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총수 일가가 계열사 간 합병에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하는 법안이 나온다. 법안이 통과될 경우, 총수 일가의 '계열사 합병'을 고리로 한 경영권 승계 작업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된다.
25일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박용진 의원은 '총수 일가의 계열사 합병에 대한 의결권 제한'을 골자로 하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공정거래법 개정안)을 금주 내에 발의할 예정이다.
이는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과 지난 5월 철회된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 간 분할·합병안의 합병비율이 총수 일가에 유리하게 적용·책정되면서 총수 일가의 지배력 강화 수단으로 악용됐다는 비판에 따라 나온 안이다.
박 의원실 관계자는 "총수 일가가 보유한 국내 계열사 주식 의결권 가운데 계열사 분할이나 분할·합병 등에 관한 의결권 행사를 제한해 경제력 집중 현상을 완화하고 소액주주의 권익을 두텁게 보호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우선 의결권 제한 대상을 공정거래법상 공시대상 기업집단의 동일인과 해당 동일인의 (가족 등) 특수관계인이 취득·소유하는 국내 계열사 주식으로 한정했다. 공정거래법상 동일인은 특정 기업집단을 사실상 지배하는 자연인(총수)이나 법인을 의미한다.
의결권 제한 사항은 구체적으로 계열사와의 △합병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중요한 영업의 양수 또는 양도 △주식의 포괄적 교환 또는 포괄적 이전 △분할 또는 합병이다.
아울러 △동일인 또는 해당 동일인의 특수관계인을 임원으로 선임하는 행위 △동일인 또는 해당 동일인의 특수관계인인 이사의 보수 등도 포함됐다.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자회사를 설립해 일감을 몰아준 뒤 분할·합병하는 일부 재벌의 '경영권 승계공식'에 균열이 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차등 의결권 제도'처럼 그동안 재계가 줄기차게 요구해온 경영권 방어장치가 사실상 무의미해진다. 차등의결권 제도는 1주 1의결권 원칙의 예외를 두고 일반 주식보다 의결권을 높인 주식을 발행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전문가들은 경영 전반이 아닌 총수 일가의 사익추구가 가능한 이해상충 사안에 대해선 비지배주주의 견제 장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총수 일가의 일탈을 막기 위한 의결권 제한은 주주의 권리를 침해하기보다는 오히려 보호한다는 의미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이미 이스라엘은 총수 일가의 임원 보수에 대해 비지배주주들의 동의를 받는 MoM(Majority of Minority Rule) 규칙을 적용한다"며 "미국과 인도, 중국도 각 나라 상황에 맞는 제도를 운영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이어 "개정안이 통과되면 변화가 분명하기 때문에 반발이 예상된다"며 "공정위의 개정안에 대한 반응과 실제 통과 여부가 여태껏 말에 그쳤던 문재인 정부 기업지배구조 개선 의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재계에서는 총수 일가가 기업집단의 가장 큰 이해당사자인 만큼, 의결권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건 원칙에 맞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기업 간 자유로운 합병이나 계열사 편입, 시장의 진입·퇴출을 가로막아 기업의 도전정신을 꺾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유정주 전국경제인연합회 기업혁신팀장은 "기업이 망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게 대주주"라며 "가게를 옆집 가게와 합치든, 무슨 사업을 하든 가게 주인이 결정하는 거지 종업원이나 손님이 결정하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