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일의 비바록] 면피·편의·적당주의는 위기 자초, 줄타기 잔재주 피울 때가 아니다. 힘들더라도 원칙을 세워 단호하게 대처해야

2017-11-1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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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일의 비바록]

 

[사진=김현일 초빙논설위원]



면피·편의·적당주의는 위기 자초
줄타기 잔재주 피울 때가 아니다
힘들더라도 원칙을 세워 단호하게 대처해야


뉴욕에 온 지 한 달여가 됐습니다. 학술회의 참관 차 슬로베니아 등지를 다녀온 열흘을 제외하곤 스무 날쯤 뉴욕에 머물렀으니 꽤나 된 셈이지요. 그간 미 국무부 외신기자 브리핑 참석 등을 통해 미국 관계자들은 물론 외국 언론인들과 접촉할 기회도 많았습니다. 미리 확실하게 말씀 드리면, 그러나 나눈 대화는 별로였습니다. 짧은 영어 탓이 컸고, 대화 주제가 부담스러운 것도 그 못지않게 작용했습니다. ‘김정은’으로 시작되는 북한 핵·미사일, ‘박근혜’로 대표되는 한국 정치가 주 메뉴로 등장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나마 지리적으로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떠름한 현안들에서 해방된다 싶었는데,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던지는 상대가 밉기까지 했습니다. 어느 하나 상대의 물음에 응답하는 게 여의치 않은 데다가 해봤자 자칫 ‘이상한 나라에서 온, 웃기는 사람’으로 매도되기 십상이었음은 능히 짐작이 가실 겁니다. 대치한 상대가 핵·미사일을 개발해도 눈 하나 꿈쩍 않고, 때론 그를 두둔하는 듯한 행보에서부터 과거 정권·대기업과 일전을 치르면서도 경제성장을 하는 모습은 그들에게 어떤 설명을 동원한들 가당치 않으니까요. (실제도 그러하지만)언어 소통 능력을 핑계로 자리를 벗어날 수 있던 것은 매우 다행이었습니다.
이달 초 미 국무부가 메도즈 코로나 파크에서 주관한 행사 때의 일입니다. 퀸스에 위치한 코로나 파크는 맨해튼 센트럴 파크 다음 가는 큰 공원이지요. US오픈 테니스 경기장과 야구팀 뉴욕 메츠의 본거지인 시티필드를 끼고 있기도 하지만 한인 밀집지역인 플러싱에 이웃해 있어 한국인에겐 더 특별한 곳입니다. 외국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게 곤혹스럽기도 해서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와 플러싱을 찾았습니다. ‘중국 교두보’로 불릴 정도가 된 플러싱인 만큼 중국인 천지였습니다. 중국계가 완전 점령한 메인스트리트 상권에선 대형 한식점 금강산 정도가 한글 간판 명맥을 잇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중국계로 바뀐 지 오래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건물 소유가 중국계로 넘어가고, 임대료 부담 때문에 교민들이 떠났기 때문임은 물론이지요. 한 블록 떨어진 유니언 상가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메인스트리트에서 밀려난 교민들이 한때 둥지를 틀었으나 이 역시 중국자본에 버틸 재간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플러싱 중심가에서 한참 떨어진 베이사이드 일대가 한인들의 밀집 공간이 됐습니다. 부동산중개업을 하는 한 교민은 웃돈을 얹어주며 베팅하는 중국계에 배겨날 재간이 없지 않으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러면서 맨해튼 32가에 가보라고 권했습니다. ‘Korea Way-한국타운’이 병기된 그곳 말입니다. 곧바로 향한 맨해튼 32가는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한국이 본산인 유명 커피숍 체인 등이 새로 들어선 게 달라진 전부인 듯싶었습니다. 각종 음식점·노래방·부동산중개업소·학원·미장원·사우나·병원·여행사 등등 한글 간판들이 빼곡했습니다. 굳이 없는 게 있다면 보신탕집 정도입니다. 그러나 꼼꼼히 살펴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손님이 들끓던 K면옥 등은 자취를 감추었고, 역시 손님이 많던 곰탕집도 안쪽으로 옮겨 앉았습니다. 한인들이 땀 흘려 일군 노른자위 상권이 저들 손에 넘어가는 게 시간문제 아닌가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런 걱정은 이미 진행형이었습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위치한 5애비뉴 쪽 코너엔 중국자본에 의한 대형 빌딩공사가 한창입니다.
