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맹 조사단이 머무른 하얼빈 마디얼호텔. 일제는 집집마다 바깥에는 만주국 국기를 걸게 하고 안에는 황제 푸이의 사진을 걸게 하여 하얼빈 시민이 만주국을 환영하고 있는 분위기를 내려고 애썼다. 이에 반발하는 '혐의분자'들은 가차없이 체포하여 송화강 건너에 있는 송포집중영에 가뒀다. 조사단이 하얼빈에 머무르는 동안 중국인 5명, 러시아인 2명, 조선인 1명(김곡)이 조사단에게 탄원 편지를 넘기려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총살을 당했다고 한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남자현은 혈서와 손가락을 전달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결국 그녀는 직접 전달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인력거꾼 한 명을 포섭했다. 그는 마디얼호텔에 드나드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 사람에게 대양1원을 주고 동여맨 작은 보자기를 조사단에게 전해달라고 맡긴다.
이때 남자현은 보자기 속에 대한 여성들의 독립운동 현황에 대한 보고서도 함께 넣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호텔로 들어간 인력거꾼을 그녀는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이게 뭐요?”
인력거꾼은 제풀에 새파랗게 질렸다.
“누가 대양1원을 주고 배달을 좀 해달라고 해서...”
경찰은 보자기를 풀었다. 안으로 피묻은 두루마리 한지 속에서 손가락 두 마디가 굳은 채 뚜르르 흘러내렸다.
“으헉! 이게 뭐야? 이 자를 체포해!”
“저는 그냥 심부름만...”
애원의 소리를 내는 사내의 얼굴에 구둣발이 날아갔다. 인력거는 자빠지고 경찰들은 호각을 불며 비상 상황을 알렸다.
“조선 여자, 남자현을 찾아!”
호텔 내부의 상황이 심각해질 가능성을 예견하고 있던 그녀는 동지들과 함께 그 일대를 벗어나 긴급 피신을 한다. 무명지는 호텔 뜨락에 내던져졌다. 인력거꾼은 당시 총살 당한 중국인 중의 한 명이었을 것이다. 당시 조선중앙일보는 이날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갔음을 전하고 있다.
# 국제연맹 조사단에게 혈서가 전달됐다면...
만약에 남자현의 혈서와 무명지가 리턴 조사단에게 전달되었다면,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당시 국제사회에 중요한 파문을 던졌을 수도 있지만, 그럴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는 냉정한 지적도 있다.
조사단은 일본의 요구에 의해 중국과 일본 양쪽에 대해 중립적인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상당한 기간에 걸쳐 면밀히 조사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일본의 침략에 대한 적극적인 문제의식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의 보고서에는 중국과 만주의 실정, 중-일간의 분쟁, 만주사변의 경과를 비교적 치밀하게 기록하고, 만주사변을 일본의 침략행위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만주에서 일본이 일정한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기도 했다. 만주국은 인정할 수 없으며 중국이 자치권을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면서도 만주 내에서 중국과 일본이 경제협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타협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만주국의 부당성에 대한 태도만큼은 단호했다.
일본은 이 리포트에 반대하여 11월18일 의견서를 제출한다. 국제연맹은 리턴조사단 보고서를 42대1로 채택한다. 일본은 회의장에서 퇴장했고, 이듬해 국제연맹에서 탈퇴해버린다. 당시 국제적인 조정 기구였던 국제연맹은, 강국인 일본을 통제할 수도 없었고 강력하게 비판할 수도 없었다.
# 실낱같은 희망을 움켜쥔 한 여인의 독립열망
남자현은 이 기구가 조선을 구할 실낱같은 희망으로 보였지만, 그들은 제국주의적인 실익을 염두에 두는 강대국 연맹일 뿐이었다. 무명지가 소리높이 외치고자 했던 발언은, 아름답고 귀한 메시지였음에 틀림없지만, 당시 세계에 조선의 사연을 전파할 메신저에게 연결할 만한 ‘힘’도 없었고 죽을 고비를 넘겨 ‘접속’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약자의 편을 들었을지는 미지수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남자현의 손가락에서 흘러내린 뜨거운 의기(義氣)는 기억되고 우리에게 지속적인 의미로 새겨져야 한다. 환갑을 바라보는 여인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하얼빈에서 제 손가락을 칼로 내려치는 그 장면을 잊어서는 안된다. 국제사회에서 약한 나라가 겪을 수 밖에 없었던 고통과 슬픔을 함께 기억하여, ‘남자현다움’을 이 시대의 담대한 저력으로 확장시켜나가야 하지 않을까. 이상국 아주T&P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