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미국대사에 내정된 것으로 알려진 빅터 차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 석좌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차였다'.
지난 31일 낙마한 것으로 사실상 확인되면서 한·미외교 소통 채널의 '핵심'인 주한 미국대사 자리가 공석 1년을 넘기게 됐다. 서울은 물론 워싱턴 정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차기 대사로 꼽혔던 차 석좌 낙마와 관련해 가장 큰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다섯 가지 핵심 쟁점을 짚었다.
◆빅터 차는 누구···한반도·아시아 지역 전문가
차 석좌는 한국전쟁 후 미국으로 이주한 부모 사이에서 1959년 출생한 한국계 2세 미국인이다. 그는 컬럼비아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철학·정치·경제학 석사,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조지타운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던 그는 2004년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 백악관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 담당 보좌관, 북핵 6자회담의 미국측 차석대표로 활동했다.
2007년 4월 초에는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주 주지사와 함께 방북해 북핵 해법을 논의하기도 한 자타 공인 미국 공화당 계열, 보수파의 한반도 최고 전문가다.
현재 그는 조지타운대 정치학과와 국제관계대학원 교수로 있으며 워싱턴 소재의 싱크탱크인 CSIS 한국 석좌로 활동 중이다.
'매파 개입론자'로 알려진 차 석좌는 한·미·일 삼각 안보 체제를 다룬 '적대적 제휴'(Alignment despite antagonism), 북핵 해법을 다룬 '북핵 퍼즐'(Nuclear North Korea) 등의 저서도 펴냈다.
◆낙마 원인에 대북정책 견해차 '유력'
한 달 전 한국 정부로부터 아그레망까지 받은 차 석좌는 북핵에 대한 대처 등을 둘러싼 백악관과의 이견 탓에 결국 낙마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이 사안에 밝은 소식통을 인용해 "차 석좌가 백악관의 대북 군사 방안에 대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관리들에게 우려를 제기했다"며 낙마 이유를 들었다.
차 석좌와 백악관의 의견이 갈린 건 백악관의 대북 군사 옵션 중 하나인 이른바 '코피(Bloody nose) 작전' 때문이다. 이 작전은 제한적인 선제공격을 통해 북한에 경고 메시지를 보내겠다는 구상이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도 차 석좌의 낙마는 대북 군사 공격에 대한 백악관과의 견해차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NSC 담당자들은 최근 차 석좌에게 한국 거주 미국인들 대피 계획에 관해 질의했는데, 차 석좌는 대북 군사 옵션에 대해 회의적 반응을 보였고, 이러한 입장이 낙마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차 석좌는 ‘대북 강경파’로 분류되는 인물이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더 강한 강경파를 원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낙마의 이유로 차 석좌 부부의 과거 한국 내 사업 이력도 거론되고 있지만, 이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주재국 임명동의 절차인 아그레망, 정치적 의미는
주한 미국대사는 보통 아그레망을 받은 뒤 미국 정부의 공식 지명과 상원의 인준 절차를 거쳐 부임한다.
미 정부는 지난해 12월 중순 약 6개월간의 오랜 논의 끝에 차 석좌에 대한 아그레망을 한국 정부에 신청한 바 있다. 우리 정부는 신속하게 절차를 진행해 12월 말 아그레망을 승인했고 백악관의 공식 지명 발표만 남은 상태였다.
아그레망은 타국의 외교사절을 승인하는 외교 절차로, 양국 간의 1차 검증 시스템으로도 불린다.
사절의 임명 그 자체는 파견국의 권한에 속하나 외교사절을 받아들이는 접수국은 개인적 이유를 내세워 받지 않을 수 있다.
접수국이 아그레망 부여를 거부할 경우, 파견국에 그 이유를 통지할 의무는 없으나 정당한 이유 없이 거부할 경우 양국 우의에 악영향이 발생할 수 있다.
이처럼 아그레망이 끝난 상황에서 파견국이 대사 임명을 취소하는 건 매우 이례적인 상황으로 꼽힌다. 내부 인사이니만큼 최종 결정권은 파견국에게 있다고 해도 관례상으로는 보기 어려운 광경이다.
