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시장 중앙은행들이 달러 강세에 맞서 본격적인 환율 방어에 나섰다. 대개 그동안 쌓아둔 외환보유액을 반격의 무기로 삼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9일(현지시간) 신흥시장이 현지 통화 가치를 높이기 위한 반격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이들의 외환보유액 늘리기는 지난 1년간 이어졌다. 낙관적인 세계 경제 전망 아래 신흥시장의 고금리 자산에 몰린 글로벌 자금이 밑천이 됐다.
흐름이 역전된 건 6월부터다. 달러 강세, 미국발 무역전쟁을 둘러싼 우려가 고조되면서 신흥시장에서 자금이 썰물을 이뤘다. 이 여파로 적잖은 신흥국이 주식, 채권, 통화 가치가 동반 하락하는 '트리플 약세'로 애를 먹었다.
신흥시장 중앙은행들은 6월에만 570억 달러의 외환보유액을 썼다. 월간 기준으로 2016년 말 이후 최대 규모다.
외환보유액은 중앙은행의 대표적인 환율 개입 수단이다. 통화 가치가 떨어지면 외환보유액의 달러를 풀어 반전을 꾀하는 식이다. 신흥국들은 과거 외환위기를 겪으며 외환보유액 부족으로 홍역을 치렀다. 달러 빚에 짓눌리고 통화 약세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통제하는 데 애를 먹었다. 신흥시장 중앙은행들이 지난 수년간 외환보유액을 늘리는 데 집중한 이유다.
신흥시장의 외환보유액은 약 6조 달러로 2015년 이후 줄곧 사상 최대 수준에 있다.
주요 신흥국 통화 가치를 반영하는 MSCI신흥시장 통화지수는 올 들어 3% 떨어졌다. 특히 아르헨티나 페소, 터키 리라, 브라질 헤알, 중국 위안화가 큰 타격을 입어 통화당국의 대응을 재촉했다.
위안화가 최근 기록적인 약세를 띠면서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은 2015~2016년 위안화 폭락사태 때와 같은 시장 개입에 나서야 한다는 압력에 직면했다. 최근 위안화 환율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겠다고 약속한 이유다. 중국 국유은행 가운데 적어도 한 곳 이상이 이미 위안화 매입에 나섰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이 덕분인지, 지난달 달러에 대해 3.2% 급락한 위안화의 지난주 낙폭은 0.3%에 그쳤다.
전문가들은 인민은행이 2015년 위안화 급락세를 막을 때 외환보유액이 핵심 역할을 한 것으로 본다. 인민은행은 당시 외환보유액 약 1조 달러를 동원하는 동시에 개인과 기업의 해외 자금 반출을 막았다.
중국은 여전히 세계 최대인 3조1100억 달러(6월 현재)의 외환보유액을 쥐고 있다.
브라질과 인도 중앙은행은 올해 외환보유액에서 각각 440억 달러, 170억 달러를 환율 방어에 사용했다. 문제는 효과가 부진하다는 점이다. 달러 대비 헤알화 값은 올 들어 지난 주말까지 14% 떨어지고, 인도 루피화는 7.1% 하락했다.
벤 스테일 미국 외교협회(CFR) 선임 연구원은 "외환보유액 매각 효과는 대개 오래 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중앙은행들이 자국 통화 가치를 띄우기 위해 달러를 팔아 자국 통화를 매입할 수 있지만, 충분한 달러 보유액이 있는 범위에서만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더 극단적인 사례는 아르헨티나다. 달러 대비 페소화 가치는 이달 들어 4% 반등했지만, 올해 전체로는 34% 추락했다.
이 나라는 지난 4~5월에 안 그래도 넉넉지 않은 외환보유액에서 100억 달러를 동원해 환율 방어에 나섰지만 페소화 급락세를 막지 못했다. 급기야 지난달에는 국제통화기금(IMF)이 50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지원하기로 했다.
외환보유액이 많든 적든, 신흥시장 중앙은행들이 계속 환율 방어에 나설지 여부는 달러 값 향방에 달렸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신흥국 통화를 비롯한 주요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반영하는 WSJ달러인덱스는 올 2분기에 5% 올랐다. 분기 기준으로 달러 값이 오른 건 1년여 만에 처음이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인상 의지는 달러 강세를 뒷받침하지만, 일각에서는 무역전쟁을 둘러싼 불확실성과 무역전쟁 역풍에 따른 미국의 성장둔화 우려가 달러 강세에 제동을 걸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