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 청산에 부쳐- 건전한 상식 담보 안 되면 역풍··· 원칙 저버린 무리수는 국가존립에 치명상
'집권 1년차, 권력기반 공고화- 집권 4년차, 퇴임 대비 본격화'
임기 5년, 단임 대통령제가 도입된 이래 국정운용 시간표의 기본처럼 자리한 원칙 아닌 원칙입니다. 임기 시작과 동시에 대대적 사정(司正)을 단행해 물갈이 인사로 내 사람들을 심는 한편 반대 세력의 도전 여지를 원천 차단하는 것이지요. 구세력 단죄를 통해 국민적 지지를 이끌어내고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는 방식의 효용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겁니다. 부패 척결이라는 명분 아래 이어지는 광범위한 사정에 국민들이 환호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정치사가 이를 웅변하고 있습니다. 대대적 사정의 현 정권 버전은 적폐(積弊) 청산입니다.
현 정권의 적폐 청산 작업은 거침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탄핵 받은 전직 대통령을 잡아넣은 상태에서 이뤄지는 만큼 거리낄 게 없을 만도 합니다. 구정권 역대 국정원장들이 줄줄이 잡혀 가는 등 보수정권 2대에 걸친 핵심들이 도마 위에 올라 있습니다. 비정규직 철폐, 공무원 대폭 증원 등 선심정책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대통령 지지율은 70%대를 넘나듭니다. 김영삼·김대중 정부 1년차의 그것에 못 미치지만 달라진 정치지형을 감안하면 그 이상의 평가도 가능합니다. 이런 기세에 힘입은 탓인지 차제에 보수의 뿌리를 뽑자는 주장이 여권 내부에서 더욱 힘을 얻는 모양새입니다. 문 총장의 ‘적폐 청산 연내 마무리’ 언명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컸던 게 우연이 아닙니다. 사정 대상에 여권 인사를 적당히 섞으면 정치 보복 여론도 희석시키고 내부 군기를 잡으면서 중·장기 정치포석도 해나갈 수 있으니 집권핵심부로선 게임의 꽃놀이패를 쥔 셈이지요. 전병헌 전 청와대정무수석과 관련한 분분한 해석도 권력의 생리에 대한 인식 때문일 겁니다.
斷罪하되 형평 유지해야
요즘 어디를 가나 적폐 청산이 화제입니다.
적폐···, 청산해야죠. 철저히 가려내야죠. 책임을 물어야죠.
고질화된 폐단을 혁파하겠다는데 누가 감히 이론을 제기합니까.
일각에선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의 한풀이 칼춤’, ‘노무현 대통령 신원(伸冤)’ 등의 단어로 정치 보복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과거에 매달리다가 미래 준비는 언제 하느냐며 점잖게 나무라는 측도 있습니다.
이 같은 비판론자들의 설왕설래에 끼어들 맘이 없습니다. 대충 짐작은 가지만 확증 없이 논란에 끼어드는 게 마땅치 않아서입니다. 더더구나 구정권에서 단물을 빨던 야당 정객들이 앞장서 거품을 물면 정나미가 떨어집니다. 이처럼 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으니 입이 열 개 있어도 닥치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들의 주장처럼 상대의 안보관·국가의식이 의문시된다면 그런 존재가 집권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과오만으로도 중죄인입니다.
‘허물’에서 자유로운 지도층 인사 과연 얼마?
그렇다고 여권의 발상이나 행태에 문제가 없다는 얘기는 결코 아닙니다. 정책이라는 게 시간이 지나봐야 정당성·성패 여부가 판명되니 설령 선심이라는 비난을 받는 대목까지도 논외로 합시다. 너무도 괴이해 믿기지 않는 안보 관련 행각이 반복되더라도 권력핵심부의 정체나 의식 부분은 논외로 하죠. 옹색한 국제정치 현실에서의 불가피한 선택쯤으로 간주해 일단 넘기자는 겁니다. 한국정부가 못 미더워 대북 관련 군사·외교 정보를 제때 통보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진짜라도 말입니다. 허나 근본을 어기며 마구잡이로 이어지는 행태는 아닙니다. 예컨대 전임자들의 비위를 찾기 위해 국정원 메인 컴퓨터까지 뒤지는 행위 등이 전형적 사례일 겁니다. 진상 규명이라는 명분으로 무리를 서슴지 않는다면 그 후유증은 상상 이상이 될 겁니다. 기밀이 요구되는 군사·외교, 경제 교류 등은 현저히 위축될 게 빤합니다. 힘들더라도 다른 방도를 찾아 책임을 묻든지 하는 게 정도입니다. 한번 훼손된 원칙에서 파생되는 부작용은 엄청남을 직시해야 합니다.
국정원의 청와대 뇌물로 발표된 활동비 대목도 그렇습니다. 역대 정부 어느 누가 여기서 자유스러울 수 있나요. 국가 예산을 허투루 쓴 행위는 엄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유행어로 자리잡은 ‘내로남불’이어선 곤란합니다. 언론계 40년 생활 중 거의 대부분을 정치권 주변에서 보낸 사람으로서 감히 드리는 말씀입니다. 대통령에서 국·과장에 이르기까지, 국회의원·검사 등 엘리트 그룹에 속한, 속했던 이들 가운데 아니라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재벌 패밀리와 대기업 간부 등 민간 영역도 예외가 아닐 겁니다. 여기에 위·탈법적이긴 다를 바 없는 ‘다른 돈·이성’까지 까발린다면 온 나라가 뒤집어질 겁니다. 만약 (현직에 계신 분을 지칭하는 게 아님을 재삼 강조드리며) 대통령과 친밀한 공정거래위원장이 재벌로부터 10억원 넘는 재물을 받았다면, 감사원장이 그랬다면 어쩌겠습니까. 글쎄요. 그러니까 대충 덮고 넘어가자는 얘기가 아니라 건전한 상식에 입각한 일처리가 긴요하다는 말입니다. 공정성·공평성이 담보돼야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겁니다.
탄핵심판 선고에 담긴 ‘화합과 치유’ 곱씹을 때
무리수는 종국엔 자기 발등을 찍게 마련입니다. 박 대통령 탄핵사건 재판장이던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은 올 3월 선고 직전 ‘더 이상의 국론분열과 혼란이 종식되기를 바랍니다’라는 대목에 ‘화합과 치유의 길로 나아가는 밑거름’을 추가했다지요. 이 시점에서 모두가 곱씹어 볼 경구입니다.
으스스합니다.
그렇다고 위축돼선 안 됩니다. 힘을 내야죠. Viva R.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