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여자의병장 윤희순②]미친 사람 소리 들으며 만든 '안사람 의병가

2018-03-12 17:14
  • 글자크기 설정

노래의 힘은 강했다, 동네사람들이 따라 부르며 일본에 대한 분노 키워

# 굶주린 의병들을 위해 서슴없이 밥을 먹인 뒤...

“나라가 없으면 어찌 애국이 있겠습니까?”
“허어, 혈육을 팽개치고 어찌 미래가 있겠느냐?”
시아버지의 추상같은 말에 희순은 마음속으로 끓어오르는 의기(義氣)를 접었다. 55세의 열혈남 시아버지가 동구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36세의 며느리는 오래 지켜보았다. 그녀는 뒷산에 단(壇)을 모시고 의병들의 승리와 안녕을 비는 수밖에 없었다.

희순의 집안은 절간처럼 고요했다. 시어머니는 결혼 전에 이미 돌아가셨고, 시아버지와 남편은 일년에 열 달은 나가 있는지라 색시 혼자서 살림을 꾸려가는 상황이었다. 오래 함께한 하인 내외가 간간이 돌봐주기는 했으나 생계조차 어려웠다. 그녀는 숯을 구워 팔며 살림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

시아버지가 출타한 어느 날 마을에 의병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몹시 굶주린지라 마을 사람들에게 밥을 해 달라고 청했다. 당시엔 의병을 돕는 일도 중죄(重罪)였기에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희순이 뛰어나갔다. 쌀이 없어 제사를 받들기 위해 숨겨놓은 쌀 세 됫박을 털어서 밥을 지었다. 전장(戰場)의 시아버지를 봉양하는 마음으로 상을 차려 그들에게 올렸다.

# '의병가' 노래를 지어 부르니 실성한 사람 같사옵고...

의병들이 떠나고 난 뒤 희순은 방에 앉아 붓을 들었다. 그때 쓴 글이 일제와 그 앞잡이에 대한 경고문들이다. 거침없는 욕설과 비어를 사용해서 그들을 비판하고 있다.

정금철 교수(강원대 국문학)는 “주저하지도 않았고, 감추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선택과 책임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강직한 성품이 느껴지는 글”이라고 평가했다. 그녀는 <의병가> 노래 가사를 지은 뒤 <아리랑> 곡에 얹어서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행동을 보던 사람이 집안의 어른께 편지를 보냈다.

“저녁이고 낮이고 밤낮 없이 소리(노래)를 하는데, 부르는 소리가 왜놈들이 들으면 죽을 소리만 하니 걱정이로소이다. 실성한 사람 같사옵고…… 요즘은 윤희순이 누구냐고 묻는 사람이 있으니 조심하라 일러 주옵소서.”(1896년, 황골댁 편지 중에서)

희순은 마을 여인들에게 안사람도 의병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래를 지어 부르며 의병대를 조직하자고 말했다.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집안 남자들이 의병을 한다고 모두 나가 버리니 며느리가 드디어 미쳤어.”

그렇게들 수군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동네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안사람 의병가>는 그렇게 하나 둘씩 따라 부르기 시작해서 인근 동네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행가’가 되었다.

# 어느 새 유행가가 되어버린 '안사람 의병가'

10년간의 노력 끝에 마을에서 여자 의병대가 조직되었다. 정미의병이 창의하던 무렵이었다. 노래의 힘을 깨달은 시아버지 유홍석도 춘천 의병들이 관군의 회유책에 넘어가는 상황이 되자, <고병정가사(告兵丁歌辭·병사들에게 고함)>라는 노래를 지어 그들의 마음을 붙잡기도 했다.
 

[사진 = 2018년 1월 국회의원회관에서 진행된 '3.1운동과 여성' 범국민 발대식에서 의병장 윤희순 연극을 시연하는 춘천고 학생들. ]
 

춘천의 여성들은 상당수가 ‘숨은 의병’이기도 했다. 수천 명이 모여 의병이 쓸 탄약을 만들었다고 한다. 놋쇠를 모으고, 부족한 유황을 대신해 소변을 달여 화약을 제조했다. 그들이 만든 무기로 이 지역 의병들은 상당한 전력을 갖추고 일제에 타격을 입혔다.

국력의 열세는 의분(義憤)만으로 만회할 수 없었다. 1910년 올 것이 왔다.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한 뒤 의병 노장(老將) 유홍석은 치욕과 절망감으로 벽장에 있던 칼을 꺼냈다.

아들들과 며느리를 불렀다.

“내 이제껏 나라를 구하려고 몸부림을 쳤으나 국운이 기울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땅의 의기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니, 너희는 나의 이 마음을 거울 삼아 강토를 되찾는 데 열정을 기울이거라. 나의 자결이 너희에게 슬픔이 되지 않고, 뜻을 바로 세우는 힘이 되기를 바란다.”

# 경술국치, 시아버지의 자결을 말린 며느리

한참 침묵이 흘렀다. 가만히 듣던 며느리 희순이 말한다.

“아버님의 뜻은 참으로 귀하고 뭇사람이 경배할 것이옵니다. 하지만 살아서 싸워도 힘이 모자라는 판국이고, 죽음을 보여준다 하여도 적들이나 이 땅의 사람들에게 무슨 놀라움이 되겠습니까. 차라리 굳세게 살아내서 목숨을 걸고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더 마땅하지 않을까 합니다. 아버님, 칼을 거두시고 저희와 함께 뒷일을 도모하소서.”

며느리의 말을 들은 뒤 그는 천천히 일어나서 마당으로 걸어갔다. 정미의병 때 다리를 심하게 다쳐 절뚝거리는 그는 마을 아래로 펼쳐진 길을 한참 내려다보며 눈물을 삼켰다. 며느리의 말이 구구절절 옳지 않은가. 이날 이후 유홍석과 유제원 부자는 만주로 떠났다. 희순은 나중에 합류하기로 했다.             이상국 아주T&P 대표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