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준 칼럼] 역사의 교훈: 1930년 스무트-홀리 관세법

2018-06-29 05:00
  • 글자크기 설정

윤여준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구미팀장



최근 미국의 보호무역조치로 인해 최악의 무역법으로 일컬어지는 1930년 미국의 스무트-할리 관세법이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발의를 담당한 오레건주의 공화당 하원의원 윌리스 홀리 (Willis Hawely)와 유타주의 공화당 상원의원 리드 스무트 (Reed Smoot)의 이름을 딴 이 법안은 9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보호무역주의를 상징하는 수식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시기적으로 보면 스무트-홀리 관세법 제정 이후 미국을 위시한 세계 경제는 전례 없는 대공황에 빠져들게 되고 암흑과도 같은 1930년대를 보내게 된다. 따라서 많은 이들은 이러한 스무트-홀리 관세의 후폭풍을 인용 현재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한다.

하지만 스무트-홀리 관세가 대공황을 초래했다고 보는 시각은 옳지 않다. 먼저 대공황의 시발점이 된 주가 대폭락 혹은 ‘검은 화요일’은 스무트-홀리 관세가 제정되기 이전인 1929년 10월에 발생하였다. 물론 당시에도 법안에 대한 논의가 의회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러한 사실을 대중 역시 인지하고 있었으나 주가 대폭락이 관세의 직접적인 영향을 가장 적게 받는 공공재 부분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스무트-홀리 관세와 주가 대폭락 간의 무관함을 뒷받침 해준다.

또한 스무트-홀리 관세 자체가 미국 경제 전체에 미친 영향 역시 그리 크지 않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스무트-홀리 관세는 총 3295개에 달하는 관세부과대상 품목 중 890개에 대한 관세를 증가시켰고 235개 품목에 대해서는 오히려 감소시켰다. 나머지 2170개 품목에 대한 관세는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따져 봤을 때 1930년 관세가 책정된 직후 관세부과 품목을 기준으로 한 평균관세율은 41.4%로 직전 35.7%에서 단 6% 포인트 증가하였다. 물론 이 후 강한 디플레이션 압력, 여기에 상당 부분의 관세가 종량관세 (specific tariff) 였다는 사실이 더해져 평균관세율이 1931년에는 53%, 1932년에는 59.1%까지 치솟았으나 법안 제정 초기 추가적인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 좀 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미국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이미 상당히 극단적인 보호무역주의를 펼치고 있었다. 당시 자유무역주의 노선을 견지한 영국과 달리 미국은 자국 산업 보호를 목적으로 수입품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였다. 19세기 후반 이미 관세부과 대상 품목의 평균 관세율은 40%를 상회하여 스무트-홀리의 초기 관세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또한 당시 미국 GDP에서 관세부과 대상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1.4% 밖에 되지 않는 점을 감안하면 스무트-홀리 관세가 실질 GDP의 25% 폭락을 불러온 대공황의 주된 원인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한편, 1929년에서 1932년 사이 미국의 수출입은 액수기준 무려 70% 가량 감소, 큰 폭의 무역 침체가 동반되었다. 다트머스 대학의 경제사학자인 더글라스 어윈은 수출입 폭락의 주된 원인은 대공황이 불러온 실질 GDP 감소이며 스무트-홀리 관세에 의한 부분은 크지 않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에 의하면 스무트-홀리 관세로 인해 단 7% 정도의 수입이 감소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스무트-홀리 관세가 대공황의 주된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세계무역 침체에 큰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스무트-홀리 관세는 상대국들의 대규모 보복조치를 양산했는데 캐나다, 멕시코,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쿠바 등이 즉각적인 보복을 단행하였다. 이 중 미국의 가장 큰 교역 상대인 캐나다는 미국산 농산물 및 철강 제품 등 수출에 1/3을 차지하는 규모의 상품에 보복 관세를 부과하였다. 경제학자 제이콥 매드센은 1929년에서 1933년 사이 세계 무역량은 약 26% 가량 감소했는데 이중 절반은 스무트-홀리 관세가 촉발한 주요국들의 관세 및 비관세 장벽에 기인한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하였다.

더욱 주목해야 할 사실은 글로벌 통상 환경이 강한 지역주의 색채를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비차별적 자유무역주의 노선을 걸어온 영국은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전 식민지들과 규합하여 상호간 관세혜택을 부여하는 제국주의적 관세동맹을 결성하였다. 독일 역시 동유럽 국가들과 유사한 특혜무역협정 (PTA)를 맺고 역외 국가들에게는 수입허가제 (import licensing)를 도입하였다. 문제는 이렇듯 전 세계적으로 정착된 지역주의 및 보호무역주의는 193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어 경기회복에 걸림돌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한편 미국에 높은 수출 의존도를 갖고 있던 중남미 국가들은 직접적인 경제적 타격을 입기도 했다. 특히 스무트-홀리 관세로 인해 설탕에 대한 관세가 대폭 상승했으며 이는 대미국 설탕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쿠바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결국 이는 1933년 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친미정권이 물러나는 계기로 작용하였으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쿠바의 반미 성향의 시발점이 되었다.

많은 이들이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스무트-홀리 관세가 대공황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여전히 현재 상황에 시사하는 바는 크다. 스무트-홀리 관세법은 당시 대공황과 맞물려 수많은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고 문제점을 인식한 루즈벨트 대통령과 의회는 1934년 호혜통상협정법 (Reciprocal Trade Agreement Act)을 통과시킨다. 이에 따라 관세 책정에 대한 권한이 의회에서 행정부로 옮겨지게 되었고 무역장벽 감소를 위한 길이 열렸으나 전 세계적으로 정착된 보호무역기조를 단기간에 돌려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기간 동안 세워진 각국의 무역장벽은 계속 유지되었고 세계 무역량 역시 대공황으로부터의 회복이 상당히 이루어진 1930년대 후반까지 예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이렇듯 스무트-홀리 관세는 보호무역주의의 비가역적인 성향을 잘 보여준다. 이를 비추어봤을 때 향후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할 경우에도 일단 정착된 현 기조는 예상 외로 그 모멘텀이 지속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또한 1930년대 당시 미국의 주요 교역국이었던 영국, 독일 등이 주변국, 동맹국들과 그들만의 특혜협정을 맺어 각자도생을 시도한 것과 유사하게 현재에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이 탈퇴한 TPP의 나머지 회원국들이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동반자협정 (CPTPP)을 맺은 것이 그러하며, EU 역시 일본과 포괄적 FTA 체결에 합의했고 멕시코, 칠레, 호주, 뉴질랜드 등과 개선 및 신규협상을 진행 중에 있다. 앞으로도 미국이 배제된 ‘나머지들’의 협력 모색 양상은 계속될 가능성이 크며 한국 역시 이러한 글로벌 통상환경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