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事大)’는 국제질서다. 생존법칙이다. 사회관계 전반의 질서로 확대될 수도 있다. 약자가 강자를 섬기는 것이다. 약육강식이란 정글법칙의 국제관계 버전이다. 동물은 먹이사슬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숙명이다. 인류는 먹이사슬의 굴레에서도 생존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게 바로 사대다. 사대는 스스로 먹이가 되지 않고 섬김과 조공을 대체재로 체제를 보장받는 방법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우리는 미국을 사대한다. 중국과 일본을 사대하고 러시아를 사대한다.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국제질서다. 우리도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이자 선진강국이다. 사대는 상대적 개념이다. 강자여도 더 강자를 섬겨야 생존할 수 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란 정치질서와 자본주의란 경제시스템으로 우리와의 사대 시스템을 구축했다. 우리 시장에서 달러 패권으로 취하는 이익은 미국이 얻는 조공인 셈이다.
미국이 우리 정부에 공식적으로 화웨이 장비 도입에 부정적 입장을 표한 적은 없다. 우리 정부가 SK텔레콤과 KT, LG유플러스 등 이통3사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보안문제란 유령은 이통3사에겐 실질적인 공포다. 업체 관계자들은 기자에게 공공연히 정부에 대한 눈치를 얘기한다. 때로는 진실보다 인상이 더 강력하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미국 의회가 화웨이 장비의 보안문제를 제기했지만 관련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개연성을 주장한 것이다. 안정상 더불어민주당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수석전문위원에 따르면 스페인의 인증기관인 ENAC가 2014년 화웨이 기지국 장비에 대해 보안문제가 없다고 결론냈다. 백도어란 고스트는 여전히 전 세계 통신장비시장을 떠돈다. 사법시스템에선 검사가 유죄를 입증한다. 아니면 무죄다. 피의자가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경우는 없다. 이게 상식이다.
정치논리는 화웨이의 무죄 입증을 강요한다. 불가능하다. 비상식적이다. 하지만 이를 무시할 수는 없다. 현실이다.
5G 통신장비 선정문제는 시장논리나 사법논리의 영역이 아니다. 본질은 보안문제로 위장된 노골적인 정치논리다. 정부가 나서야 하는 이유다. 업계에선 해결할 수 없다. 시장논리로 가성비 좋은 제품을 선정하면 정치논리로 보복 당할 것을 우려한다. 보안문제는 유령이지만 두려움은 실존한다.
그러나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다. 통신요금, 즉 시장가격에 적극 개입했던 정부가 정작 정치의 영역에서는 뒷걸음이다. 시장의 불가침 영역을 침범해 놓고 정작 정치 본연의 역할에선 책임전가다.
최근 유영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황창규 KT 회장과 박정호 SK텔레콤 사장, 하현회 LG유플러스 부회장 등 이통3사 CEO(최고경영자)와의 간담회에서 보안 문제에 대한 검증은 장비를 구입하는 업체들이 할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보안문제가 대두되자 영국 정부가 사이버보안평가센터를 만들어 정부의 선명한 메시지를 시장에 전달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정부는 5G 장비 선정문제를 놓고 미국의 눈치를 보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당연한 사대다. 하지만 눈치만 봐서는 안 된다. 사대는 실리를 전제로 해야 한다. 생존과 이익으로 맞바꿔질 때 섬김과 조공을 통한 사대가 의미를 갖는다.
서희는 거란을 사대해주고 강동6주를 얻었다. 서희에겐 소손녕이 이끌고 온 8만 대군의 목적이 고려를 취하는 게 아니란 점을 간파한 통찰이 있었다. 무릎 꿇으란 거란 장수의 요구를 두 번이나 거절하는 배짱도 있었다. 고려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는 애국심이 바탕이란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미국이 보안문제를 들고 나온 건 비단 화웨이 장비를 쓰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미·중 패권전쟁에서 미국의 대열에 합류했다는 뚜렷한 증거를 보이라는 뜻이다. 중국과 편 먹지 말라는 것이다.
정부는 미국에 사대의 대가를 요구해야 한다. 미국은 중국의 보복을 어떻게 보상할지, 미국의 관세장벽을 어떻게 낮춰줄지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아니면 업계에 화웨이 장비를 배제하란 암묵적 가이드라인을 줘서는 안 된다. 시장원리대로 선정해도 정치적 보복이 없다는 점을 명시해야 한다. 서희가 위대한 건 강동6주를 얻고 백성을 살렸기 때문이다. 서희는 소손녕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유영민 장관은 사대의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어떤 실리를 얻었는지, 업계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말해보라. 무엇보다 그것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걸었는지 곱씹어 보라. 황창규 회장과 박정호 사장, 하현회 부회장이 유영민 장관을 사대하는 건 실리에 대한 기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