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현은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에 설치된 감옥에서 그해 봄과 여름을 보냈다. 잔혹한 고문에 시달렸고 집요한 추궁을 받았다. 당시 신문들은 한동안 무등전권대사 암살 미수 사건을 보도하지 못했다. 일제가 통제를 했기 때문이다. 상당 기간이 지나서야 엠바고가 풀려 남자현의 의거 행동이 세상에 알려졌다.
8월 6일 그녀는 곡기를 끊기 시작했다. 일제가 식사를 넣자 이렇게 소리쳤다.
“이제 너희가 주는 밥은 먹지 않는다. 너희가 감히 나를 살리고 있으니 내가 스스로 죽어 너희들을 이겨야겠다. 조선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죽음은 끝이 아니요 이제 시작일 뿐이다. 너희는 사는 것이 곧 죽는 것이요, 나는 죽는 것이 곧 사는 것이다.”
친손자 김시련은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김씨는 당시 부친 김성삼과 함께 만주 교하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신의주에서 일을 하고 계셨는데 갑자기 집에 빨리 가고픈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래서 와보니 일경으로부터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가 10여 통 와 있었어요. 그 길로 아버지는 만주 적십자병원을 향해 집을 나섰어요. 그때 나는 아버지와 함께 가겠다고 떼를 썼지요. 어쩌면 할머니를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 249원80전의 유언, 손주들을 교육시켜라
부자가 도착했을 때 남자현은 숨을 거두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것처럼 보였다. 아들과 손자를 보자 두 눈가에서 굵은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그녀는 “이제는 됐다”라고 조용히 말했다.
“나를 조선인이 하는 그 여관으로 옮겨다오.”
남자현은 하얼빈 지단가(地段街)에 있는 조씨가 운영하는 곳에서 쉬고싶다고 했다. 아마도 일제의 감시를 의식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통스런 몸을 이끌고 장소를 옮긴 그날 저녁, 여관에는 독립운동 동료들이 북적였다. 여러 집단의 사람들이 저마다 찾아와 눈물을 흘리다가 돌아갔다. 사람들이 떠나가자 그녀는 아들과 손자를 가만히 불렀다. 감춰둔 행낭을 꺼내오라 하고 거기서 249원 80전을 꺼냈다.
“이 돈 중에서 200원은 조선이 독립되는 날 정부에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라. 그리고 손자 시련을 대학까지 공부시켜서 내 뜻을 알게 하여라. 남은 돈 49원 80전의 절반은 손자 공부시키는데 쓰고 나머지는 친정에 있는 손자를 찾아 교육시켜라.” 그녀의 최후를 기록한 신문에는 다음과 같이 보도됐다.
“이미 죽기를 각오한 바이니까...” 단지(斷指)한 손을 내놓으면서 “이것이나 찾아야지”하고는 기운이 없어 더 말하지 못하고 혼수상태에 들어갔다.
# 감옥서 풀려난지 닷새만에 영면
남자현의 마지막 말은 몇 가지가 더 있다.
“사람이 죽고사는 것이 먹고 안먹고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에 있다.”(손자 김시련의 증언)
이 말은 먼저 나온 말이 아니라 가족들 중에서 “지금이라도 식사를 하셔서 원기를 회복하는 것이 어떠냐”는 하소연에 대한 대답으로 보인다. 그녀가 선택한 단식이 ‘정신을 살리는 길’이었음을 천명한 것이리라.
그녀는 또 “자는데 깨우지 마라”는 말도 남겼다. 죽음에 초연해진 내면을 엿보게 하는 숙연한 일언이다. 이튿날 점심 때까지 잠자던 남자현은 결국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혼수상태로 풀려난지 닷새 만이었다.
이상국 (아주T&P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