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발산리. 시골집의 좁다란 마당에서 한 소년이 고통에 몸을 뒤틀고 있었다. 희순이 어렵사리 얻은 늦둥이 맏아들 유돈상이었다. 회초리로 17세 소년을 매질하고 있는 사람들은 일제 경찰이었다. 유홍석이 의병 활동을 주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의 집으로 들이닥친 것이다.
경찰들이 시아버지의 행방을 캐물어도 희순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옆에 있던 소년을 나꿔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17세 소년의 입에서 비명이 터지고 찢어지는 옷에 피가 배어들었다.
“이제 유홍석이 어디로 갔는지 말하라. 네 아이를 죽이겠다.”
그러자 희순이 나직이 말했다.
“죽일 테면 죽여라. 아이도 죽이고 나도 죽여라. 너 같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네 아비를 팔아 네 자식의 목숨을 살리겠는가. 그게 짐승이지 어디 사람이겠느냐.”
여인의 당찬 태도에 경찰들은 자기들끼리 쑥덕쑥덕 하더니 쓰러진 소년을 내려놓고 물러갔다. 이후 희순은 짐을 싸서 중국 요령성으로 향한다.
# 유씨 집안 45가구가 중국 요령성으로 집단 이동
그 해 춘천에서는 유씨 집안 하나가 사라져 버렸다. 의병장 유인석과 유홍석을 중심으로 친척, 처가 45가구가 집단이주를 한 것이다. 그들이 정착한 곳은 요령성 흥경현평정산 고려구였다.
‘고려구’라는 이름이 붙은 만큼 주변에 조선인이 많았다. 주민들은 조선에서 하는 방식대로 황무지를 개간하고 강물을 끌어들여 벼농사를 지었다. 밀, 콩, 옥수수 농사를 주로 하던 한족은 조선인에게 새로운 농법을 배웠다.
윤희순은 조선에서 날아드는 편지를 읽을 줄 아는 동포가 드물다는 점을 안타까이 여겨 1912년 환인현에 노학당(老學堂)을 설립했다. 중국에서 1994년부터 윤희순을 연구하고 있는 김양 교수(만주항일투쟁사 연구)는 노학당을 세운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곳(환인현 남괴마자 마을)은 유인석·유홍석 선생의 부대가 의병활동을 하던 곳으로, 학교를 세워 항일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 윤희순이 중국에 세운 학교, 노학당을 일제가 폐교
윤희순이 교장인 이 학교에는 독립투사들이 세운 동창학교 선생들이 와서 국어·산수·역사를 가르쳤다. 50여 명의 항일운동가를 배출했으나 3년 뒤 일제에 의해 폐교됐다. 노학당 자리에는 옥수수밭이 들어섰다. 노학당 시절 희순은 정신적 지주를 잃는다. 1913년 12월 시아버지 유홍석이 72세를 일기로 돌아간 것이다.
학교를 잃은 뒤 1915년 희순은 탄광촌인 무순시 포가둔으로 이사를 갔다. 여기에서 그녀는 중국인들에게 항일투쟁을 연대하자고 꾸준히 설득했다. 그녀의 제안으로 실제로 항일운동에 가담한 중국인이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1915년은 희순에게 상실의 해였다. 남편 유제원과 재종 시숙이자 집안의 버팀목인 유인석 의병장이 잇따라 타계했기 때문이다. 이런 죽음 속에서 55세의 윤희순은 더욱 강해졌다.
# 가족부대 '조선독립단', 양세봉의 조선혁명군과 연합작전
1920년 만주에서 김좌진·홍범도 장군에게 대패한 일본군이 간도의 조선인을 무차별 살상하는 간도참변이 일어났다. 이때 희순은 위축된 독립운동을 되살리기 위해 그녀의 아들들과 함께 한·중 애국지사 180명을 찾아다니면서 규합 활동을 벌인 끝에 ‘조선독립단’을 결성했다.
조선독립단 단장은 윤희순, 유돈상, 음성국(유돈상의 장인)이었다. 조선독립단에는 이들의 가족, 친척이 모두 참여했다. 이른바 ‘윤희순 가족부대’(당시 주위 사람들은 이들을 이렇게 불렀다)로,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사격연습을 하며 게릴라 활동을 펼치는 투쟁 패밀리였다. 큰아들 유돈상, 둘째 아들 유교상, 조카 유휘상, 며느리 원주 한씨가 주전 멤버였다. 교상은 어린 시절 문서를 전하려고 말을 타고 달리다 떨어져 다리를 절었지만 그에 아랑곳않고 전투에 참가했다. 돈상의 아들은 굴렁쇠를 굴리고 다니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독립운동 연락책 노릇을 했다고 한다. 또 돈상은 ‘조선독립단 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1932년 조선독립단에 중요한 기회가 찾아왔다.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과 연합작전을 펼치기로 한 것이다. 9월 15일 무순을 지나는 일본군 철도 운수선을 습격하는 일이었다. 윤희순은 말이 먹을 풀과 군인 식사를 제공하는 일 그리고 부상자를 치료하는 일을 맡았다. 유돈상은 직접 전투에 참가했다. 이때 희순의 나이 72세였다. 이상국 (아주T&P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