WP는 "아그레망 절차까지 완료된 상황에서 지명이 철회된 이례적인 조치는 트럼프 행정부가 대북 공격을 얼마나 심각하게 검토해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어서 "대북 선제공격에 대한 해법을 둘러싼 입장차로 차 전 내정자가 지명 철회됐다는 사실은 대북 공격에 준비돼 있지 않은 인사는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주한 미 대사로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암시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분석했다.
◆정부·청와대, 공식적인 입장 표명 자제···“미국 정부가 설명할 사안”
예상을 벗어난 차 석좌의 낙마에 대해 한·미 양국 외교가는 살얼음판을 걷는 분위기다.
차 석좌의 낙마가 한국 정부의 아그레망 절차가 끝난 이후에 일어났는데도 트럼프 정부가 한국에 사전 통보를 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외교부는 차 석좌 낙마와 관련해 미국 정부가 우리 정부에 양해를 구해왔다며 소통 논란을 불식시키려 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1일 "미국 정부가 평창올림픽 전에 주한 미국대사를 보내려고 노력을 해왔는데 결과적으로 어렵게 됐다"며 "우리 정부에 설명하기도 전에 먼저 (차 석좌 낙마에 대한 내외신) 언론 보도가 나온 상황 자체에 대해 양해를 해달라는 요청을 이날 외교채널을 통해 보내왔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미국 정부가 차 석좌를 공식 지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지명 철회 보도는 맞지 않는 사실"이라며 사실상 한·미 간에 소통 문제는 없다고 설명했다.
미국이 차 석좌 낙마와 트럼프 대통령 연설을 통해 북핵 문제에 있어서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는 최근 보도에 대해서는 "과도한 해석"이라면서 "한·미 동맹은 여전히 굳건하고 북핵에 대한 양국 정부의 입장은 일치돼 있다"며 선을 그었다.
다만 우리 정부는 낙마 배경에 대해서는 미국 내부의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밝히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차 석좌 낙마와 관련해 기자들의 논평 요구를 받은 외교부 당국자는 "주한대사 인사와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는 정부가 확인해 줄게 없다"고 밝힌 뒤 "이는 미국 정부가 설명할 사안이라고 본다"며 말을 아꼈다.
아그레망 부여 이후 철회 논란에 대해서도 이 당국자는 “구체적인 인선 절차 관련 사안은 확인해 줄 수 없다”고만 대답했다.
청와대 역시 “미국 인사권 문제라 청와대가 언급하긴 어렵다”고 밝혔다.
◆주한 미국대사 자리 1년 넘게 공석···광복 이후 최장
차 석좌의 낙마로 우리 정부와 미국 정부 간 소통을 시켜줄 수 있는 주한 미국대사 자리가 또다시 공백 상태에 처하게 됐다. 현재 주한 미국대사 자리는 광복 이후 최장의 공백기를 갖고 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의 마지막 대사였던 마크 리퍼트 전 대사가 작년 1월 20일 이임한 이후 주한 미국대사 자리는 1년이 넘게 공석이다. 마크 내퍼 대사대리가 빈 자리를 메우고 있다.
주한미대사관 홈페이지 등에 따르면 광복 이후 1949년 4월 초대 주한 미국대사로 존 조셉 무초 대사가 부임한 것을 시작으로 총 22명의 주한 미 대사가 거쳐 갔다.
지금까지 전임 대사와 후임 대사 사이의 공백기는 보통 2개월 미만이거나 조금 긴 경우 5∼6개월, 가장 길게는 약 10개월이었다.
제임스 레이니 대사가 1997년 2월 이임한 뒤 스티븐 보즈워스 대사가 부임한 그해 12월까지 10개월여 공백이 그동안 가장 길었다. 이 기간에 현재의 마크 내퍼 대사대리처럼 리처드 크리스텐슨 대사대리가 대사 역할을 대신했다.
대사의 장기 부재는 대미 외교력을 약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새 대사 후보 내정, 아그레망, 상원 인준절차 등을 감안하면 대사 공석 기간은 얼마나 더 길어질지 알 수 없는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