그래봤자 미국 한 귀퉁이에서 벌어지는 잡사일 따름인데 웬 호들갑이냐고 나무랄지 모르겠습니다. 맞습니다. 규모로만 치면 먼 땅에서 벌어지는 구멍가게 쟁탈전쯤으로 치부해도 되고 서울에서 신경 쓸 대상도 안 됩니다. 그런데 익히 알면서도 플러싱 유니언 상가, 맨하튼 32가의 동정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옵니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 각축, 특히 미·중 양강 대결 속의 대한민국 처지가 연상돼서 일 것입니다. 한층 초라해지는···.
미국의 최대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 최고경영자 로이드 블랭크파인은 지난 9일 “"중국 경제가 미국을 추월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라고 예견한 바 있습니다. 그는 “중국 국내총생산은 2016년 11조4000억 달러로, 18조5000억 달러의 미국을 당장 추월할 규모는 아니다”면서 “그렇지만 구매력 기준으로는 이미 미국을 앞섰다”고 평가했습니다.
사실 중국 사회과학원은 올여름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 2034년이면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등 중국경제가 미국을 추월한다는 전망은 이미 여러 전문가들이 경쟁적으로 언급한 바 있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미·중의 역학관계는 바로 우리의 당면 현실로 닥치기에 매번 머릿속을 때립니다. 경제력을 운위하는 게 결국은 군사력을 말하는 것이니 더더욱 그럼은 물론입니다.
25년 전 한·중 수교 당시 한국 대통령을 수행해 베이징을 방문했던 필자는 그 무렵 중국의 속살을 살짝 들여다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베이징 관문인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는 도로는 편도 2차선이었고 길가 외양간 소가 고개를 불쑥 내미는 목가적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오늘날 상하이 마천루가 들어선 푸둥은 널따란 채소밭이었고요. 중국 대 한국의 경제규모가 1.2대1이었다는 수치를 굳이 예시하지 않더라도 당시 상황이 짐작될 겁니다. 이랬던 중국이 세계 최고라는 미국 추월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한국과는? 점잖치 못한 표현이라 내키지 않으나 이 말이 딱 어울릴 듯합니다. ‘좁쌀 백번 굴러야 호박 한 번 구르느니만 못한데, 호박이 열 바퀴 구를 때 두 바퀴도 못 구르는···.’
세계 최강자들 경쟁의 제물이 안 되려면 달라져야 합니다. 지정학적 위치야 숙명적인 것이라 어찌 못한다지만 극복 의지는 우리 몫입니다. 고통스럽더라도 원칙을 갖고 대처해야 합니다. 약자일수록 그렇습니다. 지금처럼 중심 못 잡고 면피·편의·적당주의를 거듭하다간 통한의 세월을 맞을지도 모릅니다. 눈치나 보면서 줄타기 잔재주를 피우다간 백성 고생시킵니다. 또한 역량을 극대화해도 모를 판국에 집안 갈등이나 부추기고, 당장 먹기엔 곶감이 달다고 공무원 증원이나 해대고, 대책 없는 비핵화나 외쳐서는 곤란합니다. 다른 선진국들은 혈안이 돼 매달리는 신기술 개발을 지원은커녕 환경 운운하면서 대못질을 마다않는 행태는 바뀌어야 합니다.
잘되리라는 점술가의 예언에 솔깃해서가 아니라 잘되겠죠. 잘될 겁니다. 온갖 환난을 극복해온 저력이 있는 국민이니까요. Viva R.O.K! <뉴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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