늘 끝까지 치솟아 올라갔다. 파란 하늘은 직사각형 안에서 겨우 하나둘을 차지할 뿐이었다. 그 나머지는 모두 누런 땅, ‘황토’였다.

구도의 전복은 비율의 전복과 색채의 전복을 의미했다. 화면 위에 꽉 찬 황토의 땅은 깊은 산골 이미지를 완벽하게 창조해냈다. 영화는 이듬해 스위스에서 열린 제38회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다. 그리고 은표범상을 거머쥐었다. 서양 비평가들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중국영화에 환호했다. 1930년대 상하이(上海)영화의 황금기를 기억하는 이들은 없었다. 문화대혁명 기간의 중국영화는 죽의 장막에 가려 있었다. 불현듯 나타난 중국영화는 새로운 색채와 구도와 이야기로 이목을 사로잡았다.

장이머우는 서양의 환호에 자극받았다. 그리고 1987년 자신의 감독 데뷔작 ‘붉은 수수밭(紅高粱)’을 선보였다. 이른바 중국영화의 ‘5세대’는 이렇게 탄생했다. 서양인들은 눈앞에 등장한 중국영화에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다. ‘누벨바그’라며 프랑스영화의 새 물결을 명명하던 방식이었다. ‘황토지’는 5세대의 시작이었다. 전통과 인습을 거부하며 자신들의 영화 문법을 구축했다.

추이차오는 혼사를 앞두고 있었다. 그저 순박하기만 했던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구칭은 그런 추이차오가 가여웠다. 바깥세상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이 얼마나 자유로운 삶을 누리는지 이르고 또 일렀다. 구칭에게 바깥세상은 공산당 통치지역, 옌안(延安)이었다. 거기에 가면 공산당의 돌봄 속에서 자기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있노라 일렀다.

추이차오는 겁이 났다. 떠나가는 구칭을 보며 그저 구슬픈 운명을 담은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추이차오의 동생 한한(憨憨)도 구칭의 뒤를 따르며 못내 아쉬워한다. 혼사가 끝나던 날, 추이차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랑을 내팽개친다. 작은 배를 저어 죽음을 무릅쓰고 황하를 건넌다. 강물은 바람에 실려 굽이치고, 추이차오의 그림자는 문득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리고 두 달 뒤, 구칭은 다시 산촌을 찾는다. 한한이 한달음에 뛰어와 그를 맞는다.

중국영화의 5세대, 중국영화의 개혁과 개방, 중국영화의 새로운 역사는 ‘황토지’와 함께 시작했다. ‘황토지’는 중국영화의 과거를 지우고, 미래를 설계한 기념비가 됐다.

 

[임대근 교수의 차이나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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